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고교 영어 서술형 평가의 새로운 접근
"자. 오늘은 수업 하기 전에 미리 활동지 설명을 다시 한번 할게요. 선생님이 이렇게 수업 바꿔서 하는 게 처음이라서 애들아, 좀 빠트리는 게 많네. 어제 활동지들도 같이 좀 꺼내놔줄래?"
"샘 오늘은 게임 안해요?"
"마X쭈~ 마X쭈~."
"너희들 벌써 내가 막 친근하고 편안하고 그러지? 좋네. 설명 먼저 하고 게임 할게요."
내가 원래 덤벙덤벙하는 편이라, 본문 수업 2차시에는 교실에 들어가서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자 앞면 보세요. <모둠>이라고 되어 있죠? 그거 다 채워야 되구요. 안 채우면 모둠 수행 점수 깎습니다 0.4점."
"다요?"
"네. 그거 다 서술형 예상문제임. 객관식도 있고."
"헐."
1) 본문의 키워드를 다섯가지만 찾아서 동그라미 해 봅시다.(단어 하나말고 여럿도 됨!)
2) (A)The goal이 의미하는 바를 본문에서 찾아 써보세요.
3) vision board에 담기는 것 네가지를 찾아서 써 보세요.
4) [as...as...]의 쓰임새 알고 있나요?
5) [as...as...] 문장을 하나 만들어봅시다!
아이들이 이번에도 몸이 숙여진다. 실제로, 활동지의 다섯문제 모두 실제 학교에서 흔하게 출제하고 있는 서술형 유형들이다. (1)영어 지문 키워드를 빈칸으로 넣고 적절한 말 고르기는 객관식이나 서술형으로 두루 흔하게 나온다. 그리고 (2)핵심 키워드가 의미하고 있는 문장 찾기도 애용된다. (3)번의 경우 지문 전체를 요약하는 문제. 실제로 이 문제 유형들은 독해 지문을 잘 숙지하고 있어야 풀 수 있다. 그러나, 학원에서 학교 기출문제를 좀 모으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범위에 있다. 나는 학원에서 우리 교사들의 문제를 예측해서 쪽집개 타이틀을 다는 것을 그리고, 굉장히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마침 앞자리 아이가 책상 위에 학원 교재를 꺼내놓았다. 나는 "잠깐만."이라고 말하고 교재를 집어서 페이지를 넘겼다.
"아. 있네. 봐. 서술형으로 그대로 낸다니까."
교재를 내려놓았다. 학원 강사들도 알고 나도 안다. 학교 서술형 출제의 "보편적"인 스타일을. 그리고 학원을 다니고 안다니고에 따라서 성적이 크게 갈리고 있다는 것도.
"샘 그럼 어제 활동지 문제들도 서술형 예상이예요?"
"정답!"
"헐 대박."
아이들이 차라락 본문 1차시 활동지를 위에 꺼내놓았다.
1) a device for flying 가 의미하는 것을 영어로 써볼까요?
2) 본문의 키워드를 다섯가지만 찾아서 동그라미 해 봅시다.(단어 하나말고 여럿도 됨!)
3) 본문에 나온 visualization의 의미와 효과를 우리말로 설명해봅시다.
의미 :
효과 :
4) the more...the more의 뜻, 알고 있나요? [The 비교급...the 비교급]
5) [The 비교급...the 비교급] 문장을 하나 영작해봅시다!
활동지를 만들면서 서술형 예상문제로 가능한 것들을 골라서 문항을 구성했다. 실제로 이러한 서술형 출제방침이, 아이들이 사교육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면 적절한 출제지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사들은 모두 교사들의 출제범위를 최대한 검토해서 내신에 영향을 끼친다. 그런 체계 속에서 서술형 평가를 쪽집개의 영역에 둔다는 것은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알았지 애들아? 수업 열심히 하시구요. 그리고 영어 좀 싫은 사람들도, 일단 모둠활동 같이 하면 샘이 간식이랑 수행평가 다 챙겨줄거니까 걱정말고. 그럼 게임 할까요?"
"네에-."
오늘의 게임은 내가 멋대로 이름붙인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라는 단어 연상퀴즈다. 모둠별로 색연필과 빈 A4 용지를 나눠줬다.
"애들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개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다 알지? 영어로 하면 됩니다."
"!?"
"예를 들어 내가 Yellow를 정해주면, Yellow니까 banana를 쓰고, 단어와 단어 사이를 이어. 그리고 번호를 <1>이라고 메겨놔. 그럼 Banana니까 나는, fruit을 쓰고 선을 그은 다음에 다시 <2>...이해 했니?"
