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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Nov 22. 2019

못난사람

그리고 끈기라는 나의 벗

어릴 적 장래희망은 의사였다가, 화가였다가, 만화가였다. 로봇삼국지, 따개비같은 명랑만화부터 아기와나같은 순정만화까지 수 없이 만화책을 모으며, 따라 그리며, 스토리를 꿈꾸곤 했다. 꼬박꼬박 모의고사에서 1등급을 받아오던 고2 겨울방학 때까지도, 만화가라는 직업은 나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욕망이었다.
 
그러나 장래희망으로 삼을만큼 만화에 재능이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중학교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나보다 더 만화를 잘 그리는 아이가 반에 꼭 한두명씩은 있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실력의 격차가 있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매번 매번 겪어야 했다. 나도 그림을 정말 좋아했는데. 정말 많은 그림을 노트에 그렸는데, 왜 그리 아이들과 나는 실력차이가 났던 것일까.
 
내가 그림에 소질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에도 그리고 다른 많은 일에도,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니다. 어릴 땐 늦된 아이였다. 어머니는 내가 말도 늦고 뚱한 아이었다고 말씀하신다. 초등학교 2학년 1학기에 배우는 구구단. 외우는데 무려 2년이 걸렸다. 이것도 그나마 호랑이같은 사촌형님이 붙들고 겨우겨우 5단까지 외우게 한 뒤의 일이었다. 혀는 짧은데다가 말을 더듬는 버릇까지 있었다. 엉뚱한 호기심으로 수업시간을 한참 잡아먹을 때도 많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사는 일이든 이성문제에든, 여러가지 헛발질을 하는 일이 가득하다.
 
구구단을 단 하룻밤만에 외운 영리한 부반장의 옆자리에 앉은, 도대체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는 반장. 그런데 어떻게 만화가를 꿈꾸었고, 공부를 했고, 이런 저런 글을 쓰기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냐하면-
 
그림 그리기와 책읽기를 남들보다 훨씬 일찍부터,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해 왔기 때문이다. 집은 서점이었다. 만화책과 책은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많았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자식을 끔찍히 아끼는 부모님은 가난하고 초라한 삶 속에서도, 책에 대해서는 종류를 불문하고 뭐든지 읽게 해주셨다. 유쾌한 만화책부터 꽉 막힌 고전소설, 천편일률적 무협지까지 나는 잡히는 모든 걸 읽었고, 손 가는대로 그림 그리고 글을 쓰며 자랐다.
 
느리고 둔한 천성은, 대신 끈기와 인내를 주었다. 경쟁자보다 앞서나가도록은 못하지만 꾸준하게 따라붙으며 내 개성대로 세상을 꾸며 나갈 수 있게 했다. 주변사람보다 잘난 점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책이 일러주는 것들을 귀담아 듣고 실천할 수 있었다. 가난한 삶을 돌파하기 위해서 고삼시절에는 누워서는 세시간만을 잠을 자며 공부했고, 군인 시절에는 밤을 새며 수십권의 책을 읽어 독서노트를 만들었다.
 
뛰어난 지능을 갖춘 사람들이 4,5년 공부할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기 때문에 그들을 어렵사리 따라온 것이랄까. 재능이 없지만 그것을 대신할 읽고 쓰는 습관, 그리고 그 습관이 평생 이어져왔기에 지금 나는 부끄럽지는 않게 제 직업을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많은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읽고, 쓰고, 즐겁게 그리고 배우며 살아갈 것이다.
 
10년을 꾸준히 하면, 20000시간을 투자하면 비로소 자기 분야에서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아직 20000시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읽고쓰는 것은 습관이고 흥미일 뿐, 소명의식을 지니고 해 온 일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나는 앞으로 이름 세글자에 광택을 내기 위하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작 열여덟해를 살아온 아이들이다. 60년, 70년. 살아갈 날이 바닷물처럼 많은 아이들이다. 성적과 외모와 재능. 지금 초라하고 볼품 없을지라도 남은 시간동안 좋은 습관과 바른 인품을 가지고 노력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것이라고, 부끄럽지 않은 직업 또한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처럼 못난 사람도 끝끝내 이루었으니.
 
겨울이 시작된다. 곧 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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