자본주의는 인간을 어떻게 훼손하며 그 대안은 무엇인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2020년 우리는 믿지 못할 광경을 목도해 왔다. 미증유의 전염병이 전세계를 휩쓸어 세계대전보다 많은 사망자를 낸 가운데,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그 나라가 갖고 있는 온갖 병폐와 허구성이 드러나고 있는 참이다.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맞은 21세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쯤이면, 이보다 나은 세상을 우리가 경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라는 의문은 영화 <다운사이징>을 감상한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반복된다. 유쾌하게 소인국 어드벤쳐로 소개된 영화는 초반부 내내 말하기 어려운 갑갑함과 어두움을 드리우더니, 폴의 아내 오드리가 소인 시술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이혼을 하는 것을 통해 한번, 폴의 인생을 바꾼 여인 녹 란의 등장으로 두번, 그리고 최초의 소인국마을이 있는 노르웨이 여행으로 세번 관객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극장에 온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2020년에, 이보다는 나은 영화를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었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들이 영화를 감싸고 흘렀다.
그러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불려진 두 질문을 영화는 한 곳에 담아 기대하지 못했던 깊은 울림과 메세지를 선사하며 한번, 두번, 세번 그것을 보는 이를 놀래킨다. SF 어드벤쳐 영화가 아니라, 통렬하면서도 아름다운 반자본주의 텍스트로서 말이다.
다운사이징, <다운사이징>
다운사이징은 경제학 용어로 기업의 구조조정을 말한다. 인력감축, 사업부 매각, 경영기법 변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회사의 구조를 "슬림"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겐 IMF로 가히 거국적 다운사이징의 충격이 밀어닥친 바 있다. 아니, 지구적으로는 50년 가까이 다운사이징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1920년대부터 약 20여년간 이어진 대공황의 충격을 뉴딜과 전후복구로 이겨내고 맞이한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의 자본주의의 최후의 황금기는 너무나 짧았다. 석유파동으로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끝나면서 기업가들은 역시 전 지구적으로 대대적인 다운사이징을 계속했다. 최저임금을 필두로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일자리도 고용율도 함께 추락했다. 자본주의의 진화 속도는 인간의 생애주기에 비하여 너무나 짧았다. 1970년대에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경제학자와 기업가, 정치인들은 오래 오래 건강을 유지하며 미국을 비롯한 국제경제의 틀을 완전히 바꿨다. 노동자들의 삶, 그들의 꿈, 노동자들의 미래를 지속적으로 다운사이징하면서 말이다. 오늘날 아메리카 드림은 극빈층 노동자들을 월마트의 나쁜 일자리로 오늘도 내모는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의 상상력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기업이 아닌 인간이 다운사이징을 한다면 어떨까? 좋은 일자리도 없다. 학자금대출과 주택자금으로 인해 나의 미래도, 그 미래를 함께 그려나갈 아이도 없다. 주인공 폴이 가진 것은 한때 미국의 백인 주류 사회에 속해, 외과의사라는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는 기억의 흔적들과, 그런 흔적이 무색하게도 값비싼 의료비로 제대로 된 치료비도 받지 못하고 하루 하루 죽어가고 있는 노모의 존재 뿐이다. 그런 그에게, 미국인의 노동자라면 사형선고와 다름이 없는 대출심사 탈락 통지가 떨어진다. 남은 길은, 모든 재산을 정리해 소인이 되는 것 뿐. 다운사이징은 자본주의의 탈락자, 낙오자들에게는 구원의 방주와도 같은 기술이었다. 물론 그러한 목적으로 개발된 기술은 아니지만.