"샘 그럼 아무거나 써도 돼요?"
"어. 아무거나. 아무말로 잇기만 하면 돼. 그리고 한 줄로만 가는 거 아니야. 모둠에서 다른 애가 Yellow에서 red를 잇고, 거기에 또 color, sun, blue...막 이어. 그런데, 그럼 숫자가 막 섞이지? 모둠에서 한명은 그 숫자 체크하는 애 정해놓으세요."
나는 칠판에 마인드맵처럼 어지럽게 단어를 이어가며 설명을 했다. 이 게임은 아이들이 연상하는 이미지를 바로 영어로 바꾸어내는 연습을 하는 게임이다. 즉, 암기보다는 기억인출형 단어학습이다. 아이들이 단어를 외우기만 하는 것보단, 자꾸 써보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수업의 첫단계.
"자~ 각자 색연필 진한 색으로 한씩 챙기시고, 단어 제시합니다. 종이 가운데에 크게 이 단어 쓴 다음에 칠판처럼 보고 똑같이 단어 쓰면서 이으면 돼. 알았지?"
"네에~."
"마지막! 100개 먼저 채우는 팀 1,2,3등 줍니다. 그럼...robot!"
아이들이 모둠으로 모아놓은 책상 가운데에 코를 박고 바쁘게 떠들면서 쓰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내에 할 수 있고, 이 활동의 장점은 모든 수준의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활동 시간에 비해 검토 시간도 좀 걸린다. 100개를 다 세어야 한다. 그리고 단어 중에 틀린 것도 있다. 어쨌든, 첫날엔 그렇게 시작했는데...
"야! 이거 마블 캐릭터로 누가 채우래. 게다가 Thor는 스펠링도 틀렸어. 땡땡땡!"
"아 쌤 안돼요."
"애들아, 고유명사는 해당 영역별로 딱 하나만 인정합니다. 마블에서 ironman했으면 다른 캐릭터 더 못써."
"샘 그럼 다른 영화 시리즈는 써도 돼요?"
"그래 된다. 너희가 wolverine이랑 cyclops를 쓸 수 있다면."
"?"
"아 됐고, 야야 다른 조 100개 됐니?"
"저희요!"
왁자지껄. 빙고보단 내 품이 덜 들어간다. 그리고 시간도 짧아서 좋다. 한 두 모둠 정도는 중도에 포기하고 사이가 벌어졌다. 그 아이들에게 잠시 붙어있다 보니 금새 100개를 채우고 손을 든 모둠들이 있다. 다음 활동 때 지켜보기로 하고 우선 1,2,3등 모둠을 모두 확인해 보상으로 카라멜들을 주었다. 고작 네 학급 수업지도를 하는데 매일 소비되는 카라멜들이 장난이 아니다. 사비를 들이고 싶진 않은데, 양심의 가책이 들 정도다. 그래도 빠르게 학교에 카라멜 추가 주문을 넣어야겠다. 시계를 봤다. 30분이 남았다. 여유있게 활동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자. 오늘 활동지부터~"
나는 칠판에 조금씩 자릴 띄워 번호를 (1), (2), (3), (4)를 쓰고, (5)는 조금 넉넉한 공간을 잡고 썼다.
"자. 나와서 쓰시구요. 이름 적고 가세요. 아무 곳이나 먼저 쓰면 돼. 5는 여러명 쓸 수 있어."
"샘 5는 영작이예요?"
"어. 그리고 이것도 서술형 낸다."
"꺄아아아아악."
"아 영작 제일 싫어."
"샘 영작을 시험에 내요?"
"어. 그러니까 하세요."
"어떻게 내요?"
"오늘 보여줄거야."
"아!"
아이들이 칠판에 나와 나름의 답과 자기 이름을 쓰고 들어갔다. 나는 개인점수를 부여하고, 카라멜을 나눠줬다. 그리고 (5)번을 보았다. 두명이 나와서 썼다.
"자...민근이는 I can eat hamburger as much as I want 라고 썼네. 잘했어요. <as as 구문>은 당장 이번에 시험 범위는 아니야. 기말에 나올거야. 그런데 지금 미리 할게요 여러분. 민근이 아주 문장 잘 썼고, 다만 선생님 생각엔 이 문장에 주어만 바꾸면 좋을 것 같아. You can eat hamburger as much as you want 라고 하면 상대방에게 하는 말로 더 자연스럽겠지? 그리고 hamburger는 보통 셀 수 있는 명사로 보거든. s 붙이면 좋겠어. 잘했어요."
