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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ug 26. 2020

엔트로피 역행은 가능할까? 라는 질문과 <테넷>

크리스토퍼 놀란스러운 세상을 구하는 상상력

 놀란 감독의 전작인 <인터스텔라>가 과학 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결말로 마무리되었을 때 그것을 비판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인류의 구원과 가족의 사랑을 뛰어넘는 과학법칙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시간 30분 동안이나 물리법칙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어대놓고 정작 중요한 결말에 가서 완전히 그것을 박차고 순수 SF로 나아가버리고는, 게다가, 그 결말이라는 게 황당한, 말로 안되는, 중력법칙을 미래인들로부터 전달받아서 인류가 중력을 자유자제로 조절해버릴 수 있는 결말이라니?


 그러나 그것이 바로 SF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리고 놀란 감독은 과학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이 아니라 과학을 소재로 한 영화를 찍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과학법칙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영화 내에서 일관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도 그저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법칙은 절대적이지 않다."


 <인터스텔라>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질량과 중력의 법칙을 걷어차버린 것처럼, 놀란 감독은 이번에는 또 하나의 절대적인 법칙, "엔트로피는 역행하지 않는다."를 걷어차버리고 거기에서부터 영화를 시작한다. 과학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더라도 시간여행, 혹은 시간역행은 꽤나 오래된 인간의 관심 대상이기 떄문에 시간역행에 대한 근거로 엔트로피 법칙을 가지고 온 것이 영화의 난이도를 아주 높이진 않았다. 그리고 시간여행의 근거로써 엔트로피역행이 활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꽉 짜인 주제도 아니다. 오히려 시간역행 장면 여러곳에서 꽤나 허술한 옥에 티들이 발견되고, 핵심적인 시간역행 설정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이 안된다는 걸 꽤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인터스텔라>에서나 <테넷>에서나 중력법칙, 엔트로피법칙을 잘 알아야 이해를 하고,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정은 설정으로, 소재로 받이들이면서 충분히 인내심을 지니고 결말까지 기다리면 대부분의 의문점은 해소되고, 시간여행 영화의 매력인 앞선 장면에서 복선을 찾는 것을 꽤나 즐길 수 있다. 이런 면에서 2회차 관람의 가치가 큰 영화다. 놀란 감독 스스로 "이해하려고하지 말고 느끼세요."라며 영화 속 대사를 인용했듯이, <테넷>을 보며 타임라인을 짜맞추고 개연성에 집착하는 것은 그리 좋은 감상은 아닐듯하다. 원한다면 2회차 관람을 예약하고, 그 전에 해설 영상 정도를 참고하면 영화를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


 영화를 다시 보아야 하는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하면, 앞에서 말한대로 허술한 점도 많은 영화다.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으려 예고편도 거의 보지 않고 관람을 했는데, 중반부의 인물들의 감정선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엔트로피 역행을 활용한 액션 장면이 처음에는 신기하다가 후반부에 가면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놀란 감독이 액션에 장점이 있는 감독이 아니거니와, 주요 시간역행 액션들이 액션 자체에 집중하기보단, 시간역행을 묘사하기 위한 실험적인 연출에 가깝기 때문이다. 심지어 놀란답게 CG를 쓰지 않는다는 그 고집이 대규모 액션에 결합되었으니, 이 부분에서 실망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듯하다.


 그런 주제에 어렵긴 정말 어렵다. 엔트로피 법칙 때문이 아니라 스토리 전개가 지나치게 빠르고 대사는 함축적이다. 등장인물들이 첩보전을 하는 거지 감독이 관객과 첩보전을 하는 것이 아닌데, 초반부의 첩보전 전개는 지나치게 신속하고 중반부의 감정묘사는 지나치게 길다. 그리고 좀 갑작스럽다. 영화를 집중하고 보는데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가 꽤 튀어나온다. 이런 연출은 좀 개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인셉션>까지만 해도 이정도로 설정이나 대화를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말이다.


 종합하자면, 시간역행 장면은 실망할 수 있고, 과학적 설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연출은 불친절해서 중반까지 관객에게 상당한 지루함을 선사하는 주제에, 결말의 카타르시스는 상당히 미약한 영화다. 러닝타임이 이리 길면서 관객보다는 자기의 상상력에 골몰한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 웅장한 사운드트랙도 액션과 다소 부조화를 이룬다.


 그런 반면에, 엔트로피 역행이라는 까다로우면서도 SF 장르에서는 식상한 소재를 통해 구축해낸 <테넷>의 주제의식은 영화의 가치를 두배 세배 높인다. 나는 이것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인터스텔라>에서 보여준 인류 구원의 문제의식을 한단계 발전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북유럽과 지중해를 주 무대로 삼는데, 때문에 핵심적인 장면에서 바다가 상당히 자주 드러난다. 특히 결말 장면의 풍광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핵심인물의 감정적 카타르시스와 함께 보여주고 있는 장면으로 비록 시각적으로 뛰어난 연출은 아니지만 영화의 마무리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그 바다는 어떤가? 놀란 감독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말한다. “해수면은 높아지고, 강은 말랐으니까.”


 엔트로피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연관개념은 지구온난화다. 마침 지금 우리가 온난화로 인해 유례없는 폭우와 함께 덥지 않은 여름을 체험한 바니, 시베리아의 꺼지지 않는 산불과 극지방의 빙하 감소가 한발짝 성큼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터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각계의 여러 논의가 있었고 그중에는 <테넷>에서 소재로 쓰인 엔트로피 역행이 있다. 불을 얼음으로 바꾸는 것. 녹아버린 극지방의 빙하를 다시 얼리는 것. 이미 65년 전에 아이작 아시모프가 <마지막 질문>이라는 단편에서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 바다.


 즉, <인터스텔라>에서 중력법칙이 인류 구원의 열쇠로 쓰였듯 <테넷>에선 엔트로피 역행이 인류 구원의 열쇠로 암시된다. 물론 영화의 장르가 다르기도 하고 두 과학법칙을 다루는 놀란 감독의 방식은 큰 차이가 있지만, 두 영화 모두 인류 구원의 문제를 둘러싼 투쟁, 그 한가운데에 각 기술이 놓여있다는

점은 같다고 볼 수 있다. 놀란 감독이 시간역행을 먼저 떠올렸든지 혹은 엔트로피역행을 먼저 떠올렸든지간에, 엔트로피역행을 떠올렸을 때 영화의 주제의식 또한 함께 완성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그렇다면, 더더욱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과학 설정도, 첩보전과 인물들의 알리바이도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이해하려 하기보다 느끼려 노력한다면, “어 얘가 왜 여깄어? 다른 애가 어디 간 거야?” 라는 질문을 굳이 던지기보다는 그가 하는 말 자체를 오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엔트로피 역행을 통해 지구를 구하고자하는 안타고니스트와 프로타고니스트들의 싸움을.


 가족의 사랑, 인류의 구원보다 중요한 과학법칙은 없다. 주제보다 설정이 중요한 영화도 없다. 물론 설정이 크게 잘못인 영화는 당연히 아니고. 영화를 보며 아귀를 짜맞추는 것이 전부인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 벌써 다 짜맞춰놓은 사람들이 다 있으니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저 <테넷>을 보며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순간 순간 즐기면 그게 가장 좋은 감상법이다, 덤으로, 로버트 패틴슨의 모든 연기가 아주 끝내줄 뿐더러 캐서린 역의 엘리자베스 데비키가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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