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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r 17. 2021

이걸 먹인다고? 미쳤냐?

유통기한은 지났지만 아무 문제 없지 않을까 싶었던

"야 이걸 먹인다고? 미쳤냐? 유통기한 지났잖아."

"아니 이게 유통기한이라는 게 지났을 수 있는 물건이...보자..."

"내놔봐."


 대학동기이자 직장동료인, 그러면서 저 베지마이트를 내게 안긴 장본인이었던 T는 내 손에서 베지마이트를 빼앗더니 유리병 아래를 보고 외쳤다.


"봐 야 유통기한 한참 지났네. 그리고 애초에..."

"아니 야 몇번 열지도 않았어."

"이 시국에 교실에서 이걸 먹인다고?"

"아니 야 내가 비닐장갑도 챙겨오고 애들 먹겠다는 애들은 거리두기해서 다...계획을 세워놨다니까..."

 

 나는 T가 주는 베지마이트를 다시 받아, 뚜껑을 열어 그 냄새와 함께 한번 더 확인을 하고는, 뚜껑을 닫고, 20분 전에 학교 앞 마트에서 사 온 식빵과 집에서 챙겨온 빵칼과 버터를 차례로 쓸어보았다. 이런 역시 안되는 건가. 나름 여러가지 대비를 하고 준비했는데 수업 한시간 정도 남은 시점에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2학년 선택과목으로 "영어권 문화"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1단원이 푸드트럭과 다른 특색있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베지마이트가 어김없이 소개되었고, 나는, 나보다 앞서 2년 전에 같은 수업을 지도하며 베지마이트 체험을 지도한 T에게 받아서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그 녀석을, 이번에 챙겨오기로 했었다. 그런데 유통기한이라는 변수가 터질 것이란, 생각을 못한 나. 아니 근데 애초에 이게 지금 변질을 생각할 수 있는 연한이나 상태는 전혀 아닌데.


 2년 전에 T는 베지마이트를 교육예산으로 한박스 사, 아이들에게 빵과 함께 먹어보도록 했다. 나도 아이들에게 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버터와 접시까지 챙겨서, 코로나 상황이므로 원하는 아이들만 따로 앞쪽으로 불러서 천천히 먹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지. 유통기한의 경우에는 베지마이트라는, 영국에서 호주로 건너와 국민조미료처럼 쓰이는 녀석의 신선도는 그리 문제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진 않았다. 애초에 2년 전에 받아서 몇번 열어본 적도 없었다. 버터와 함께 한번쯤 먹고, 베지마이트 냄새에 질색을 하는 아내를 보고 웃으며 냉장고 한켠에 고이 두었다가 최근에 라구를 끓일 때 조금 써먹었다. 이번에 열어보았을 때 그 끈저억 끈저억한 상태는 그대로.


 베지마이트에 대해 조금 첨언을 하자면 마마이트라는 영국의 조미료가 호주로 건너가 재탄생한 음식이다. 맥주를 만들 때 발생한 이스트 술찌개미를 소금과 함께 발효시켜서 마마이트로 만들다가, 거기에 올리브유와 각종 채소의 추출물을 추가해서 베지마이트로 변신시켰다. 엄청 짠 천연 농축 MSG인데 빵에 적당량을 버터와 바르면 풍미가 제법 있어서 내 취향엔 나쁘지 않다. 방송에도 종종 소개되고, 심지어 호주사람 휴 잭맨이 토크쇼에서 베지마이트 먹는 방법도 소개한 적이 있다. 토스트 한조각에 베지마이트는 반 티스푼 정도가 맥시멈이다. 그것도 솔직히 좀 많이 짜다.


 나는 풀이 죽어 혼자서 거푸 베지마이트를 빵에 발라먹었다. 버터를 잘라. 같이 올렸는데 이왕이면 좋은 무염버터를 사올 걸 그랬다. 베지마이트도 짠데 코스트코 가염버터도 짜다. 집에서 파스타를 만들 때 주로 쓰는 버터라서 빵에 발라먹을 걸 생각하지 않았다가 그냥 별 생각 없이 챙겨왔다. 100% 우유로 만든 서울우유 버터라면 훨씬 맛있을 텐데.


 그럼에도 나는 결국 이 베지마이트를 아이들에게 맛보여주지 못했다. 미리 사둘걸. 빵도 어차피 내 돈으로 사온 건데. 수업에 들어가서는 베지마이트 통만 신나게 흔들어대며 유튜버들이 베지마이트를 숟가락으로 떠먹고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영상만 보여주었다. 아니 아니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니깐.


"어어 T샘 지금 밥 먹으러 내려갔어요."

"아항. 잘됐네요. 감사합니다."


 수업을 끝내고 나오니 점심시간인데, 마침 T는 먼저 급식실로 내려갔다. 나는 교무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잘됐다. 혼자 자리에서 빵이나 먹어야겠다. 나는 다시 혼자서 덩그러니 교무실에 앉은 채로 허겁지겁, 그러나 빵에 버터와 베지마이트를 바를 땐 나름 신중하고 천천히, 염분을 조절해가며 서너 조각을 거푸 먹었다. 아침에 먹은 잡채가(설날 때 엄마에게 받아와 남은 것) 양이 좀 적었다. 배도 고팠는데 차라리 잘되었지.


 냄새만 맡아도 아내는 잔뜩 얼굴을 찡그리니 집에서도 베지마이트 토스트는 혼밥이겠다. 그래도 잘 됐지 뭐야. 사실 홍차도 영어권문화 교과서에 같이 소개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맛을 보여주고는 싶은데 종이컵만 쉰개가 필요한 일이고 빵을 먹는 것보다도 꼴이 우스우니. 패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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