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교사, 성장하는 수업

활동지 구성에 재미가 붙었다.

by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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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레슨플랜은 이제 없어도 될 것 같은데, 괜찮아요?"

"네 애들이 제법 쓰는 것 같아요~."

"수행평가가 들어가니까 아무래도."

"네 애들이 요즘은 슬슬 앞에 나와서 쓰는 게 늘었어요."

"넵 캔디 부족하면 말씀 주세요."


1단원 수업을 마치고 레슨플랜을 그만 만들었다. 본문 수업을 한바퀴 돌렸으니 재원샘이나 승희샘도 충분히 수업 운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고, 만들면서 보니 본문수업을 이제 활동지 정도만 변경되는 것이라 반복적이라고 느꼈다.


본문 수업을 마친 뒤에는 단원 문법 수업과 부교재 문법교재의 1단원, 문장의 5형식에 대한 수업을 일반 강의식 수업으로 진행했다. 아이들이 허리를 돌리지 않고 볼 수 있어 편안해했고, 나는 오랜만에 목청껏 수업을 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그러나 문법수업의 고민이 발생했는데, 영작발표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문법수업을 하면서 바로 영작을 시키면 아이들의 문법이해를 체크할 수 있고 그에 대한 피드백과 재수업이 가능한데 내가 사전에 그런 고민 없이 전년도의 문법 부교재를 그대로 택한 터였다. 내가 고른 문법교재가 아니니, 편집이 내가 바라는 수업의 형태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얼렁뚱땅 문법수업에 대한 활동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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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래도 번거롭다. 아이들이 직관적으로 동사와 다른 문장성분의 상호작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틀을 만드는 것 하나를 만드는데 손이 너무 간다. '이것쯤은 애들이 노트에 그리면서 해도 될텐데' 하는 고민이 들기도 하고, 거꾸로 '이렇게 틀을 짠다고 한들 애들이 이해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이 때쯤 해서, 업무량이 다시 폭증하고 있었다. 부서 업무와 일일 수업참여점수 정리, 단어수행평가 출제, 에세이평가 출제 등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문법 활동지를 0에서부터 다 만들어야 하다니. 한번 만들어두면 편하겠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 해가 다 가도록 문법 활동지의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문법 활동지를 만들기 위해서 나에게 너무 큰 부담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수업 재구성 2년차에 들어 문법 부교재를 바꾸었고, 내가 원하는대로 풍성한 영작활동이 가능한 교재 덕분에 훨씬 만족스러운 수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첫해의 문법 수업은 반쪽짜리로 끝나고 말았고, 수업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문법 수업이 강의식으로 이루어지니 그 여파가 거꾸로수업으로 진행되는 본문수업 차시에도 미쳤다. 아이들의 수업 참여도가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첫해의 시행착오였다.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고민이 쌓이는 만큼 경험도 쌓였다. 문법 수업을 마친 뒤에 본문 2단원 수업의 활동지에선 훨씬 풍성한 아이디어를 활동지에 담아낼 수 있었다. 2단원 지문은 청소년이 주인공인 단편소설이었는데, 이야기 형식의 지문이기 때문에 다양한 영작 및 독해 활동이 가능했다. 첫번째 활동지를 만들고 나서, 신바람을 내며 나머지 활동지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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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보충수업을 하면서 영어원서 읽기 등을 여러번 해왔기 때문에 독해 기법을 다양하게 아이들에게 소개하는 활동지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규 수업에서 독해기업을 활용하기에 적합한 지문을 만나, 아이들에게서 참여를 이끌어내며 수업을 진행할 생각을 하니 활동지에 들어갈 질문들이 술술 나왔다.


1) 주인공에 대한 사실 4가지와 거짓말 1가지를 적어봅시다.

2) with my shirt off가 무슨 뜻일까?

3) this way가 의미하는 바를 찾아봅시다.

4) 체격을 키우기 위해 주인공이 한 노력을 모두 써 봅시다.


1번과 4번 질문은 객관식으로 중간고사에 연계출제할 수 있다. 독해 지문을 이해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활동인데 아이들의 참여도 실제로 잘 이루어졌다. 2번과 3번은 서술형 평가로 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활동지에서 직접 출제 연계가 될 수 있다는 합의가 아이들과 이루어짐으로써 차츰 수업 재구성에 확신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대로 아이들이 잠들지 않는 수업이 이루어지면서, 수업 내용에 아이들의 참여가 증진되고, 수업 내용이 평가와 바로 연계되는 구조인 것이다.