그런 폴의 결단, 그리고 폴 부부를 옥죄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병폐를 영화는 초반부에 상당히 공들여서 묘사한다. 의대생이었던 폴이 학업을 그만둔 것은 어머니가 병을 얻었다는 허망한 사유다. 의료의 질을 떠나 흉악하기로는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미국의 의료체계는 한 순간에 의대생을 온갖 대출에 시달리는 노동자로 끌어내린다. 그리고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된 다운사이징에 대하여 자본주의 집단은 온갖 트집을 잡는다. 다운사이징으로 인해 소비가 줄었다. 집을 살 사람이 없으니 건축도, 미국식 대형 차를 사는 사람도 없으니 자동차도 모두 손실 천지다. 다운사이징을 받은 사람들은 본래의 경제활동을 더는 하지 않으니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본래의 규모의 소비를 하지 않으니 역시 소비세도 내지 않는다. 그런데 국민으로서 보호를 받는다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자금의 자본주의가 국민들을 보호하고 있는가? 소비세, 소득세를 내는 노동자들이 정당한 임금과 노동조건을 제공받고 있는가? 폴은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찬 미국식 자본주의, 그리고 백인 주류사회를 과감히 탈피하기로 결정하고, 드디어 레저렌드에 들어선다.
유토피아, 거짓된
꽤나 위트넘치고 감동적인, 그리고 영화의 마케팅 포인트였을 소인 시술 전후의 장면을 통해 느끼는 것은 백인 주류사회에서 레저랜드의 다인종 유토피아로의 표변이다. 온통 백인들에 둘러싸여 그곳에서 소외된 폴의 삶과는 달리, 레저랜드에선 흑인과 히스페닉이 저마다 제 삶을 산다. 존중받는 노동자로서 마음껏 웃으며 살고, 낮에는 여가 저녁엔 파티를 즐긴다.
미국의 인종차별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만큼 잔인한데, 2000년대 최악의 경제 스캔들인 서브프라임모기지 파산 과정에서 은행들은 흑인들을 콕 찝어 파산이 뻔한 악성 대출계약을 맺도록 한 바 있다. 심지어 서두에 언급한 뉴딜정책 입안과정에서도 백인 주류집단은 흑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정도이니, 빈부격차가 그 어느때보다 심화되고 있는 지금 미국에서 흑인과 히스페닉의 삶이 얼마나 가혹한지는 불문가지. 그러나, 영화는 그런 인종차별이라곤 없는 "다운사이징"의 이상향을 마음껏 보여준다. 맞다. 기업의 가혹한 구조조정, 노동자 착취의 다운사이징에 맞선 노동자의 다운사이징은 더 없이 아름다운 돌파구로 보인다. 주인공 폴이 꿈에서 깨는 알약을 하나 먹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시, 맞다. 다운사이징은, 해결책이 아니다. 기업의 다운사이징이 경제를 살리는 해결책이 아니었던 것처럼, 노동자의 다운사이징도 해결책은 아니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베트남에서 반정부시위를 하다가 강제로 소인 시술을 받은 여성 녹 란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다운사이징을 넘어선 대안을 상상하도록 다시 관객을 부추긴다. 왜? 어째서 레저랜드의 달콤한 꿈에 젖어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국가간 인종간 장벽이라는 허상이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비판의식을 희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국경이 없다. 인종과 국가를 넘어서 자본가들은 이익을 위해 연대한다. 국가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에 급급한 노동자들은 국경 바깥의 현실을 돌볼 겨를이 없다. 그저 기업의 다운사이징에 맞서 일시적인 안정을 어느정도 확보하면 그것에 만족해, 여전히 나 말고 다른 사회적 약자를, 세계 곳곳에서 착취하고 있는 자본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다. 레저랜드의 유토피아는 알약 하나 먹고 꿈에서 깨어나면 흩어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잠시 자본주의의 사각지대로 대피했을 뿐, 그 거대한 날개는 언제든 노동자를 할퀴어 우리 몸을 산산조각, 부리로 쪼개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폴 앞에 선 녹 란이라는 여자는, 자본과도 결탁했던 권력에 의해 이미 다리 하나가 없다.
"갑자기" 생태주의로 치달아버린 영화?
