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친사람
1. 미친사람
영화는 아서 플렉이 갖고 있는 정신질환과 그로 인한 고통을 압도적인 비주얼로 어필하며 시작한다.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억지 웃음을 지어보이는데, 그 장면 이후로는 단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장면의 감정선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다음 장면과 이어지지도 않는다. 방금 전까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던 그는 활짝 웃으며 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다. 예고편에서도 보여준 소년들과의 추격씬과 폭행. 그리고 그는 공공치료소에서 정신상담을 받으며 고통스럽게 웃는다. 그가 얼마나 비참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 때의 웃음은 다음장면에서 또 한번 반복되는데,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앞에 앉아있는 어린아이와 놀아주다가 아이엄마의 제지를 받고, 이내 아서의 그 통제되지 않는 웃음질환이 또 터져나온 것이다.
아서는 웃음질환이 병이라는 것을 알리는 카드를 보여주지만, 나는 영화를 보며 여기에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웃음의 원인이 아이엄마의 적대적인 행동임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정말 병인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서는 억지로 웃음을 짓기 위해 슬픈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서는 활짝 웃고 있다. 아서는 통제하지 못하는 웃음질환을 갖고 있다. 아서의 웃음질환을 촉발하는 무언가가 있다. 네 장면에 일관성이 부족할 뿐더러, 개연성을 희생해가며 첫 장면의 눈물을 묘사한 것도 의문스럽다.
무엇이 답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의 초반에 이미 이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들에 대한 강한 의심을 품게 되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머레이쇼의 망상 장면도 쉽게 예측하고, 영화를 이해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 나는 아마도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이 영화를 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몰입해서 보기에 조커의 정신상태는 너무 불안정하다. 거짓말인 거 다 미리 알려줄테니 두걸음 떨어져서 영화를 보라는 메세지를 초반부의 연출을 통해 보여준달까.
2.미친 세상
그런 아서에게 세상은 고통이다. 낡은 버스도, 높은 계단도, 공공치료소의 허술한 상담도, 독립하지 못한 채 같이 살아야 하는 어머니의 존재도 모두 그를 옥죄고 있다. 고담의 거부 토마스 웨인에게 매번 편지를 보내는 어머니는 자신이 내려가볼 생각은 없는지 매일같이 아서에게 우편함을 확인하라 하고, 독립하지 못해 눌러앉았다가 이제는 어렵게 돈을 벌어 어머니를 부양하는 처지인 아서는 그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아서는 코메디를 사랑하고 코메디언의 꿈을 꾸고 있지만, 어릴 때 겪은 심각한 아동폭행으로 사이코패스 성향을 갖게 된 그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광대엔터테이너 중개업체의 동료들과도 정상적인 대화를 하지 못하고 억지 웃음을 보인다거나, 정성들여 스탠드업 코메디를 연구하지만 그 곳에서도 다른 사람의 웃음에 맞장구치는 것일 뿐, 자신이 즐거워 웃는 것은 아니다. 돌아오지 않는 짝사랑이 고통인 것처럼, 세상에 다가서고 싶지만 소외되고 있는 아서에게 세상은 여전히 폭력적이다. 개별 개체를 모두 포함하지 못하는 체제는 그 자체로 동화assimilation의 억압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3.파국
그가 세상으로 부터 받아온, 아동폭력이라는 억압(이드 차원), 아서 혹은 “해피”라는 억압(자아 차원), 코메디언에 대한 선망(초자아 차원)의 불안정한 동거는 마침내 고담 시가 사회보호 기능을 상실하면서 파국을 맞는다. 영화의 배경이라고 하는 1981년, 미국이 맞이한 대량실업과 도심의 슬럼화 속에서 치안마저 최악으로 치닫고 시민들의 삶은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다. 영화 <식코>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의료비가 없어서 서서히 죽어가는 최저계층의 삶. 아서의 모친은 토마스 웨인에게 자비를 구하고, 거리는 폭력으로 넘치고, 일자리가 없어 소시민들끼리 갈등하는 상황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서에게 차츰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가 된 것이다.
아서의 비극은 100% 사회가 낳은 것이다. 실제 정신질환에 유전형질이 어느정도 기여하는가와는 무관하게, 영화에서는 그거 당한 누적된 폭력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지하철 살인사건은, 그렇게 누적된 억압과 폭력이 마침내 외부로 분출된 사건으로 아서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후의 전개를 예측불가능성으로 몰아넣는다. 살인 이후 불안정한 뜀뛰기와 춤을 통해 아서의 위태함이 더욱 부각되고, 평생 억압받아온 그가 타인을 제압하는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통제하는 경험이 주는 효능감을 관객에게 설득한다.