영어교사들의 고민 중 하나는, 강의식 수업을 할 때 눈에 빤히 보이는 글의 핵심내용을 전달할지 말지의 딜레마다. 핵심내용을 말하는 게 딜레마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까 싶겠지만 아이들은 "중요해"라는 말을 "출제할 거야"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아무리 중요한 부분이라도 그것을 전달할 때 조심하게 되고, 여러 학급을 들어갈 때 정확히 같은 말 같은 톤으로 하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내신이 입시에 반영되고 상대평가가 적용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그러나 활동지를 만들면서는 그런 고민이 싹 사라졌다. 활동지에 이런 문제들이 들어가 아이들과 수업을 하게 되니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핵심내용으로 받아들이고 학급간 편차 없이 핵심내용에 대한 지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영작활동을 통해 서술형 평가에 대한 합의를 아이들과 나눈 경험과도 같았다.


1) 글에서 느껴지는 주인공의 감정을 영어로 표현해봅시다.

2) 이 내용에 제목을 한번 지어줘볼까요?

3) 이 글의 뒤에 이어질 내용을 상상하여 이어 써 봅시다.

4) 위 글의 내용을 우리말 문장으로 요약해봅시다.

5) 요약한 문장을 영어로 바꾸어봅시다.


두번째 활동지는 창의적인 영역으로 구성했다. 글의 제목 짓기, 뒤에 이어질 내용 상상해보기, 요약하기 등이다. 역시 모두 객관식으로 애용되는 출제유형이다. 강의식 수업 때는 미리 메모를 해뒀다가 한 단원에 한두번 정도 아이들에게 지도를 하는 사항들이다. 그러나 이 역시 교육과정 상 수업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찍어주기의 개념에 가깝다. 아이들이 스스로 지식을 적용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번째 활동지에서 아이들은 아무도 나와서 2~5번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짧은 글을 읽고 제목을 붙이는 활동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시험에는 내고 있다. 말도 안되는 평가방식이다.


두번째 활동지에서 내가 아이들과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애들아, 시험 나오니까 잘 들어. 선생님들이 너희를 가장 골탕먹이기 쉬운 문제가 뭔줄 아니?"

"?"

"요약하기, 제목 고르기, 주제 고르기야. 왜 그런지 모르지?"

"몰라요."

"자 보자...오늘 활동지 보면, 주인공 Dave가 옷을 껴입고, Sarah가 몸이 좋아졌다며 칭찬하는 내용이 나오지? 그 뒤에 어떤 내용이 나오니?"

"옷을 계속 껴입어요."

"자 그럼! 이 글의 제목은?"

"..."

"이거 봐. 모르지? 제가 아무 제목이나 하나 만들어서 써 볼게요. <Bigger and bigger with more shirts> 대충 이렇게 써볼까. 어때? 제목으로 어울리나?"

"네."

"그럼 다른 제목도 되겠군...<Getting bigger by wearing many shirts> 이것도 괜찮다. 내용이랑 잘 어울리지?"

"네에."

"학원에서 이거 한페이지에서 제목으로만 한 스무가지를 써준다고 치자고. 근데 선생님들이 조금만 머릴 쓰면, 그것도 피해갈 수 있어. 제목을 꽈버리면 되니까. 볼래?"


나는 이번엔 칠판에 <Clothes for cheating> 이라고 썼다. 어휘 수준을 조금만 높여도 훨씬 어려운 출제가 가능하고 학원 강사들의 예측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에 교사가 학원 강사보다 유리한 몇 안되는 유형이 요약하기와 제목 고르기, 주제 고르기다. 이것을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설명하면서 직접 예를 보여주면서도, 이것이 단지 출제에 대한 찍기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실제 영작을 시키기 위한 준비단계라는 점이 새로웠다. 제목에 이어 요약하기도 시범을 보였다. 먼저 우리말로 쓴 뒤에 영어로 바꾸어줬다. 그러나 여전히 두번째 활동지에서 아이들의 참여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고작 3주 정도 수업을 했다. 아이들의 자발성, 영작 능력이 길러지지 않았는데 제목이나 요약 뒤 영작처럼 창의적인 영어능력을 발휘하긴 어려웠다. 다만 이 과정은, 잘못된 출제관행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면서 아이들과 대화를 해나간다는 점에서 수업의 원칙을 바로잡는 경험을 내게 제공했다. 수업 없는 평가, 평가 없는 수업이 아니라 "수업과 함께하는 평가"를 실천해나가는 새로운 체험이었다.


