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남성을 관통하는 세가지 테제 (3-2) 공정, 경쟁,신자유주의
1. 담론과 Buzz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의 압승 예측을 뒤엎고 당선되었을 때 미국 사회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미국의 독특한 선거제도의 덕을 본 것이긴 하지만, 혐오와 무지로 범벅된 정치캠페인을 벌인 후보가 선거에서 이긴 것이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미 사태가 벌어진 뒤에야 정확하게 인과관계를 따질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분석은 사후약방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데이터를 활용한 소셜미디어 스피어에서의 키워드 별 검색 산출량, 즉 buzz 분석이라는 새로운 통계가 대중에게 처음 소개되었고, 이는 상당히 괜찮은 트럼프 승리의 원인으로 간주되었다. 트럼프는 소셜미디어 속에서 힐러리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이 언급되고,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의 Buzz 우위가 지지자의 뜨거운 열기만을 의미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주류미디어는 클린턴에게 훨씬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트럼프의 적극적이며, 상당히 위트있는 트위터 멘션은 그의 매우 중요한 정치수단이었다. 즉 대중미디어의 대척점에선 소셜미디어, 개인들의 미디어결합체는 트럼프의 정치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키워드는 작용과 반응의 반복을 통하여 점차 확산되며 고유한 정치적 파워를 형성했다. 중립적인 유권자들조차도 실제로 buzz량의 차이를 어느 순간 인지하게 되면, 특정한 의견이 보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석하고 그에 대한 지지의견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미디어 시대. 이제 우리는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을 포함하여 웹 공간에서 오프라인보다 훨씬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빅데이터 정보망에 포획되어 논의의 대상이 된다. 2016년 미국 대선 판세가 뒤집힌 과정과 결과가 Buzz 통계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명이 된 것처럼,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어떤 식으로든 언어를 통하여 표출하며, 캠페인의 경우처럼 때론 적극적으로 자신의 언어 행위를 문제 해결의 도구로 삼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적으로 공통된 관심과 견해를 지닌 온라인 집단, 즉 커뮤니티에 접근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한 개인들의 담론 형성 과정은 대중미디어의 담론형성과 상호작용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는 대중미디어의 압도적인 클린턴 지지가 자신들의 견해를 도리어 정당화하는 언더독 효과를 만들어냈다. 모순 가득한 미국사회에 대한 분노가 정치적 역동을 형성하여, 주류 세력에 저항하는 트럼프의 지지자들로 자신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 시점 이후로는 도리어 주류 미디어의 목소리가 "부당한" 것으로 인식되고, 자신들의 소수자, 피해자적 정체성은 정당한 것이라는 확신을 더욱 강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Buzz가 개인들 사이에 다시 공유되고, 어느새 정치캠페인과 개인의 의식표출은 경계선이 희미해진다.
"이대남 담론"이 처음 튀어나온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결과를 살펴보면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현상들이 여럿 발견된다. 선거 이전엔 20대 남성들의 소외, 불공정, 저항의식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주류미디어가 형성하던 공정의 담론이 사회 전체, 그리고 20대 남성 집단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던 경과는 있었다. 이를 테면 조국 전 장관의 경우 학력엘리트 집단이자 부유층으로서 자녀에게 그러한 사회적 자본을 상속하려던 노력이 공정이라는 시대정신과 모순된 부당한 것이었음을 인식하고 수 차례 거듭 사과했다. 민주당 역시 검찰의 폭압적 수사나 조국 가족의 피해와는 별개로 정권의 핵심 인사가 공정사회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것에 대해서 소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검찰 개혁 담론, 조국 일가의 억울한 상황, 민주당의 개혁 미비 등의 문제로 인하여 정확하게 전달된 것은 아니었지만.
충격적인 민주당의 패배, 오세훈 박형준이라는 비리혐의 가득한 구시대 정치인들이 서울과 부산을 석권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이대남"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미국에서처럼. 그러나 미국 시민들이 모순 가득한 사회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트럼프를 택하고 그를 중심으로 한 담론을 만들어낸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었듯이, 기성세대가 포착하여 채택한 "이대남" 담론은 현재 상황의 원인 혹은 해답은 아니었고 다만 그저 가장 큰 Buzz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카테고리였을뿐이다. 지지부진한 개혁과 부동산 정책 실패라는 무능의 문제, 20대 시기가 갖는 기본적인 강한 역동성과 비판의식, 투표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민주적 의사결정의 효능감 등은, 기성세대에 의해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그저 미국 시민이 샌더스라는 약체와 힐러리라는 강자, 트럼프라는 룰브레이커 사이에서 가장 이상한 답을 찍었듯이, 이대남 담론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Buzz를 만들어내면서, 스스로 정치적 역동을 만들어냈다.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기성세대에 의해 부정당한 20대 남성 집단은 그로 인하여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마치 트럼프의 지지자가 그러했듯 백임=남성이라는 집단 내 강자라는 정체성과 비주류라는 약자적 정체성 속에서 방황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문재인 정부 내내 적대적이었던 언론은 이대남이라는 담론을 통하여 정부 지지층으로부터 20대 남성을 분리하려하였고, 기성세대는 정부 정책의 실패로 인한 보궐선거 패배를 20대 남성 탓으로 돌림으로써 책임에서 벗어났다. 그나마 민주당만이 보궐선거 이후 불공정에 대해 사과한다는, 비록 조국 전 장관을 걸고 넘어가는 형태이긴 했지만 최소한의 반성하는 태도라도 취하기는 했다.
