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학회 토론 발제문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6100300045
정치적 논의와 학술적 논의가 혼재된 이 글에서 이범 씨는 능력주의를 웅호하며 다음의 세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능력주의는 엽관제(비경쟁:추천제)를 특징으로 하는 신분주의를 타파하는 효과적인 무기다. 둘째, 시장경쟁 환경에서 능력주의가 교육, 취업, 국가 간의 경쟁까지 여러 차원에서 강제되어 불가피하다. 셋째, 능력주의는 현실 정치세력들에 대한 절망으로 인하여 형성된 것이지, 시험 중독이나 지배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 세가지 주장 모두 현실을 잘못 인식하고 있거나, 정치 전망과 학술적 논의를 구분하고 있지 못해 발생하는 왜곡에 기인하고 있다.
첫째, 한국사회는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구체제가 전복되고 신분제가 타파된 사회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근현대사를 다룬 <대한민국은 왜>에서 이를 "단군 이래 가장 평등한 시기"로 평가한다. 그러한 계층공백을 메우고 사회질서의 주류 담론이 된 것이 바로 능력주의였다. 많은 역사가들은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벌인 배경에는 한국전쟁 이후 고속승진한 다른 장성들에 비하여 그 세대의 장성들이 진급이 정체된 것을 지적한다. "선배들은 모두 자리를 차지했는데 왜 나는 출세를 못하는가."라는 능력주의에 기반한 분노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이후 경제가 성장하고 국가주류 세력이 성장하는데에는 역시 학력경쟁을 통한 능력주의가 크게 작용한다. 구시대의 신분 및 계층질서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상류층이 갖춘 교양과 지식을 보유한 고급인력의 생산이 끊긴 상태였고,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일제에 협력한 군인, 공직자, 전문가들의 힘을 빌려 국가를 운영했다면 박정희 정권 이후에는 대학 학력과 경쟁시험을 통하여 인재를 선발했다. 그러한 양상이 반세기 이상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우리가 현재 느끼는 불평등과 불공정의 문제는 다름 아닌 학력 엘리트를 중심으로 한 능력주의 카르텔의 헤게모니에서 발생한다.
둘째, 시장 환경으로 인하여 능력주의가 발생하니 구조적 경쟁을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인과관계를 오인한 순환논법에 가깝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음의 세가지 개혁법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보수적 정치세력과 치열하게 다투어야 했다. 1.미국 연방예금보호공사를 설립해 은행에 안전하게 돈을 맡길 수 있게 한다. 2. 글래스스티글법을 제정해 일반적인 은행 예금 및 적금 업무와 월가 투기를 분리한다. 3.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를 설립해 월가를 감시, 규제한다. 이 세가지 법안은 대공황을 극복하고 전후 미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당연히 경제권력과 결탁한 정치세력은 이 세 법안을 무력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1971년, 미 상공회의소가 채용한 루이스 F. 파월 주니어 변호사가 "규제로부터의 탈출, 자유주의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33페이지의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를 다수의 대기업이 받아 읽게 된다. 보고서 속에서 파월은 자본주의 자체가 공격받고 있다고 주장했고, 미국의 사법, 정치, 정부의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을 개조하고, 보수 싱크탱크에 투자하며, 기업은 대학과 젊은이에게 영향력을 미치도록 하며, 결정적으로, 미국의 자본주의가 다시 규제 없는 친기업적 환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달 뒤 닉슨은 파월 주니어를 연방 대법관에 지명하고, 레이건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미국은 완전한 신자유주의 체제에 돌입한다. 경쟁을 완화하고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것도, 경쟁을 강화하고 불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것도 정치 및 경제와 길항하는 국민다수의 의식과 그로부터 형성되는 담론이다. 이범 씨의 주장대로라면 능력주의에 지배된 시장경쟁 구조에서 당연히 대중의 능력주의는 강화되고, 강화된 능력주의 상황에서 시장의 능력주의 지배를 깨트려야 한다는 것인데, 능력주의를 웅호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시장의 능력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마이클 센델의 "대입 추첨제 도입"을 황당한 주장이라고 비꼬는 그는 불과 1년 전 "소득별 대입 쿼터제"라는 더더욱 황당한 아이디어를 발제한 바 있다.(https://m.hani.co.kr/arti/society/schooling/951141.html)
셋째. 능력주의가 정치세력의 무능의 결과라고 하며 이범 씨는 이준석과 노동조합, 민주당과 정의당을 하나로 연결하여 마구잡이로 논의를 전개하는데 대개는 포퓰리즘적 선동에 가깝다. 한국사회의 어느 정당도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대통령은 5년 단임제에 국회의원들은 투표의 비례성과 등가성이 현저히 부족한 소선거구에 묶인 87년체제에 한국정치가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진보적 대통령이 취임하면 사회주류집단은 총력저항을 하며 조기레임덕을 이끌어왔고, 표의 등가성을 강화하기 위한 지난 2020년의 총선에서 보수당은 "위성정당"이라는 파행적 행태로 정치퇴행을 이끌었다. 이범 씨의 주장대로 능력주의가 시장경쟁의 불공정하지는 않은 강한 경쟁압력 탓이라면, 한국의 정치세력의 무능도 정치제도의 불공정하지는 않지만 강한 경쟁탓인 게 아닌가. 개선하려는 시도조차 무력화한 것이 바로 이준석이 몸담은 보수정당이고, 불법성을 용인한 사법카르텔이고 말이다.