활동지 4번은 아예 하나의 활동만을 채워넣었다. 단편소설을 읽고 그 뒤에 있을 일을 상상해서 써보는 것이다. 수업에선 먼저 우리말로만 이어질 내용을 모두 쓰라고 했다. 물론 우리말을 채우지 않으면 수행평가는 감점이다. 5분 가량 시간을 주고, 교실을 순회하며 학력이 낮은 아이들에게도 쓸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재미있는 글을 쓰는 아이들을 체크했다.


시계를 보니 수업 시간이 충분히 남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혹시 나와서 써볼 사람?"

"..."

"그래 없을 줄 알았다. 우리말은 다 썼죠? 우리말 써도 점수 줍니다."

"샘 진짜요? 영어 아니잖아요."

"수업 참여점수잖아요. 그리고 본문 내용을 알아야 우리말로 뒷 내용도 쓰지. 공부 한 거 맞습니다. 아무나 나와서 쓰세요."


두명이 나와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씨가 너무 작았다. 시간이 아까워서 내가 활동지를 받아, 한줄 씩 큼지막하게 쓰고 줄마다 공간을 남겨두었다.


"샘이 쓰긴 했는데 나왔으니까 점수는 줄게요. 들어가. 고맙다. 자 얘들아. 지금 준호랑 미현이가 쓴 거 있죠? 여기 한줄씩만 쓰면 수행평가 점수 주겠습니다."

"이거 한줄만요?"

"응 사탕도 준다."


다른 아이가 쓴 문장을 단 한 문장씩만 영작하면 되니 참여율이 제법 늘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감을 못잡는 문장들은 미리 단어를 제시해주어 쓸 수 있도록 했다. 물론 한바닥을 다 쓰던 한문장만 쓰던 수행평가 점수는 모두 같았다. 교실마다 아이들의 소설 이어쓰기 아이디어가 재미있었다. 여자주인공이 외계인이었다는 아이디어도 나왔고, 동성애자라는 아이디어, 삼각관계라는 아이디어가 가장 흔하게 나오곤 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난 아이들에게는 전체 분량을 영작토록 칠판에 자리를 잡아주었고, 아이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을 땐 우리말로 작성한 내용을 칠판에 쓴 뒤 한줄씩만 써보도록 했다. 문법이나 독해가 아니라, 순수한 쓰기 활동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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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원 활동지를 만들고 수업을 하면서 얻은 수확이 많았다. 아이들의 참여가 부족한 학급에서의 대처방안을 익히면서 학습자의 자발성을 위해 수업조직화를 해볼 수 있었고, 아이들이 거꾸로수업에 적응하면서 수업 활동이 무엇이든, 언제든 시험 및 수행평가에 적용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3월 한달의 짧은 시간에 교육과정, 수업, 평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재조직한다는 경험은, 분명 수업재구성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도 전면적인.


이때쯤 되어 수업재구성으로 아이들이 얻는 것보다 내가 얻는 것이 크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10년 가까이 교사생활을 하면서 수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해오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강의식 수업, 수월한 문법지식 전수, 쩌렁쩌렁한 목소리만 자랑스러워하면서 몇년이나 보내왔단 말일까. 아이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수업이었고, 수업을 성장시키기 위한 연구였고, 교사인 나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한달이었다. 그 한달 사이에도 매일같이 업무의 폭풍이 몰아쳤지만 수업에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보답이었다.


그러던 중에도,


"샘 근데 이건 시험에 안나오잖아요."

"맞아 이걸 설마 내시겠어?"


당연히, 나오는 질문. 맞는 말이다. 아이들이 100% 착안해서 쓴, 그래서 학급별로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밖에 없는, 단편소설 이어쓰기가 시험에 나올 순 없다.


"응~ 다음주에 글쓰기 대회있고 중간고사 다담주에 에세이 수행이야~."

"꺄아아아아아! 진짜 싫어."


나는 답했다. 내 수업의 모든 영어지식을, 한 톨도 남김없이 평가에 써먹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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