담론으로부터 실존하는 인간을 분리해내는 작업은 그래서 필요하다. 문재인 정권에서 공정 담론은 실제로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사회 각 하위집단과 상호작용하였는가? 이대남 담론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것은 실존하는 20대 남성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였으며, 20대 남성이 생산하는 공정 담론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20대 남성들의 집단적 역동(반복되어 사용되는 개념인 역동은 에너지와 행위를 결합한 개념으로 이해하길 바랍니다.)을, 정치세력이라면 마땅히 그러듯,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는 다른 주체들의 실천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마침내는, 실제 20대 남성 집단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2. 20대의 남성들의 삶과 공정
기존의 이대남 담론과 공정 담론을 비판적으로, 그리고20대 남성의 집단의식 역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맥락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고찰해보도록 하자. 두말할 것 없이 그 저변에 막강한 교육경쟁의 영향력이 차지한다.
한국은 이준석 따위의 허언과 무관하게 해방 이래로 항구적인 능력주의 사회였다. 구시대의 질서 및 기득권이 붕괴된 세계최빈국이 미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인재와 자원배치를 새로 해야 하는 상태.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척결하지 않고 이용한 것은 일제 시기 양성된 학력엘리트집단이 거진 다 친일파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중등교육 이상을 이수한 전문인력들이 있어야 정부가 운용될 터인데 그들의 능력을 취하자니 친일행적이 당연히 걸리고, 취하지 않으려니 국가경영이 어려운 한계가 발생한다. 그나마 태부족한 공직 및 산업노동 일자리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새로 채워지고 나니 1950년대부터 이미 일자리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인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학력경쟁에 몰두한다. 한국의 교육열, 공부지옥은 이러한 역사의 단절로 인하여 발생했다.
학력경쟁은 공정의 신화를 쌓았다. 학력경쟁은 공정하다는 신화, 그리고 공정한 경쟁이 최상의 가치라는 신화. 이러한 인식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자본을 축적한 계층이 학력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것을 손쉽게 은폐했다. 명문대 학생들이 부자집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중학교 입시부터 과외를 해주던 역사는 잊혀지고, 가난한 집 학생들이 밤샘 공부를 해서 상고에 합격해 은행원이 되는 것이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의 전범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었다. 그러한 거짓된 공정의 신화이지만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재생산된 인식인 탓에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계층에 뿌리박혀있다. 20대도 60대도 남성도 여성도 모두 공정의 가치를 존중한다.
그런데 20대 남성의 대응항으로 60대와 여성을 상정하면 20대 남성이 느끼는 불공정의 문제가 강력하게 제기된다. 20대 남성에 비하여 60대 남성들은 얼마나 쉽게 취업을 하고, 자본을 축적하고, 가정을 얻었는가? 또한 남성에 비해 여성들은 얼마나 쉽게 의무와 경쟁은 회피하고, 기득권 남성의 시혜를 누리는가?
