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 젠킨스의 소신과 1984년이라는 공간
영화의 주제인 "진실"을 담고 있는 아마존의 인트로가 지나고 나면 영화는 1984년의 아름다운 풍요로움으로 시작된다. 칼라풀한 쇼핑몰에서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모두의 그 행복하고 즐거운 표정. 조지 오웰의 <1984>를 너무나 의식하고 있는듯한 영화의 제목과는 정 반대의 아름다움 속에서 다이애나는 그러나, 단 하나의 연인의 기억을 떨치지 못한 채로 인간 사회 속 이방인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소원을 들어주는 고대 유물에게 우연히 소원을 빌게되는 사소한 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영화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초반부의 전개가 상당히 빠른데, 사건의 핵심 소재이자 주제 그 자체이기도 한 "원숭이발"에 해당하는 드림스톤 관련 몇가지 사건들이 초반에 빠르게 샥샥 지나가면서 영화에 대한 인상을 좀 깎아먹는다. 2020년 개봉된 영화 치고는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연출이 지나치게 클래식해서 관객들로선 "응? 지금 무슨 일 있었어?"하는 사이에 이미 모두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인, 심심한 연출방식이 영화 끝까지 지속되면서 소원을 비는 무게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데다가, 소원이 이루어진 뒤의 변화도 도통 썰렁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30분만에 핵심 인물 세사람이 각자 소원을 빌고, 그 결말도 너무 뻔하게 예상된다. 러닝타임이 두시간 남은 시점에 기대가 짜게 식는 것이다. 영화 <사랑과 영혼>과 비슷한 "몸 빌리기" 연출 역시 우선 수용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이해를 하고 나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이처럼 영화는 곳곳에 몰입의 장애물을 비치하고 있다. 1984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인트로의 자막 연출, 도입부 워싱턴 도심의 정경, 그리고 소재와 연출, 결말까지 레트로한 감성이 듬뿍한 영화인데 이걸 알고 극장에 오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고,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이해를 하는 사람은 그보다 적으며, 이해를 한다 해도 동의할 사람도 많지 않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고전적인 느와르의 방법론을 채택한 <조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것과 비교하자면 <원더우먼> 시리즈에선 가장 인기 있는 여성히어로물로서 호쾌하고 뜨거운 액션을 바랐을 관객들의 기대를 대놓고 앞통수를 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나 액션 히어로물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 한두발짝 거리를 두고 영화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영화는 고유의 놀라운 장점들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첫째, 결말이 너무나 뻔하게 예측되는 러닝타임 두시간을 어떻게 관객들을 설득하게 해줄 것이냐? 메인 빌런인 맥스웰 로드와 바바라의 행적을 중심으로 표현되는 "원숭이발"의 내러티브다. 맥스웰 로드는 지금까지 본 어느 악역과도 다른 독특한 매력을 보이는데 그가 드림스톤의 힘을 얻으면서 자신의 원래 정체성을 잃고 완전히 스톤 그 자체가 되어서 오로지 소원을 들어주는 데에만 혈안이 되는 연출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을 통해 자연스럽게 "원숭이발"의 주제가 확장되며 인간 사회와 냉전에 대한 거대담론으로 확대되어 간다. 히어로물에 심리와 사회철학을 버무린 맛깔나는 구성이다.
둘째로 맥스웰 로드의 행적에 따라 자본주의의 황금기에서 풍요에서 냉전의 광기로 완전히 변모하는 1984의 광경이다. 총천연색으로, 풍성한 파마머리와 헤어밴드로 표상되는 과거의 정경이 급작스럽게 냉전의 무채색 광기로 변화하는 과정이 상당히 자연스럽고, 영화의 결말에서는 감독이 의도하는 메세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연출과 영화의 주제가 하나로 합쳐진다. <버드맨>에서 리건 톰슨이 팬티바람으로 한손엔 권총을 든 채 인파를 뚫고 지나가는 장면으로 비유를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리고 그 시점에서 1984의 공간이 소설 <1984>이 내러티브 및 주제와도 결합된다. 빅브라더, 초대형 모니터, "증오". 영화의 클래식한 연출이 없다면 1984년의 이런 연출이 오히려 겉돌았을 것이다. 탄탄하고 일관된 구성에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셋째로 원더우먼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과정이다. 나는 <다크나이트>가 크리스토퍼 놀란 버전의 배트맨 트릴로지에서 좀 애매한 지점에 위치한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해당 영화에 이르러 배트맨의 정체성이 비로소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비긴즈>의 배트맨은 이제 갓 영웅으로서 태어난 상태이고, 완전한 탈바꿈을 한 상태가 아니다. 여전히 배트맨의 길을 거부하면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고뇌가 <다크나이트> 속 브루스 웨인의 심리상태이고 그런 그의 딜레마는 레이첼의 죽음과 하비 덴트의 몰락의 한 축이 된다. 그러나 마침내 오명을 쓰더라도 영웅의 길을 택함으로써 흑기사 배트맨의 정체성이 확고해지고, 이제야 제대로 된 배트맨의 영웅서사가 시작될...줄 알았는데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나와버리고 트릴로지는 종료된다. 한 5부작 정도가 <다크나이트>를 기준으로 한 서사로서는 완결성이 높았을 텐데 말이다.
<원더우먼1984>가 원더우먼의 영웅 서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딱 그러하다. <원더우먼>에서 스티브 트레버와 이별을 하고 영웅이 되는 길을 택했지만 다이애나는 인간세계의 어둠을 직면하고 자신이 그들 속에서 자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배트맨과 슈퍼맨, 슈퍼 히어로들이 모두 겪는 고뇌다. 그로 인해 원더우먼은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살게 되면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스티브의 그늘을 늘 그리워한다. 그러나 이번 영화 속에서 다이애나는 드림스톤 사건에 휘말리면서 결국 스티브 트레버를 극복하고, 동시에 자신의 영웅성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영혼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면서 비로소 인간 세상을 긍정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그런 다이애나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표현해준다. 이제 다이애나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이 지켜야 할 것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신의 딸로서의 운명에 이끌려서도 아니고, 자신의 힘에 취해서도 아니라, 이 세상은 지킬 가치가 있고 인간에겐 희망이 있기에. 이제 진정한 히어로로서 기꺼이 다이애나는 자신을 버리고 세계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된 것이다.
액션히어로물이라는 틀을 버리고, 2020년의 스타일을 버리고 1984년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원숭이발" 이야기를 밀도있게 뽑아냄으로써 감독 패티 젠킨스는 히어로물 유니버스가 아닌 독자적인 프렌차이즈로서 원더우먼의 두번째 작품을 뽑아내었고, 상당히 성공했다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과도하게 유니버스를 의식해서 망가지곤 했던 DC의 고질적 병폐를 훌륭한 감독의 뚝심으로 극복해낸 모범적인 케이스다. 안타깝게도 크리스토퍼 놀란 수준의 액션 연출력으로 히어로물로선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글쎄, 내 기대치가 액션엔 어차피 별로 없어서 영화의 평을 깎아먹을 정도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장점이 너무나 많고, 히어로물로서 주제와 연출까지 훌륭하게 버무린 드문 성취에, 역시나 훌륭한 음악까지 얹혀져있지 않나.
안타까운 점은 패티 젠킨스가 다음 영화 한편으로 자신의 원더우먼 트릴로지를 마무리할 의사를 밝혔다는 것인데, 갤 가돗을 주연으로 한 원더우먼 프랜차이즈는 5부작 정도는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편에서 이제 정체성 확립된 히어로를 다음 영화에서 뜬금 대단원을 내는 걸 또 보고 싶진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