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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n 14. 2018

안개 속에는

군인 때 쓴 수필


 고지의 눈은 안개와 함께 온다. 아니 구름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까. 이곳에선 구름과 안개를 구분하는 것이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을, 여름에 알았다. 안개인 줄 알고 아침에 나왔다가 능선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막사를 올려다 보면 영락없는 구름. 그러니까, 영락 없이 그 꼴이다. "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썼네." 그런 관계로, 이곳에서 나에게 있어 눈이란 것은, 하늘 높은 곳에서 솔솔 뿌려주는 것이 아닌, 구름 본인이 엉덩이를 깔고 산 위에 걸터앉는 것에 다름 아니다. 눈이란 것이 이제까지 내가- 대도시에서 보아 오던 것보다 조금 더 무서운 것은 다만 내가 군인이어서가 아니라, 구름인지 안개인지 명확히 하지 못할 것의 그 뻔뻔함 때문인 것이다.


 대단한 것은 없다. 겨울에 눈이 오는 것도, 언젠가는 눈이 녹으리란 것도 당연한 일이고 일어날 일이다. 도시에서 낭만적으로 바라보던 눈을, 단지 내가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냉혹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두고두고 미안한 일 아닌가. 눈을 가지고 사람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어쨌든 사람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첫번째 원칙은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 것이다. 뭐, 누가 강원도에 와서 눈 쓸어달라고, 눈이 시켰나. 국가가 원하는 거지. 원망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 지겹게는 해 보아야 통달하는 법이고, 지겹게 보던 지겹게 쓸던- 눈이라는 녀석이랑 지겹게 놀아보면(사실 두번의 겨울, 쉰번 남짓 내리는 눈이 지겹기는 힘든 일이지만) 어쨌든, 도라는 것이 통하게 마련이겠지. 그렇게 생각도 해볼 일이겠다.


  눈은, 조금 전부터 그쳐 있다. 조심해야 걸어야 한다. 10kg가량의 무전기, 3kg가량의 소총, 그밖의 몇가지의 무게가 어깨 위에 얹혀져 있다. 백 몇십일을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겨울 때는 미끌어지기도 쉽고 다치기도 쉽다. 몸이 얼어붙기 전에 먼저 마음이 얼어붙는 꼴이다. 조심성을 갖추지 못하면, 낙관은 쉬이 오판이 되기 마련. 멀쩡하지 못한 몸으로 눈에 대해 생각을 할 수도, 이런 글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눈꽃이다. 눈과 안개의 합작품이, 철망 구석구석에 알알이 맺혀있다. 깊은 밤 순찰근무를 시작해 만나는 첫 손님. 3m가 조금 안되는 철망이 겨울 날 무거운 안개를 만나면 그 길고 긴 몸에 잔뜩 눈꽃을 달아놓는 것인데, 그 깔끔함이며 입자의 큼직함이 품격을 메기자면 두말할 나위 없이 상등이다. 해가 뜰 무렵 안개도 상큼하게 가시고 나서 철망을 바라볼 때면 또릿한 눈꽃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툭 치면 벚꽃 날리듯 우수수. 흉물스럽기까지 한 철조망이 이때만은 비할 수 없이 아름답다. 밤에, 주황색 전깃불빛을 받아 빛나는 것도 이채롭고.


 눈꽃을 보며 주욱 계단을 내려오면 판판한 평짓 길이 열린다. 고도가 조금 낮춰지면 이내 눈꽃은 생성을 멈춘다. 기후가 가혹한 곳에서만 눈꽃이 피는 것, 자연이 묵묵히 말하고 있다. 이제 담담히 걸어야 할 시간. 한쪽에는 멀리멀리 이북의 땅이 그려져 있다. 한짐을 덜어놓고도 아직 떠오를 생각은 없는지 구름은, 길 사이사이 잔뜩 안개를 뿌려놓았다. 뽀드득 눈이 밟히는 소리가 귀에 크게 걸린다. 새벽 3시. 소리마저 눈 속에 묻히고, 길만이 오롯하다.


 계곡 사이로 펼쳐진 아늑한 길.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눈에 덮여있는 가운데로 안개가 자욱하다. 빛은 그 안에 갇혀있다. 경계등에서 퍼져나간 빛이 안개의 입자 하나하나에 난반사되어 멀리 뻗지 못한다. 멀리 뻗지 못한 빛은 또 눈에 반사되어 땅에 붙는다. 길을 감싼 안개가 그대로 빛의 덩어리가 되어 우릴 맞아들이는 순간. 경계등으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옆사람 얼굴이 또릿하다.


 어쩌면 삶이 이와 같은 것이러니.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길의 모습은 이내 감추어지지만 그 순간 빛은 더욱 밝게 날 감싸안는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지금 내가 살아가는 순간이 더욱 소중하고 값진 것. 그 또한 삶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겠는가.


 자연은, 우리가 부여하는 신뢰만큼만 자신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보여준다. 해발 1100m가 넘는 이곳의 자연은 인간의 대상물이 아닌 하나의 주체이다. 아침저녁 맞이하는 해무리와, 깊은 밤 계곡 사이에 생겨난 빛의 무리는 우리 국토가 허락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의 하나가 아닐런지. 철망을 지킬 군인 외에 사람이라곤 살지 않는다는, 이곳에 말이다.


 어느 만월의 새벽에 나는 잊혀지지 않을 광경을 봤다. 보랏빛으로 빛나는 쾌청한 하늘에 섬섬이 별들이 박혀있고, 오른편 저 멀리 산 위로 해가 붉은 빛을 뿜으며 솟아오른다. 앞에는 하얀 산들이 끝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왼편의 계곡에는 은은한 안개가 달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습. 아주 추운 날이었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고작 100일여. 겨울도 막바지인 이 계절,이 험난한 자연이 있기에 눈꽃도 있고, 안개도 있고, 그 빛도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의 길은 멀고- 그 끝은 안개 속에 감춰져 있지만. 두려울 게 무엇이랴. 길의 끝엔 휴식이 있는데. 그리고, 이 길 속에서 내가 가장 빛나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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