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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l 18. 2021

이대남에 대하여#2

20대 남성을 관통하는 세가지 테제 (2) 무능

폭발한 성대결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폭발적으로 확산된 여성주의 각성의 에너지는 이내 사회 곳곳에 번지며 다양한 다이나믹을 만들어냈다. 한국의 여성주의 조직이나 이론은 이미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의 분노는 효과적으로 조직화된 실천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봇물처럼 터져나온 현상이었기 때문에 분노라는 감정만큼 뜨거운 갈등과 또 다른 여러 사건을 만들어낸다. 


 그 중심에 2016년 후반기의 "넥슨 게임 여성 성우 교체사건"이 있었다. 3N이라고 불리는 대형 게임제작사에서 한 여성캐릭터의 성우가 교체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 그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던 수백명이 개입하며, 언론의 공정하지 못했던 조명을 받아 게임사 앞에서 대규모의 여성들의 항의시위로까지 번진 대 사건이었다. 


 강남역 사건으로 인하여 형성된 대중의 분노와 에너지가 그대로 하나의 이슈를 만나 폭발한 중요한 사건임에도 게임이라는 하위문화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이라거나 늘 그렇듯 피해자로서 여성의 서사를 다룬 뒤에는 더 깊이있는 진단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로 인하여, 이 사건의 여파는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기성세대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의 각성을 이끌었듯, 넥슨 게임 여성 성우 교체사건 역시 남성, 특히 20대 남성이 여성주의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는지를 형성한 중요한 사건으로, 그에 못지 않은 심도있는 진단이 필요하다. 2016년 이래로 여성과 남성의 인식차이는 젊은층 사이에서 극복이 어려운 수준으로 벌어졌고, 나는 그 원인이 바로 이러한, 사안에 대한 완전히 극단적인 이해를 각자가 그리고 기성세대들이 완전히 방치해온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자체가 20대 남성이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무능의 상징인지 모르겠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한 성우가 프리랜서 계약으로 여성 게임 캐릭터의 목소리를 녹음했다. 그 얼마 뒤에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내용을 개인의 SNS에 올렸고, 개인의 사회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우려하는 게임 주 소비자층인 젊은 남성들의 문제제기가 성우 개인과 게임개발사인 넥슨에 전해진다. 그리고 넥슨은 성우를 교체하여 재녹음한다. 프리랜서 계약이고 인건비 지급은 이미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문제될 것이 없는 영업적인 판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여성계에서 다시 문제제기를 하며 집단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여성계 측에선 성우가 페미니즘 지지로 인하여 "퇴출"되었다고 주장하며, 부정된 여성주의를 복권하기 위하여 넥슨 규탄 집회를 시작했다.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간단한 한 문단의 요약만으로도 다양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당시에도 그랬다. 성우 당사자와 넥슨이 합의에 의하여 성우 교체를 진행하였고, 성우 본인도 그를 공개적으로 밝혔음에도 공중파 방송을 포함한 공론장에서 수백명, 온라인에서 수천수만명이 날선 논쟁을 벌이는 대사건으로 확산되었다. 쟁점은 "여성주의를 지지함으로써 발생한 한 노동자의 존재 부정"과, "자신들이 즐기는 컨텐츠가 정치성향을 띄지 않길 바라는 소비자의 권리"로 모아졌다. 성평등주의와 소비자권리라는, 서로 완전히 다른 층위의 입장이 충돌한 것이었기 때문에 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양자는 끝없이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발산했다.


 그러나 성우 교체 사건에 드리운 어둠에 "여성주의 부정"이 있었다면, 반대로 남성 게이머들의 입장에서는 "게임 선호 부정"이 있었다는 것을 마땅히 이해해야 한다. 유명한 MBC 뉴스의 PC방 셧다운 사건처럼 21세기인 오늘까지 남성의 주류 미디어인 게임매체는 기성세대로부터 "규제"의 대상이며 그 자체로 사회문제처럼 인식되어오고 있다. 여성집단이 피해의식을 공유하듯, 남성집단도 피해의식을 공유한다. 게임을 즐긴다고 무시를 당하고 억압을 받는 것은, 수천억원의 개발비가 투자된 게임이 전세계에서 1억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오늘날의 20대 남성들에게 지극한 무지로 받아들여진다. 

