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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y 09. 2018

엄마의 세계

언어로 배운 무게

식사 준비를 도우려 깻잎을 씻다가, 깻잎이 상해서 까맣게 된 것들을 보고 옆에 있던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깻잎은 상하면 삭아버리네.” 예를 들어 상추라면, 상해도 깻잎처럼은 으슬으슬 부스러지지 않는다. 다만 까맣게 말라 오그라든다. 깻잎은 그렇지 않다. 깻잎은 까맣게 마른 장작에서 재가 떨어지듯 제각각 찢어진다. 알싸한 깻잎은 그 향처럼 상하는 모습도 메마른 다혈질이다. 그런데 내 말에 엄마의 대꾸는, “그게 썩는 거지 삭는 거냐.”였다.

나는 깻잎이 썩는 모양새가, 까맣게 변색되어 산산이 부스러지는 것을 보고 삭았다 표현을 했는데 엄마에게 삭았다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을 지칭하는, 그러니까 김치가 익어 갈 때, 그 형태를 온전히 보전하며 발효되는 것을 뜻하는 말인 모양이다. 깻잎을 씻다가 나는, 그렇게 다른 엄마와 나의 언어질서를 생각하며 골똘해 졌다. 이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남색과 곤색(곤색은 일본어의 잔재로, 감색 혹은 검남색이 적절한 표현이다.)을 잘 구분하지 못해 엄마와의 대화에서 종종 혼란을 겪곤 하는데 내가 남색 옷을 찾으면 엄마는 엄마에게 보이는 대로의 곤색 옷을 찾아 내게 주곤 하는 것이다. 바느질을 하다가 엄마는 아예 내가 한심했는지 파랑색과 남색, 그리고 ‘곤색’의 색깔의 위계를 내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알고 보면 ‘삭다’라는 말에는 ‘썩다’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이후에 나는 사전을 보고서야 알았지만 저 색깔의 언어에 이르러선 엄마에게 승복할 수밖에 없다. 학문적인 용어도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두루 쓰이는 말들이지만 엄마는 확연히 나보다 명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엄마는 많이 배운, 소위 말하는 지식인 계층은 아니다. 매일 아침 밥상에서 아빠와 내가 정치 문제로 다툴 때 정치인들 다 똑같다는 말씀을 내세우며 밥이나 먹으라시는. 고등교육은 받지 못하고 딱히 책을 자주 읽는 것도 아닌, 기성세대 서민층의 여성상의 하나를 그대로 표상하고 있는 듯한 그런, 어디에나 있는 아줌마이다. 그런데 남다른 삶의 지혜나 경륜이 아닌 몇 가지 단어만으로 나에게 엄마는 살아온 세월을 단번에 증명해 버린 것이다.

결혼과 출산, 육아와 교육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행로 속에서 여성은 가장 먼저 이름을 잃고, 다음으로는 팔다리의 자유를 잃고, 마지막쯤엔 자신의 소망과 욕망을 자녀에게 위임하고 물러선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자아의 정체성은 차츰 흐릿해지고, 자녀와의 관계를 통해서 확정지어지는 모친으로서의 정체성이 인생의 한 두 고비를 넘겨서야 겨우 빛을 발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중팔구는 인생의 전반이 고단하고 고단한 것이 서민의 어머니. 엄마 역시 오랜 시간을 인내와 희생으로 살아오셨으며.

그런 여성, 엄마라는 이름은 다른 어떤 뛰어난 통찰, 대단한 지식 없이도 우리를 놀라게 한다. 소소한 대화, 짧은 손놀림으로 만들어내는 일상의 감동은 비록 대단한 영광은 아닐지라도 그 자신의 존재 의의를 다른 이에게 입증해 내기에는 차고도 넘친다.

앞으로도 엄마는 아침마다 정치인들은 다 똑같다며 투표 따윈 하지 않을 것이고, 여성의 정체성과 스스로의 인간적 권리에는 크게 무감할 것이지만 그런 것은 정작 당신께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엄마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그 세월 그대로 저마다에 품고 있는 모양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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