물론 이것은 조금도 사실이 아니다. 현재 60대인 1960년대 출생 남성들의 삶은 조금도 편안하고 안락하지 않았다. 학력경쟁은 지금보다 훨씬 격렬했고, 빈곤한 국가사정으로 생애기간 동안 삶의 질은 현재 20대와 비교할 수 없이 나빴다. 60대와 586세대가 산업화로 인해 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훨씬 많이 누린 것은 사실이나, 그런 경제적 황금기는 극히 짧았고 IMF 이후 다시 무한경쟁 속으로 내몰려 축적한 자본을 손실하고 있다. 20대 여성 역시 남성이 지는 육체노동이나 병역의 의무에서 제외된다는 이점이, 기본적인 성폭력에 대한 생애 기간 내내 지속되는 공포나 일상의 불편함, 장기적인 자본 축적의 기회 부족을 벌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사회적으로 논의되는 성별쿼터제 등, 제도적인 여성보호 정책들 중 20대 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이 가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도 20대 남성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 남성에게 60대 남성들의 산업화의 혜택이나 20대 여성의 병역 등 사회적 의무 회피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20대 남성이 특별히 비이성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비합리한 "당면과제"인 탓이다. 20대는 한국사회의 지옥같은 학력경쟁의 화룡점정과도 같은 시기다. 12년의 학력경쟁을 겨우 뚫고 나와서는 스펙경쟁으로 좁은 취업문을 두드려도 두드려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평생을 경쟁 속에서 살아온 이들이 끝내 취업은 되지 못하는, 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과연 그들의 대응항인 기성세대 남성들의 2,30대 시절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취업의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입장에서 1년 6개월의 군복무가 초래하는 스펙 및 학력 단절, 노동착취, 인권침해적 처우 등에 대하여 제대로 된 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합의된 "좋은 일자리"인 공기업 및 공공직에서 그러한 보상책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군 가산점이 여성 측의 문제제기로 인해 철폐되었다는 트라우마가 있는 상황에서, 남성들이 과연 취업 경쟁자들인 20대 여성이 겪는 성차별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특히 20대가 이준석의 능력주의에 새삼스럽게 호응하는 것은 경쟁과 다른 지점을 바라보아야 한다. 기성세대가 더 많은 자본축적의 기회를 얻은 것이 생애 전 과정에서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으로 인해 해소된다면, 60대가 축적한 자본과 사회적 지위라는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현재의 20대는 3,40년이 지난 뒤에 현재의 60대와 같은 수준의 자본을 축적할 수 있을까? 지금 자본과 권력을 축적한 60대 집단은 그만한 "자격"을 지닌 집단인가? 그렇지 않다. 60대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에 대하여 20대의 공감과 이해를 얻고자 하다면, 20대에 대하여 먼저 공감과 이해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20대가 느끼는 모순에 대한 해결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없고, 문제의 해결은 20대에게 전가하고, 그들이 축적한 자본을 나눌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런 조건에서 내던져진 "이대남" 담론은, 실제 20대에게는 온통 허위의 것으로 비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극한 경쟁상황이 만들어낸 결핍과 과잉된 공정에 대한 신화는 거듭, 경쟁은 공정하며, 공정한 경쟁이 최상의 가치라는 강고한 의식을 현재 20대 남성들에게 형성하였다. 그러한 왜곡된 인식은 20대 남성의 대응항인 기성남성 및 20대 여성에 대한 적대감을 형성케 하였고, 기성세대가 20대 남성을 타자화할 때마다, 여성집단이 20대 남성을 타자화할 때마다 자극되고 강화된다. 이것은 20대 남성 집단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모순이 결집된 결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여성주의 집단은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 질서를 흔들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고 있지만, 그러한 시도들의 표적이 "이대남"이 되어선 안된다. 마찬가지로 극한 경쟁 상황의 피해자로서 군문제라는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 그들에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업에서 여성이 겪는 성차별의 문제는 그 전에 경쟁의 조건이 공정해야 성립하는 질문이다. 기성세대는 "라떼는 말이야"하는 관점에서 20대에 접근해선 안된다. 60대의 생애과정에서 20대는 극히 짧은 혼란의 시기였고 자본축적의 기회도 결코 길지 않았지만, 현재의 20대는 60대가 도달한 그 결과에 닿을 길 자체가 부재한 세대다. 20대가 정부에 돌을 던진들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을까?
3. 정글이라는 해방구
인간은 늘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다. 기성세대가, 여성집단이 "이대남"이라는 사회모순의 배출구를 찾아냈듯 20대 남성 역시 자신들에게 적체된 사회모순을 타파할 길을 찾아나갈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사회지형과 역사적 경위로 그들에게 형성된 조건은 다음과 같다. (1)기회에 있어서의 무한경쟁 (2)결과에 있어서의 능력주의 (3)기성세대의 여성집단에 의해 고립되어 느끼는 소외감 (4)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불신감. 특히 문재인과 민주당 정권은 이전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을 스스로 기치로 내걸었고,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20대 남성이 거듭 지지했었기에 실망감과 좌절감은 컸다. 대통령의 임기 5년, 국회의원의 임기 4년은 20대 당사자들에겐 너무나 긴 시간이다. 4,5년간을 취업경쟁에 시달린다고 가정한다면 그 고통이 상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긴 시간 정부여당에 대해 지지해 온 결과는, 20대 남성의 실제의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그래 놓고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의 패배 책임을 자신들에게 지우는 기성세대와 여성집단의 연합이다.
그로 인하여 20대 남성은 자신을 지지해줄 정치세력 자체가 없다는 불신, 그러므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체적 의식, 그렇다면 이왕이면 경쟁이 공정해야 한다는 규범 의식, 누구의 지지와 지원 없이 얻어낸 결과이므로, 그 소득은 다른 누구와 나누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는 권리의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정글이다.