4.미친사람에게 보이는 것
이제 현실을 통제하는 경험을 가진 그에게 감각과 현실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스토킹 하던 여성을 “갖게” 되는 망상이 현실의 것으로 오인되고, 마침내 스탠드업 코메디에 올라 관객들에게 환영받는 환각을 겪는다. 이 과정의 연출은 다분히 이것이 거짓말임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메타적 연출기법이 아서의 불안정한 정신 속 현실과 감각의 혼란을 관객에게 잘 전이하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탁월성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아서의 망상이 깨어지는 계기가 또 다른 광기와의 교차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아서가 자신의 망상을 깨닫는 계기가 바로 어머니의 거짓말과 과대망상에 대한 인지이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와 관련 있는 배트맨 코믹스 <킬링 조크>에서도 “두 광인에 대한 조크”가 있는데, 요약하자면 정신병자 혼자서는 자신이 미친 것을 모르고, 다른 사람이 미친 것을 보고서 자신도 미친 것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코믹스 안에선 배트맨과 조커의 상호보완적 광기를 묘사한 조크지만,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의 광기를 알게 되고 자신의 광기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구태여 어머니의 젊은 시절 정신상담 받는 공간에 현재 시점의 아서가 분노하며 지켜보는 과정을 집어넣은 것은 이런 의도로 추측된다.
5.조커
결국 이 사건으로 아서는 고통 뿐인 현실을 버리고 감각의 세계로 완전히 돌아선다. 조커의 탄생이다. 현실의 금계를 과감히 버리고 자신의 감각이 명하는대로 움직이는 “자유인”의 탄생이다. 마침 이때 조커를 찾아온 전 직장동료들. 총을 아서에게 건냈던 랜들을 살해하는 것도, 목격자인 개리를 보내주는 것도 모두 현실의 논리와는 충돌한다. 그에게는 감각이 모든 것이다.
유명한 계단 장면이 나오고, 경찰과의 추격전과 지하철에서 광대들과의 마주침. 그리고 방송국에서의 살인사건으로 조커의 남은 조각이 맞추어진다. 영화를 오독한 일부는 혁명가를 운운하는데 잘못된 해석이다. 조커는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을 이해는 하지만 공감할 능력은 결여된 정신질환자이고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지하철 장면과 후반부 구출 장면은 감각에 함몰된 조커의 삶의 방식이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려있음을 보여주고, 그로써 그가 틈난 나면 사회로 뛰쳐나오게 되는 욕구에 합리성을 부여할 뿐이다. 조커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춤을 추던 그 쾌감을 잊지 못해 또 다시 고담 속으로 숨어들 것이고, 그조차 망상이라 한들 망상의 공간과 감각은 조커를 목마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 생중계로 살인극이 펼쳐진 점은 영화 초반부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전체와 개인의 대비를 극명히 보이며 이를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 미디어는 현대사회의 대중을 형성하는 요체다. 아서가 살던, 전체의 세계. 개체를 소외시키는 세계. 아서는 미디어를 통해 대중과 교감하고 선망하고(중반부 스탠드업쇼가 TV모니터를 통해 나오는 점도 이를 잘 보여준다) 그 미디어 대중 세계는 결정적으로 소외된 그를 전체 앞에 세워놓고 조리돌림하기 위해 방송에 출연시킨다. 이제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인물은 아서가 아니라 조커이기 때문에 전체와 개별주체의 갈등이 카타르시스를 해소하는 승리가 아닌 아이러니 가득한 참극으로 끝났지만, 이 지점에서 조커는 사회비판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6.<조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력은 말할 필요도 없고,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려 작품 내내 몰입도를 유지하는 각본과 연출력도 놀랍다. 아서가 조커로 변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사회와 개인의 문제을 엮어 밀도있게 이끌어간다. 배경을 1981년으로 맞추어 찰리채플린을 인용한 고전코미디를 배경텍스트로 배치하고 그에 맞추어 고전 브라스밴드 음악, “비극인 줄 알았는데 희극”이라는 주제까지 깔끔하게 통합시켜낸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했다는 것은 이런 영화를 말하는 것일 터다.
게다가 아서와 조커의 망상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이 교환되는 점도 재미있다. 극단적으로는 에필로그의 상담 장면을 기준으로 이전의 대부분이 망상이라는 해석도 있다. 나는 조커의 감각이 발현된 원인을 중심으로 영화를 보아, 대체적으로 실제 발생한 일이며, 단지 아서의 착란으로 현실인식에 차이가 생겼다고 보는 편이다. 이를 테면 토마스 웨인이나 알프레드의 고압적 태도는 이전 영화나 코믹스와의 차이가 생기는데, 그 역시 아서가 압박감에 적대적으로 상대방의 행동을 인식하고, 피해망상에 빠진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아서의 웃음질환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적어도 시작은 통제할 수 있다. 멈추긴 어렵더라도. 초 중반에 네번 그 통제할 수 없는 웃음이 터지는데, 각각 그 웃음의 계기가 명확하다. 그리고 동일한 수준의 스트레스나 정신적 충격에도 아서의 웃음이 터지는 것은 이후에 딱히 묘사되지 않는다. 이것을 아서가 억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동폭력으로 뇌손상도 거론된 바 있지만, 다른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웃음이 안터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상당히 의심된다. 이런 것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하는 요소.
장르영화의 클래식으로 남을 걸작인데 거침없이 거북한 영화라서 영화를 보고 나서 첫 감상은 "이런 영화가 굳이 존재할 필요가 있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