"샘 그럼 가산명사니까 much는요?"
"훌륭해요. many로 하면 틀릴 일은 없겠지?"
그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자 이 문장의 경우에 선생님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많은 햄버거를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영작 서술형으로 낼 수 있을 거예요."
"!?"
"걱정마 얘들아. 수업 다 해줄거야. 일단 설명 들어요. 그럼 선생님 생각엔, <You can eat hamburger>를 2점 정도. <as many>를 2점. <as you want>를 2점...6점이네요. 그럼 우리 학교 서술형 문제 중에 가장 어려운 난이도예요."
"선생님 서술형 이렇게 내신다구요?"
"낼 수도 있다구."
똘똘해 보이는 남자애가 머리를 긁적이며 필기를 한다. 슬쩍 다가가서 보니, 활동지가 빼곡하게 빨간색 글씨로 적혀있다. 나와서 발표를 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의 답안은 모두 적어둔 모양이다.
"자 그럼 다음 사람 문장을 볼게. 수정이는 She is pretty as much as my sister라고 썼네요. 잘했어. 잘했어요. 그런데 요게 틀린 부분이 있네요. 보통 너희들이 외울 때 비교하는 이 형용사나 부사가 as와 as 사이에 들어가는데... She is as pretty as my sister. 이게 맞는 문장이야. as much as 뭐뭐뭐~ 이렇게 외우다 보면 이렇게 실수 많이 해요. 자 그런데,"
"그럼 수정이는 감점을 합니다. 6점 중에서, she is pretty는 맞게 썼다고 치고, as much를 점수를 빼야겠지? 1점 감점하자."
"아..."
"알았죠? 내가 그럼 이 두 문장을 우리말로 쓰고 영작 문제 내면 여러분 맞출 수 있겠어요? 근데, 만약에 낸다고 하면 민근이 건 6점, 수정이거는 5점이나 4점이 적당하겠다. 그러니까 수정이 문장 정도가 답안에 적힌다면, 3점 정도 받을 거야."
"네 근데 샘 이거 그대로 내요?"
"아니지 당연히."
"아! 샘!"
"아니, 10개 학급 다 다르게 쓰잖아요. 그럼 다른 반 애들은 이 문장이랑 다르게 나오잖아요. 영작 문장은 여러분들이 쓴 문장을 내는 게 아니라, 이정도 수준에서 적당히 낼 수도 있어요."
"아 어려워요."
"당연히 어렵지. 자...아래 비전보드. 지금 했으면 좋겠는데 우선, 이거 적을 사람들 적고, 뒷장 넘겨보세요."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강의식 수업을 할 땐 시계를 보는 일이 거의 없고, 시계를 본다는 것 자체를 수치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수시로 시계를 본다.
"자 다시 설명합니다. 뒷장에 네 칸 있죠? 한 칸 씩 모둠원들이 분담해서 합니다. 야 첫번째칸 짧네. 단어 외웠지? 그런데 이 활동지가 정말 중요한 게 있어 얘들아."
슬슬 또 목이 아프다. 침을 한번 삼키고 말한다.
"너희들 이거 활동지 봐라. 이거 개인당 한칸씩만 오늘 채우면 되는데, 시험 기간 땐 본문 전체 해석 필요할 거 아냐? 그치? 그때 어떻게 하면 될까?"
"친구들꺼 모으면 돼요?"
"그렇지. 아니 뭐 시간 남으면 쉬는 시간에 써도 되고. 이 활동지 모아놓으면 앞장엔 서술형 예상문제들 다 내줬죠. 뒷장엔 자기가 친구들 꺼 모으기만 하면 본문 해석 다 되어 있지. 공부 하기 좋겠죠?"
"오..."
"그리고 애들아, 거꾸로영상도 있어요. 학교 홈페이지 가입 잊어먹지 말고, 시험 전에 또 보고."
본문 1차시의 멘붕을 스스로 반성하며 퇴근시간 버스에서 2차시 활동지의 수업 구상을 곰곰히 오랜시간 했다. 오늘의 수업은, 매끄럽고 만족스럽다. 수업 재구성을 하면서 활동지를 만드는 것은 고된 일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게 만들어놓은 활동지가 아이들의 지필평가에 제법 쓸만한 틀로 나와서 뿌듯했다. 나는 아이들의 지필평가를 위한 최저학력기준으로 <암기를 통해 본문해석이 가능하다>는 정도로 잡고 있는데, 이들 활동지를 가지고 수업을 따라오기만 해도 이미 본문해석을 스스로 할 수 있고, 게다가 서술형 문항도 대비할 수 있게 된다. 학원을 다니지 않고 우리 수업만 들어도 불리하지 않다. 결정적으로, 아이들이 잠들지 않는 수업이 되고 있다. 오늘까지는.