MBC 뉴스 갈무리

 즉, 성우 교체 사건으로 인하여 남성들의 게임에 대한 피해정서 역시 자극되었다. 남성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취미생활이 불필요한 논쟁과 사회적 편견의 희생양이 되는 것에 극도로 저항감을 보인다. 남성들의 입장에서 그래서 이 사건은 분노를 불렀다. 지금까지 꿋꿋하게 시간과 금액을 투자하며 길러온 게임컨텐츠가 자신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정치사상에 윤색되길 바라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의식의 발로다. 단지 남성집단의 이기심, 여성주의 부정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층위에서 20대 남성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던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논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2016년에 형성된 강남역 살인사건-넥슨 성우 교체 두 사건은 이후 20~30대 여성과 남성의 사회인식, 서로에 대한 이해를 프레이밍하여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사건은 벌어졌다.


태초에 곤장이 있었다

MBC 방송 갈무리

 태초에 곤장이 있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2년 전인 2014년, <홍철아 장가가자>라는 특집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그에 대한 사과를 단행한 것이다. 이 사건은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한데 최고의 공중파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무한도전이 프로그램 편성의 자율권이나 버라이어티의 본령인 재미 추구보다는 정치적인 올바름, 그중에서도 여성주의에 대한 지지를 공개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본래 무한도전은 하위계층 남성의 "루저 정서"를 대변하며 시작된 프로그램이었다. "못난 여섯남자"들이 자기들끼리 외모를 조롱하고 노총각 신세를 놀려대며 비주류들의 공감대를 얻어냈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인기를 점차 인기를 얻자 예전에는 자유롭게 이루어지던 농담거리가 봉쇄되어갔다. 예전엔 멤버들의 연애사를 빨간 하이힐 운운하며 놀려대던 프로가 나중에는 멤버들의 연애사가 복잡해지면서 언급을 자제하게 되더니 제작진이 공식편성하여 제작된 회차에서조차 여성을 대상화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그 회차를 불명예로 취급한 것이다. 


 프로그램의 주 소비자였던 20대 남성은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각 멤버들이 "길거리 출신"이나 "그냥 형돈이"라는 비주류에서 각자 최고의 예능인으로 발돋움하여 주류가 되는 성공신화를 일구었고 그를 통하여 비주류 남성의 욕구를 해소해준 측면이 있지만, 자유롭게 편성 제작되던 프로그램을 통하여 발산되는 감정이 완전이 억압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프로그램을 꾸준히 시청하며 지지해준 그들을 배반하고 말이다. 


 이 사건이 2014년에 발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기 훨씬 전에 여성들의 조직된 실천행위로 방송편성이 뒤집힌 일이기 때문이다.(거듭 강조하지만 대부분 여성들인 작가들과 함께 계획된 특집이었기 때문에 홍철아 장가가자 회차가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고 제작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심지어 메르스 갤러리나 메갈리아가 생기기 1년 전의 사건으로, 무한도전의 MBC게시판을 통하여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의견제시나 참여가 성차별 의제를 만나선 집단적인 문제제기로 확산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년 뒤 2015년엔 또 문제가 발생했다. 멤버들의 공백이 발생하여 무한도전에서 정식으로 식스맨 특집을 편성, 여러 후보들을 검증했는데 그중 장동민씨가 옹달샘 멤버들과 함께 제작한 팟캐스트에서 극단적인 폭력 및 약자 혐오발언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식스맨 특집에서 전격하차한 일이다. 이 역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무한도전 프로그램의 시청자 참여가 효과를 발휘한 케이스다. 장동민씨의 발언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것이었던만큼 하차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오히려 위기에 놓인 무한도전의 멤버가 되어 나중에 더 큰 논란이 되는 것을 막아냈다. 홍철아 장가가자 특집과 비교한다면 장동민 씨의 시청자 참여를 통한 검증은 상당히 효과적인 실천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강남역 살인사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성들의 조직된 실천행위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물론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대하여 남성집단이 수긍을 하거나, 반발을 하는 일도 있었다. 꼭 성대결 양상만을 보아야 할까? 남성과 여성이 힘을 합쳐 사회참여를 한 사례가 곧 이어진다. 2017년 박근혜 탄핵시위다.


