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배운 거."

모든 수업내용이 평가의 대상이라면, 왜 글쓰기 주제를 사전에 공지하겠어?

by 공존

https://brunch.co.kr/magazine/nozamclass

(8개월만에 이어지는 에피소드라서 부득이하게 매거진을 참고하시라고 링크합니다.)

22.jpg

"자- 시험문제는 그럼 일단 그렇게 하시구요."

"네네."


중간고사를 위해 오랜만에 셋이 모였다. 나는 당연히 재원샘이나 승희샘에게 첫 시험부터 업무를 떠넘길 순 없으니, 출제 영역을 나눈 뒤에는 편집은 내가 하기로 했다. 그리고 영어 글쓰기 대회와 단어 수행평가, 그리고 에세이 수행평가까지 계획을 미리 미리 세워두기로 했다.


"경시대회 주제는 당일 공지하고- 애들한테 일정은 미리 말해주셨죠?"

"네 말해줬습니다."

"네네 그럼 시험지 인쇄 맡길게요."


재원샘의 공손한 목소리. 한달여를 함께 수업을 하며 일주일에 두어번 대화를 나누니 서로 많이 익숙해졌다. 특히 수업 영상을 찍도록 시킨 미안한 마음과 함께 신로도 쌓였다. 반면에 승희샘은 우리 셋 중 유일하게 담임으로서 슬슬 3월말이 되며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아이들과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글쓰기 대회는 먼저 각자 읽어보고 잘 쓴거 한 열개씩 모아봐요."

"알겠습니다아-."


각자 담당하는 학급에 맞추어 안내문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물을 한잔 마시고, 테이프를 챙겨들고 교실마다 돌며 안내문을 붙였다.

33.jpg

"쌤!!! 대회 뭐 나와요?"

"왜 물어봐 여기 붙여놨잖아."

"아니이 진-짜 지금까지 수업 한 거 다나와요?"


다음날, 수업에 들어가니 칠판에 몇명이 모여서 안내문 앞에 서 있다가 날 보자마자 소리친다.


"아니라고 여기 써 있잖아. 수업 때 했던 글쓰기 중 하나."

"뭐나와요? 안알려주세요?"

"어. 활동지 복습하세요. 그 중에 나옵니다."

"와...대박."

"수업하자."


교내상은 중요하다. 학생들의 생기부의 핵심스펙 중 하나이니 당연하다. 그래서 공정하게 치르기 위해 사전에 과제를 안내하고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영어 글쓰기라는 활동이 문제다. 어쩌면, 영어교사의 딜레마라고 해야 할까? 사전에 주제를 안내하면 당연히 아이들은 미리 작성을 해서 암기를 해온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늘 따라다닌다. 이걸 글쓰기라고 봐야 하나?


그러나 나 그리고 다른 두 선생님은 거꾸로수업으로 매일 같이 활동지를 쓰도록 시키고, 영작에 대한 첨삭을 수업 시간 내에 하면서 그런 관행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꽤 많은 글쓰기 활동을 수업에서 했고, 고등학교 1학년 수준에 적합한 60단어 이상의 분량을 뽑아낼 수 있는 과제들도 있었다. 그러면, 그것 중에 아무거나 골라서 조금 손을 봐서 대회를 치러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당일 주제 부여"라는 시도를 하기로 했고, 그것이 진짜 아이들의 순수한 영어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확신을 아이들에게도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학습지 Ch1 writing 1001.jpg

내가 준비한 시험지는 이것이었다. 학생들의 미래 비전을 다루는 1단원 본문 뒤에 있던 글쓰기 활동을 조금 손 본 것이었다. 일반적으론 "본문"만 진도를 나가는 고등학교 영어 수업에서는 버려지는 페이지였다. 그러나 매 수업 시간마다 활동지를 뽑아내기 위에 눈에 불을 켜고 수업거리를 찾던 나는 지난해까진 거들떠 보지도 않던 글쓰기 활동에도 눈독을 들였다. 수업중엔 다섯개만 쓰도록 했고, 그중에 세개씩 나와서 써보도록 했었다.


I want to meet the members of Avengers

I want to visit Paris before I am 30.


사실 이런 수준의 문장으로도 얼마든지 분량을 채울 수 있는 무척이나 간단한 글쓰기 활동이라 시험에 출제하거나 수행평가로 진행하긴 어려운 단원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학생들의 창의성과 자기 미래에 대한 꿈을 그려보도록 하는 활동이라면, 제법 괜찮은 대회 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 말고도 2단원에서 활동지에 넣었던 이야기 이어쓰기 활동과, 자기의 단점 개선하기 활동도 유력한 주자였지만, 아이들의 예측을 피해가고 싶었던 나의 꼬인 성격도 한몫하긴 하지만.


"자 준비됐냐?"


드디어 4월 1일이 밝았다. 우리 세명이 모두 하루에 전체 학급 수업이 있는 날을 고른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만우절. 작년까지의 글쓰기 대회와는 한결 다른 풍경이 교실에 펼쳐져 있었다. 작은 종이 쪽지에 빼곡하게 원고를 준비해서 외우고 있는 아이는 한명도 없었다. 분분이 책상 위에 활동지가 조금씩, 그리고 교과서가 펼쳐져 있곤 했다.


"와아아 선생님 대박."


나는 시험지를 나눠주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 조용하고. 거기 맨 윗줄에 보이죠? 10개 항목이 다 다른 카테고리여야 한다. 알아서들 쓰세요."

"샘 I want to는 빼요?"

"어 써있잖아."

"그럼 무조건 그거 빼고는 카운트되는 거죠?"

"뭐 내용이랑 상관 있으면 되겠죠?"

"네-."


덩치 큰 남자아이가 감탄을 내뱉었고, 다른 여자아이는 조곤조곤 질문을 하더니 이내 안경을 고쳐쓰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교실을 휘휘 돌아다니며 아이들이 자기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을 구경했다. 글을 길게 쓰는 쉬운 방법에 대해서도 미리 여러번 말을 한 적이 있다. 시간 표현, 장소표현, 병렬만 써도 4단어는 껌이지.


"걷는다."

"네-."


첫 학급의 대회를 마무리하고 이어서 다음 학급에 들어갔다. 생각보다는 많은 아이들이 참여해주고 있었고, 그러나 곳곳에서 여전히 기본적인 문장구조조차 완성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한달 동안이나 수업 때 영작을 첨삭해줬는데 짚이지 않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수업 설계의 고민은 언제 끝날까. 그러나 착착 문장을 완성하는 아이들에게서는 반대로 용기를 얻는다. 그런 아이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재미있기도 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수업. 그것이 영어 능력을 길러줄 수 잇는 수업을 해나가고 있다는 기쁨이 스며드는, 그리고 수업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더 좋은 시간이다.


"샘 결과 언제 나와요?"

"어- 빨리 해야지."


늘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던 아이가 손을 들고 물어본다. 그러나 그 말은 지켜지기 어려웠다. 바로 2주 뒤에 단어수행평가가 있어서 바쁜 와중에 그것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여하지 않아도 불이익이 없는 교내대회와는 다르게 수행평가는 또 다른 고민이다. 그게 끝나면 바로 출제도 마감해야 한다.


3월에 마음껏 뿌린 씨앗들을 차곡차곡 수확해나가야 하는 4월과 5월이 이제 막 열린 날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성장하는 교사, 성장하는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