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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y 17. 2021

선배님 저 결혼하려고요

후배이고 제자인 한 청년의 성장 관람기

"선배림 잘 지내시나요."

"하이하이 넌 어떠니"

"쿨하시네여"

"ㅋㅋㅋㅋ"

"간만에 제 소식 전하려 연락드림다"

"고랭고랭"

"저 결혼하려그요ㅋㅋㅋㅋㅋ 시간되면 다녀가세여.."


 케로로양을 만난 것은 2007년의 여름이었다. 막 군대를 제대한 나는 고등학교 독서토론 동아리에 오랜만에 나가보았고, 새까만 1학년 아이들이 쭐래쭐래 모여서는 선배들의 조력도 받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사회를 맡아 그날의 토론을 돌봐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간사가 되어 재학생 후배들을 돌봐주는 우리 동아리의 전통은 늘 위태위태해, 가끔 들러 밥이나 사줄 연차의 대선배인 나라도 그렇게 나서야 했다. 케로로양은 그때 동아리의 기장이었는데 수다스럽고 잘 나서는 것에 비하여 독서에의 열의는 다소 부족했다. 나는 그래서 케로로양을 즐겨 골려주었다. 


 그해부터 3년 가까이 동아리에 꽤 관심을 주었다. 2009년엔 모교로 교생을 가는 행운을 누렸다. 내가 1학년때부터 키워놓은 아이들이 고3이 되어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들이 제법 늘어있었다. 고3인 케로로와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열심히 입시를 준비했고, 나는 교생이 끝난 뒤에 주말에 영어 수능 지문을 봐주거나, 자기소개서를 봐주었다. 그럴 때마다 매번 간식이 뒤따랐다. 빠듯한 용돈에 후배들에겐 뭐라도 퍼주곤 했으니 나중에 한번은 그 기수의 다른 후배인 원숭이양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쓴 돈이 중고차 한대 값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노력에도 무색하게 기장이었고 부장이었던 케로로양은 졸업 후 동아리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밉상맞은 일이지만 그럴법도 하지. 이따금 소식이나 들으며, 다른 후배들과 동아리를 조금 더 돌봐주었다. 그나마 다른 후배들이 열심히 해서 동아리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고, 그 아래 기수들이 활발한 아이들이라 날로 동아리는 좋아졌다. 퇴근길에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친구와 길을 걷고 있는 케로로양과 마주치고 인사를 하고 휙 지나간 일이 있었는데, 이제 어른이 되어 꾸미고 다니는 모습이 그간 동아리에 나오지 않아 생겨난 거리감과 섞여 낯설 지경이었다. 


"선배님 잘 지내시나여! 저 메가박스에서 일하는데 영화보러 오세요!"


 시간이 지나 내가 동아리를 돌볼 여력이 조금 부족해진 2011년, 케로로양에게 연락이 왔다. 동네 메가박스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며 티켓에 팝콘도 공짜로 준다던. 마다할 이유가 없어서 독서토론 동아리도 같이 했던 친구와 혹성탈출을 보러 갔다. 한산한 영화관에,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친구가 내리자마자 후다닥 뛰어나와서 인사를 하고 케로로양은 팝콘을 건냈다. 경영부진을 겪고 있던 극장이라 썰렁했다.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고 우리는 상영관에 들어갔고, 영화가 끝나고 대강 인사를 하고 슁 내려왔다. 그렇게 케로로양과의 짧은 재회는 끝났는데, 또 그로부터 몇개월 뒤


"선배님"

"도움을 요청드립니다..."

"응? 뭐여"

"이번에 CGV 고졸채용이 떠서 원서를 넣으려고 하는데...자기소개서 좀 첨삭을..."

"헐...대박"


 그때가 되어서 저간의 자세한 사정을 들으니, 원래 케로로양은 극장산업 분야에 관심이 있었고 대학 학과는 진로와는 관련이 없어서 한학기만에 중퇴를 하고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극장 아르바이트만 2년을 꽉 채워, CGV 고졸채용에 넣을만한 경쟁력이 생긴 상태라고. 당연히 대학을 중퇴했으니 동아리에 나오기는 어려운 입장이었을 게고, 그러다보니 그 수다스럽고 활기차던 모습도 볼 수 없게 되었던 것. 나는 이따금 원숭이양 등에게 드러내었던 원망하는 마음에 대한 새삼 미안한 마음과 후회를 느끼고 반성을 했다. 그리고 충분히 시간을 내어 열심히 자기소개서를 고쳐주었다. 결과는, 뭐 내가 자기소개서를 첨삭한 것이 기여를 했을리는 없고 케로로양이 그간 해 온 노력의 덕분으로 성공. 고졸 알바생, CGV 정사원이 되는 위업 달성!