20대와 단결된 실천, 그리고 효능감

시사IN

 만일 현재 시중에 흐르는 담론처럼 20대 남성이 다른 집단과 현격한 사회인식의 격차를 가지고 있다면, 전국민이 합세한 박근혜 탄핵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20대는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박근혜 탄핵과 새누리당 규탄의 목소리에 함께 했다. 그 뒤의 지방선거와 총선에서도 20대는 성차 없이 단결했다. 그리고 그 참여행위들은 성과를 거두었다. 사상 최초로 민주시민혁명이 완수되어 박근혜는 탄핵되었고, 민주당과 정부는 역사상 가장 큰 민주적 권력을 손에 얻었다. 


 현재 "이대남" 담론의 심각한 문제점은 "20대 개새끼론"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20대가 보여온 정치참여의 성과를 너무 쉽게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대의 광범위한 참여가 없었더라면 정부여당이 지금과 같은 큰 권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투표율이 높을 수 없는 보궐선거에서 일시적으로 나온 선거결과에 잠깐 놀라는듯하더니 20대 남성들을 비난하는 풍조가 횡행한다. "20대는 진보적이며 민주당을 지지하는 경향성이 강하다."라는 기존의 인식이 이번 보궐선거를 통하여 반박되었고, 그에 따라 진행된 각종 연구에서 20대 남성에 현저한 인식의 편향이 발생하고 있다면, 먼저 20대의 진보성이나 민주당 지지에 대한 소명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왜 20대는 진보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을까? 왜 20대는 민주당을 지지하게 되었던 걸까? 단지 박근혜 정부의 실정과 무능 때문에? 그렇다면 이명박 정권은 어째서 탄핵되지 않았을까? 어째서 이명박 정권은 박근혜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나는 그 해답이 지금까지 다루어온 일련의 20대의 실천과 참여, 조직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2014년, 어쩌면 그 이전부터 20대는 사회참여의 효능감을 직접적으로 맛봐왔다. 최고 인기프로그램의 방송회차를 문제제기하여 그 사과를 받았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집단적인 문제제기를 하여 어마어마한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냈다. 자신들의 주 컨텐츠와 미디어에 특정 정치성향이 반영되는 것을 막아냈다. <82년생 김지영>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페이커는 역사상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되었다. 참여와 실천, 그리고 효능감.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청년기를 보낸 30대와 40대 초반의 집단은 이러한 정치적 효능감을 맛보지 못했다. 도리어 노무현 시기 형성된 인터넷 담론장의 풍성함이 이명박의 심리전단 활동으로 인해 속속 무너지고 개인 미디어로 도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패배와 또 패배, 정치적 자괴감을 맛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헬조선" 담론은 당대의 2030세대가 느낀 무력감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반면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로 청년기를 보낸 2030세대의 경우 훨씬 큰 실천의지와 조직화된 운동의 경험, 성취감과 효능감을 두루 맛본 세대다. 개인의 취향의 영역에서 정치적 선호의 영역까지,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부 임기라는 한국 정치사의 절정기를 함께 보낸 세대는 그만큼 민주적 실천과 참여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2030세대의 높아진 눈높이에 비하여 실제 의회 정치나 정부 정책이 지나치게 느리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180석이라는 거대 권력을 손에 쥔 민주당이 이해하기 어려운 굼띤 움직임으로 조국 일가의 망가진 삶을 복구하는 일도, 언론개혁과 검찰개혁, 공수처 출범이라는 시급한 과제를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었다. 그러더니 부동산 정책은 완전히 실패하고, 보궐선거를 한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LH의 대규모 내부정보 투기 비리가 발생했다. 


 사상 최고의 정치의식 수준을 가진, 그러나 패배의 경험을 가지진 않았던 20대 청년들의 눈에 과연 이는 어떻게 비쳤는가?


무능

 두말 할 것 없는 무능이다.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는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정책은 실패하고 관료를 통제하는 것은 포기한 무능한 집단이라는 것이 20대, 특히 남성들의 견해다. 