이런 여건에서 공정이 시대정신으로 등극했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기란 더욱 어렵다. 공정한 경쟁을 촉구하는 능력주의가 대중의 절망에서 발현한 시대정신이라면, 어째서 조국 가족을 둘러싼 혐의에는 분노한 명문대생들은 나경원 자녀나 장제원 자녀의 문제에는 분노하지 않는가? 지난해 감사를 통해 드러난, 자신들이 재학하는 대학의 각종 입시비리에는 눈을 감는가? 공정한 경쟁을 주장하는 집단이 스스로 가장 불공정한 행태를 보이면서 공정경쟁을 주장하는 것은, 그 안에 숨겨진 의도가 있음을 드러낸다. 문재인 정권 출범 후 갑자기 언론을 뒤덮은 수능 대 학종의 공정성 담론 역시 마찬가지다. 수능이 학종보다 공정하다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대학 내부에선 "수시충", 혹은 "지균충"이라며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경쟁을 완화하는 조치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을 비난하는 풍조가 있다고 하니, 수능을 지지하는 공정경쟁론자들의 주장은 그 배경이나 의도를 신뢰하기 몹시 어렵다. 스스로에겐 관대하고, 자신들이 혐오하는 특정 집단에게는 유독 가혹한 이들이 부르짓는 공정과 경쟁은 무엇인가?
또한 이범 씨가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 “징벌적 손해배상금제가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피해액수의 3배가 한도이고, 실제 판결에서는 1.5배 정도가 선고된다." 하청업체가 원청업체로부터 갑질을 당하는 것을 모를 리 없는 판사들이 무의미한 판결을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의 문제를 바꿀, 개선할 의지가 없는 법관들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누구도 그 공정함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과거의 사법고시. 어째서 공정경쟁으로 선발된 법관들은 이 불공정을 시정할 권한이 있음에도 행사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징벌적 손해배상금제를 입법한 입법부나 그와 협력하여 시행세칙을 마련한 행정부가 사법부의 권력을 침해하라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대기업 노조가 임금 극대화 전략을 편 것이 어째서 비난받아야 하고 비노조 노동자들의 피해를 촉발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범 씨가 주장하는 공정한 시장 상황에서는 노동자와 사측 역시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경쟁하는 관계다. 노동자는 자신들의 임금을 상승할 것을 당연히 요구할 수 있고, 사측은 경영상황을 고려하여 그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오히려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비노조 노동자들과 계약직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업의 구시대적 관행이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구조조정이 일반화된 현재의 기업문화에서 각종 기업들은 얼마나 많은 사내보유금을 적립하고 있는가? IT 대기업의 대명사인 카카오의 주당 노동시간이 얼마인지 이범 씨는 알고 있을까? 과연 IT 기업 노동자들의 문제는 노동회의소로 해결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한 점은 이처럼 이범 씨가 시장경제의 구조로 인하여 능력주의가 배태된다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능력주의를 배양하는 사회구조-문화적 사회적 자본에 대해서는 논의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메세지와 담론의 과잉 속에서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지 않고 드러내려 하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또한 정치적 주장과 학술적 논의를 버무려, 인간성을 보존해야 할 교육의 영역과 무한 경쟁이 발생하는 정치 및 시장경제 영역을 뒤섞어 능력주의를 강조하니 더욱 안타깝다. 한국에서 보이듯 학력엘리트가 계층을 형성하든, 영국에서처럼 상류층이 학력엘리트를 만들어내든 능력주의 환경에서는 학력과 능력이 곧바로 계층으로 전이된다. 타인과 경쟁해 보다 높은 성과를 달성할 개개인의 역량은 개인의 노력이 아닌, 그가 겪어온 총체적인 경험의 결과다. 공정한 경쟁, 능력주의 환경에서 어떤 계층이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될까? 어쩌면, 그 해답은 아버지의 친구인 유승민 의원실에서 인턴으로 정치에 입문하고, 유승민 의원의 추천으로 대통령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수억원에 달하는 학비를 지원받은 바로 그 이준석에게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