 이어서 나에게도 케로로양이 베푼 호의가 돌아왔다. 3년차쯤 되더니, 직원복지로 매월 10편 가량 티켓팅을 좌석등급에 상관없이 IMAX든 4D든 할 수 있다며 나에게도 앞으로 영화 보실 일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후배의 그러한 관용을 마음껏 누렸다. 당시가 어벤져스 시리즈가 한창 진행중이어서 티켓팅이 좀 모자랄 것 같은 때는 피하고, 한적할 때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바깥양반과 둘이서 표를 받거나 혼자서 예매표를 받거나 해서 공짜로 영화를 마음껏 봤다. 덕분에 연 10번 이상 극장을 찾아서 VIP였던 내 CGV 계정은 이력이 뚝 끊겨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말이지. 게다가 케로로양의 경우엔, 내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예매 일정을 옮기거나 해서 취소 재예매를 요청해도 군소리 없이 해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는 것을 몹시나 싫어하는 나라는 인간에게 그것은 기묘한 경험이기도 했다. 꽤나 큰 혜택을 후배에게 꾸준히 5년 넘게 받아왔으니. 


 다만, 그렇게 후배의 성장을 바라보는 10년의 과정이 그렇게 한가롭진 않았다. 극장 편성담당이 되고부터는 케로오양의 고민이 많아지면서 어떤 영화는 왜 이해할 수 없이 흥행을 하고 어떤 영화는 이렇게 좋은데 부진한가 등으로 편성 담당의 실적이 걸린 문제들이나, CGV가 다른 멀티플렉스와 경쟁하며 출혈경쟁을 하는 것을 보면서 하급 직원으로서 느끼는 갑갑함 같이, 한 청년이 자립을 해서 직장에서 겪는 고난은 밖에서 보기에 여러모로 애석한 일었다. 넷플릭스가 국내에 런칭되고 극장산업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부터는 케로로양은 회사에서 신사업 기획서을 요구받아 몇날 밤을 세우거나, 때론 주당 60시간 가량의 근무시간에 시달리다가 코로나 시국이 되자 순환휴직을 한다거나 일을 겪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자기 진로를 개척한 훌륭한 사례이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현실의 고난은 작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몇줄 글로 쓰는 것보다도 훨씬 크겠지만.


 그러니, 케로로와 다른 후배들에게 결혼이 다들 먼 일이기도 했다. 그 기수의 후배들이랑 나는 두루 친했는데 일찍 결혼을 한 원숭이양 말고는 모두 비혼을 염두하고 연애를 이어가거나, 결혼 생각이 있더라도 현재의 애인과는 결심이 안되는 등의 현 세대의 삶의 고민이 다들 만만하지 않았다. 집이나 직장이나, 연애 하나조차. 3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향하고 있던 꼰대인 나는 그네들의 그런 고민에 대해서 무슨 의미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요리나 가사노동을 자랑할 일은 더욱 아니요, 그저 이따금 덕담을 해주는 정도였는데. 그렇게 휘청휘청, 대기업의 하급노동자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던 청년이 결혼을 한다니 그간의 성장을 바라봐온 입장에선 참 대단하고 알찬 친구다.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결혼이 무슨 인륜지대사라거나 인간이 되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거나 그딴 생각이 아니라 그저, 이 힘든 세상에 살아서 버티고 버텨 무언가 한가지 또 자기의 선택을 하고 그 길을 닦아나간다는 일이.


 임신한 집에선 남의 경조사에 함부로 가는 일이 아닌데 케로로양의 결혼식은 꼭 가겠다고 약속부터 했다. 그리고 내 가족 외의 남의 일에 대해선 글로 쓰지 않는 오랜 관습을 깨고 완전한 타인, 다만 후배이자 제자에 대한 글을 썼다. 케로로양의 성장을 지켜본 일은 나에게도 그만큼 의미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만큼 꼰대적 사고방식을 덜 껴입을 수 있었다. 영화티켓보다는 그쪽이 케로로양과 원숭이양 등, 그 세대의 아가씨들이 내게 준 선물이다. 내일 청첩장을 받으러 가서 밥을 먹기로 했는데 메뉴를 뭘로 할까 고민을 한다. 내가 피자를 골라 친절하게 링크를 보내줬더니 치즈가 땡겼다고 잘 고르셨단다. 에라이 녀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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