 20대는 지난 2016년(혹은 2014년) 이래로 직접적인 사회참여를 끊임없이 주동해온 세대다. 그리고 그 효과는 상당히 즉발적으로 나타났다. 성우 교체의 경우는 해당 성우의 페미니즘 관련 SNS 게시 후 성우교체 발표까지 단 하루가 걸렸다. 박근혜 탄핵은 5년짜리 대통령 임기를 1년 가까이 단축했다. 2030세대에게 어떤 법안이 도출되고, 그것이 심사되고 의결되는 지리한 과정이나 중임제 임기 수준의 정권 평가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본인들이 경험한 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신속하게 처리했어야 하는 공수처 설치를 차일피일 미루고, 그 이유가 고작 의회주의 실현이라는 변명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민주당 180석의 의회권력을 부여했다는 성취감은 효능감에 대한 기대를 불렀다. 그러나 그 뒤의 경과는 효능감을 팍팍 쪼그라들게 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박원순 오거돈 두 시장의 불미스러운 사건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서 20대 남성과 여성의 인식차이가 본격적으로 갈리기 시작하는데, 여성의 경우 정부정책을 통하여 지속적인 지지를 받아왔다. 자신들이 택한 정권이,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내고 있는데, 그 정책들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여성 입장에선 사회적 억압을 늘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반면 남성의 입장에선 정부가 특별히 남성을 위해 정책을 내세우진 못하고,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주요 개혁의제라도 빨리 처리를 해줘야 하는데 그를 위해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 와중에 주요 정치인들이 성추문을 일으키니 정치적 효능감은 더욱 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20대 남성의 입장에서는 지지 정당의 성공도 중요하나, 자신들이 스스로 느끼는 갈등을 해소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여기에서 재보궐선거에서의 20대 남성의 야당 지지세와 이준석 씨의 야당 대표 선출에 대한 호응이 나타난다. 무능한 정부여당을 인내하고 기다린다한들, 자신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개혁과제들을 달성할 수 있을까? 그 당시에 이미 공수처장이 조희연 서울교육감을 수사 대상으로 삼는 등 기대를 철저히 배신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LH 비리에 대한 퍼포먼스가 적어도 이명박 수준이라도 되었다면 다를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런 것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축적된 배신감과 갈증은 20대 남성들의 대규모의 정권심판 투표로 이어졌다. 


 반면 30대의 이준석씨가 당대표에 도전하고 선출되는 과정은, 이 정치인에 대한 지지나 야당에 대한 지지와 무관하게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과 성취로 이어졌다. 이준석 씨에게 내실있는 정치비전이나 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금새 식어버릴 거품과 같은 정치반향이었지만, 잠시나마 사회적 현상에 근접한 호응이 있었긴 하다. 정부여당이 이준석에 맞서 박성민 씨를 청와대 보좌관으로 발탁하고, 그에 대한 청년들의 저항을 촉구하는 선동이 있긴 했지만, 박성민 씨나 이준석 씨에 대한 지지와 반대 의사와는 무관하게 젊은 정치인들이 기성세대의 틈바구니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20대들이 비상한 관심을 두는 것은 이처럼 지속적인 정치참여, 사회 변화에 대한 높은 관심, 즉발적인 실천과 빠른 피드백의 요구가 결부되어 있다. 



 

 특히 정부 평가에 있어서 여성정책은 20대 남성들의 인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다. 정부로선 마땅히 성평등 정책을 이행해나가야 하고, 그 정책의 대상이 되는 여성들은 정부의 정책과 정부 지지자의 여론에 동조하는 "결합" 양상을 보이고, 정책에 의해 견제의 대상이 되는 청년층 남성은 자신들이 포기한 권리만큼의 다른 정책성과를 강하게 요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개혁이 지지부진하고 부동산과 같은 주요 정책에 누수가 생기고, 그 와중에도 기재부에게 지속적으로 휘둘리는 모습에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유예한 권리만큼의 보상을 조금도 얻지 못한 결과로 강한 "이탈" 양상을 보인 것이다. 


 20대 남성의 요구는 명백하다. 성평등 정책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평등 정책으로 인하여 손실된 권리와 효능감을 다른 정책을 통하여 보상받고 싶은 것이고, 그런 과정을 밟아나가는 과정에서 경제, 일자리 정책 등 다른 분야에서 정부 지지의 효능감을 얻길 바라는 것이다. 


 재보궐선거를 통하여 그러한 20대 남성들의 의사는 상당히 표출되었다. 그리고 개혁과제가 조금씩 수행되어가며 효능감도 얻어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이대남"이라는 담론도 "능력주의"라는 허구도 사라져가고 있다. 대통령 지지율도 보궐선거 이전수준으로 돌아오며 사상 최고의 임기 후반의 대통령 지지세다. 이런 결과로, 다시 20대 남성 문제는 뒷전으로 놓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잠복될 뿐이고, 20대 남성의 사회인식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문제는 언제든 이어질 수 있다.


- 3편, <공정 혹은 공작>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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