"자...시간이 좀 있네요. 3분 드립니다. 활동지 뒤에 한칸씩 하시구요. 앞장에 마인드맵도 할 수 있겠네. 뒷칸 먼저 합시다. 모둠점수 깔거야. 얼른 해"
아이들이 떠들면서 한칸씩 해석을 했다. 일주일 사이에 친해진 모양인지 모르면 물어보며 잘 하는 편이다. 특히나 다행한 것은, 아까 단어연상 게임을 안하던 아이들도 이 한칸씩 해석은 제법 한다. 물론, 학원 교재가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제법 눈에 띄었다. 그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을 가르쳐준다. 계획대로 잘 되고 있다. 나는 순회를 하며 모둠점수 깎이지 않게 잘 하라고 엄포를 놨다.
"5분 남았네. 자 비전보드 그리세요."
"샘 이것도 해요?"
"응. 시험에 안나올거같죠?"
"이걸 어떻게 내요."
"응 개인이라고 되어있으니 안해도 돼. 그리고 싶은 사람만 그리면 됩니다."
"근데 어려워요."
"비전보드 어려운 사람들은, 어제 꺼 활동지 1번 보시고, 5번 영작 나와서 해보시면 됩니다."
나는 칠판을 대충 지워 공간을 조금 내고, (5)라고 썼다.
5) [The 비교급...the 비교급] 문장을 하나 영작해봅시다!
"샘 이거 하면 개인점수 줘요?"
아까 영작을 하고 들어간 민근이다.
"아니, 개인점수는 하루에 한번이야. 대신 마X쭈 하나 더 줄게."
"오예."
민근이와 다른 남자아이가 나와서 문장을 썼다. 아이들은 거의 비전보드를 하는 것은 포기했다. 괜찮다. 남은 시간을 알차게 쓸 수 있다.
"자 민근이 꺼 부터 볼까. The more you eat, the more you are fat이라고 썼네요. 아까 주어 바꿔서 그런가? 잘했어요. 애들아 뜻은 알죠? 더 비교급, 더 비교급. 앞에 비교급할수록~ 뒤에 비교급해진다. 그런데 이번엔 민근이가 감점될 게 있네요. 뒤에 more는 이 경우엔 the fatter가 됩니다. fat이 앞으로 나왔으니까 뒤에선 빠지구요. The more you eat, the fatter you are...근데, 샘이 보기엔 뒤에 are 보다는 get 정도가 좋겠어."
나는 설명을 마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몇점으로 내면 될까 이건?"
"5점?"
"그쯤이겠지? 4점은 적고, 5점정도 될 것 같아 그럼 fatter만 감점하면 되겠지? 뒤에 are 써도 감점은 애매해요. 자. 5점 만점에 4점."
"아 아깝다."
민근이가 너스레를 떤다. 이번엔 정훈이 것을 고쳐줄 차례다.
"자 정훈이는 The harder you study, the more you get a good grade 썼네. 오 잘하는데? 그런데, 역시 앞에는 잘 썼어요. 근데 정훈이도 뒤에 the more는 틀렸어. the better로 바꾸고...이 경우엔 grade도 가져가. The harder you study, the better grade you get. 이러면 되겠죠? can을 뒤에 넣어도 되겠다. 이건 몇점?"
"6점요."
"그래. 6점이고, 2점은 감점해야겠다. 애들아 어렵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야 당연히 모르지. 우리 문법수업 하나도 안했어. 이거 못하는 게 당연해. 수업 할거야. 걱정마."
나는 책을 정리하며 말했다. 종치기 1분 전이다.
"그런데 애들아, 샘 말을 꼭 들어줘요. 우리가 영어교육을 할 때 잘못된 건 다 알잖아. 독해만 겁나 시키지. 그런데 샘 수업의 목표는 여러분들이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은 쓸 수 있게 하고 싶어. 그리고 영작을 하다보면 점점 문법도 이해가 잘 될거야. 오늘 수업 잘 참여해줘서 고맙고 내일 영상도 꼭 보고 오고, 아직 초반이라 문법 수업 못하고 있는데, 문법 부교재 아마 다음다음주 월요일부터 할 거 같다. 나 문법 설명 잘 하니까 걱정말고, 오늘 고생했어요."
수업이 끝났다. 바구니가 어김없이 무겁다. 그러나, 어제와는 100% 다르게 속이 후련하고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