녹 란의 등장, 그리고 녹 란이 보여주는 국경 밖 자본주의의 실상은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배신하는 것일지언정 영화의 메세지를 자본주의에서 생태주의로 확장해나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녹 란의 장애는 스스럼없이 폴이 아시아인, 장애인, 여성, 극빈층인 그녀의 삶으로 다가가 연대하도록 이끈다. 베품은 공존의 가장 중요한 동기다. 애초에 장애가 없으면 폴이 그녀의 삶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마치 자본가들이 세계 곳곳의 굶주린 자들을 외면하듯 말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선량함을 지닌 폴은 그녀를 돕고, 그녀를 통해 세계의 진실을 비로소 본다. 미국이라는 거대 자본주의 시장에서 안온함을 찾는 이들이 애써 눈감는 장벽 밖의 삶.
그리고 그들은 함께 노르웨이에 간다. 처음 소인 기술을 개발하고 20년 이상이나 소인 사회를 유지, 발전해시켜온, 진정으로 선량함과 공존의 정신을 지닌 이들을 만나 폴은 자본주의가 아닌 생태주의에 비로소 눈을 뜬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가 대체 어디로 가는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고.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20세기의 지성은 공산주의를 그 자리에 두었다. 그러나 20세기, 자본주의와 그 대척점에 선 공산주의는 오랜 기간 투쟁하며 지구를 핵전쟁이라는 유례없는 공멸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21세기의 지성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생태주의로 택하여 새로운 시대질서를 꿈꾸고 있다. 공산주의가 사회합의를 통하여 인간의 상호공존을 지향하고, 그것을 유지할 권력 장치로서 합의체, 곧 "당"을 채택했다면, 생태주의는 자연에의 합일을 통해 생명체 전반의 공존으로 나아가고자 하며, 그것을 유지할 권력, 그 자리에 지구적 생태질서를 둔다. 철조망, 총알, 화학물질 대신 자연과 함께 살 수 있는 곳을 찾고 인간의 소비를 스스로 절제하여 "누구도 상처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질서"를 구축하는 것.
대중예술로서는 훌륭하지 못한 선택일 수 있으나 기업의 다운사이징에 맞선 노동자의 다운사이징으로 시작된 영화라면 생태주의로의 시각전환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리고 이 선택을 기꺼이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다운사이징>은 반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의 생태주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노르웨이의 과학자가 오로지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그것이 미국을 무대로 한 영화에서 자본주의적 가치로 잠시 전환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폴과 그의 부인 오드리의 이혼을 이용해 영화는 순식간에 100배 이상 불어난 자본이 선사하는 풍요를 그리는 것을 피해가는 선택을 했다. 자본의 풍요가 아닌 자연의 풍요, 그것을 소라고동피리까지 동원해 최대한 정성들여 묘사해서 영화는 인간이 나아갈 길을 힘주어 역설한다. 그리고, 그 생태주의의 배경이 반드시 자연환경이 아님 또한.
영화와 현실
영화를 보게 된 것은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책을 읽다가 "다운사이징"이라는 단어가 눈에서 걸리면서였다. 그 자리에서 정보를 검색해서 내 짐작이 맞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오늘 집중해서 보았다. 근 2,3년간 개봉된 영화 중에 손에 꼽을만한 명작이라고 할만한데 가치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설교에 가까울정도로 메세지가 명확한, 충분히 친절한 영화지만 우리에게 생태주의를 받아들일 배경지식도 자본주의에 대한 자성을 일깨울 여건도 마련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자본주의 수호를 위해 정치, 지식, 경제권력이 잘 짜여진 팀워크로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교육제도 또한 일그러트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교육수준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이 경쟁과 개인주의로 일구어진 탓에 생태주의로의 인식적 진보를 일구는 것이 하염없이 멀기만 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어벙벙한 눈으로 미국 대선의 카오스를 감상하게 되고, 하루 하루 미디어를 뒤덮은 자본의 홍수에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데 말이다.
어떤 영화는 현실과 지극히 멀어 관객을 혼란시킨다. 한 없이 가까이 시작해 한 없이 멀어보이는 노르웨이의 피요로드로 떠난 영화는, 글쎄, 이것이 우리의 현실과 얼마나 멀다고, 우리는 느끼고 있을까. 12월 17일 내일은 올해 가장 추운 날이 될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