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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n 18. 2018

대학생 때 쓴 수필

 며칠간의 따듯한 봄날씨에 갑자기 퍽이나 추운날씨다 했더니, 예고도 없이 거짓말처럼 눈이 왔다. 학교에 일거리가 남아있어 머물다가 밖에 나갔다 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정말로, 거짓말인줄만 알았는데 여우비같은 눈이, 그러나 예쁘고 소담스런 눈이 차가운 공기와 함께 학교를 덮고 있었다. 조심조심 눈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아쉬웠던 것은 우선 이 눈이 내리는 짧은 순간을 놓치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눈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순간에 지극한 축복이 아니고서야.


 한시간.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짧은 시간은 이제 봄으로 돌아선 계절의 갑작스런 눈처럼, 내게 주어진 하나의 축복이다. 걷는 걸 좋아하는 것이 유별나다는 핀잔에도 귀기울이지 않고 무릎 안 좋아질 거라는 과장 섞인 비아냥도 웃음으로 넘기면서 내가 이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지적활동의 정수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열고 세계와 마주하는 것이다.'(※걷기예찬) 걷는 동안 나는 매 순간 세계와 호흡하고 자연한 나와 마주한다. 고독에 익숙치 못한 이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이 소중한 시간을 어찌 보낼지 몰라 핸드폰을 잡기도 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기도 하지마는. 현대를 사는 우리가 또 언제 이처럼 철저히 고독할 수 있고 철저히 사유할 수 있을까. 길은 내게 허락된 유일한 사색의 공간이며, 생의 현장이다. 시끌시끌한 시장길이 내미는 정취란, 산야의 오솔길이 풍기는 향취에 부끄러움이 없고 쓸쓸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내게 던지는 질문은 천년고성에 쓸쓸히 서있는 고목만큼이나 큰 울림이 되어온다.


 때론 나의 이 "기벽"이, 함께 길을 걷는 동무에겐 미안함이 되기도 한다. 길을 걷는 동안만은 나도 모르게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하는 때가 많아 길동무와 대화하는 것조차 잃어버리는 것이 다반사. 혼자 길을 걸으면서 몸에 익은 버릇임에, 두번다시 홀로 걸을 일이 없을지언정 쉬이 바뀌어질 것같지는 않다.


 이즈음엔 언제나의 귀가길을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가 신호등을 잘못 보고 큰 사고를 당할뻔한 적이 있다. 사색에 골몰해 번사를 잊은 위인이며, 고사는 흔한 일이지만 내게 그것이 생명의 문제와 맞닿아 다가오자 크게 경계하게 되었다. 사색의 시간을 온전히 간직한다는 것이 때로는, 이 도시에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할까. 아니면 도시와 비길 바 없이 넓은 사색의 공간을 이 도시에 맞추어 작게 잡아두어야 할까.


 도시를 걷는다. 하나뿐인 아들자식, 금쪽같은 부모님으로서도- 지치고 피곤해 빨리 집에 가고만 싶은 길동무에게도- 유별한 일일지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걷는다는 것에 이리도 인색해지고, 사색에 이리도 인색해졌을까. 소담히 쌓인 눈이 내일은 축복이 아니라 교통체증의 원인이 되어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할는지. 우리에게 허락된 소중한 시간이 역시, 귀찮고 힘들기만 한 시간이 될는지.


 걷는다는 것은 항상 고독한 것이다. 셋보단 둘이, 둘보단 홀로가 즐거운 것이 걷는다는 일이다. 나의 사색이 무르익을 때까진 오히려, 나의 길동무가 생기지 않는 것이 달가운 일이다. 고독? 예기치못한 눈이 내려주고, 비는 항상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별과 구름과 태양과 달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바람은 삶의 내음을 실어주며, 공기는 계절을 알게 해 주지 않는가. 그러니 조금쯤은 고독에도 넉넉해질 필요가 있다. 길의 가르침은 나 스스로 빚어내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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