위 그래프는 더도 덜도 없이 무한 경쟁을 허용하는 신자유주의 성원의 정부관이다. 20대 남성이 고소등층과 저소득층을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정확하게 소득에 비례하여 복지 분배에 대한 의식을 보이는 것이 바로 무한경쟁에 의해 형성되는 의식이다. 고소득층은 그 수익이 고스란히 자신의 능력과 가치의 반영임을 인식하고, 분배를 거부한다. 고소등층의 수익을 분배받아야 하는 중위소득층과 저소득층은 그만큼 복지 분배를 요구한다.
우습게도 복지와 분배를 위한 세금은 죄악으로 여기는 미국에서도 기부와 봉사는 아주 일상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자신의 부를 나눌 의사는 기꺼이 있으나, 그것을 정부에 위탁하기는 싫다는 것이 미국 부유층의 기본 의식이다. 자신의 부는 곧 자신의 능력이고, 그 부를 분배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데 왜 정부에 의탁하겠는가? 반대로 빈곤층은 아주 자연스럽게 푸드뱅크에 찾아 기부된 음식 등을 얻어간다. 최근 코로나 상황에서 배우 브래드 피트가 푸드뱅크 봉사를 하는 것이 포착된 바도 있다.
그러니까 20대 남성 집단의 문제는 단순히 지난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을 표로 심판했다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미래 중 절반이 뚝 사회에서 유리되어 신자유주의의 강고한 지지층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성찰해야 한다. 이것이 단숨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단순한 문제도 아니다. 현재 20대들이 결국엔 사회에 진출할 것이고 그들이 미래세대를 위한 경쟁의 룰을 규정할 것이다. 현재의 60대가 "라떼는 말이야."라고 이야기하듯, 20대 남성들이 "라떼는 말이야"라고 미래세대를 향해 이야기할 때, 여성집단이나 미래세대는 신자유주의 담론을 막아낼 대응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20대 남성이 신자유주의에 완전히 포섭되어 있다는 점은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한국 사회의 정치구도에도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20대 남성들은 이준석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지지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를 지탱해줄 정치집단이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민주당이 신자유주의로 아무리 우클릭을 한들 자본권력과 결탁한 신자유주의의 본류는 국민의힘이다. 자녀의 마약 문제가 터지기 전의 홍정욱 수준의 정상적인 정치리더가 나타나서 보수정치권을 재편만 한다면, 그래서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한다면 20대 남성이 대대적인 그 지지층이 될 수 있다. 만약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기성세대와 여성집단으로부터 소외되어온 역사는 그들의 선택의 알리바이가 된다. 기회에 있어서의 무한경쟁과 결과에 있어서의 능력주의를 보장해주면서, 기성세대의 여성집단에 의해 고립되어 느끼는 소외감과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불신감을 보상해줄 정치집단을, 20대 남성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0. 해야 할 일들
나는 이대남 담론을 당장 폐기할 것을 촉구한다. 20대 남성에게 쏟아지는 혐오는 근거도 없고 정당하지도 않다. 그들이 특별히 행사한 권력도, 앞으로 행사할 권력의 기반도 없다. 20대 남성을 아무리 때린다 한들 계층구조에 따라서 온전히 부유층의 남성들은 외제차를 잘만 몰고 다니며 여성혐오를 일삼아도 아무 문제 없다. 이대남 담론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사회적 약자인 빈곤층 남성들뿐이다. 20대 남성을 특정해서 대상화할 것이라면 적어도 존중의 시선으로 동등한 기준에 두어야 한다. 왜 20대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인가? 만일 20대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면, 20대 여성은 잠재적 수혜자인 걸까? 적어도 이런 항변에 대해선 동등하게 논거를 마련해야 한다. 20대 여성은, 20대 남성의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더 강한 체력, 더 높은 노동효율로 자연선택되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게 될 남성들로부터 그 수익을 분배받을 입장이다. 남성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형성된 조건으로 인하여 강제된 신자유주의적 인식에 따라 여성이 대상화될 경우에 대한 최소한의 대비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20대 남성의 신자유주의 의식에 조금도 지지할 수는 없다. 신자유주의는 야만의 논리다. 20대 남성이 앞으로 얻게 될 자본권력이 있다면, 그것은 기성세대와 현재의 20대 여성들이 희생을 감내한 결과다. 20대 남성은 자신들이 형성하게 된 정치의식에 대하여 성찰하고, 오세훈이나 이준석, 윤석열 수준의 정치리더 따위밖에는 산출해내진 못하는 신자유주의 권력을 경계해야 한다. 자신들을 지지해줄 정치집단이 국민의힘으로 보인다 한들,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산출해낸 정치리더가 트럼프 수준일 뿐이듯, 한국의 신자유주의가 산출할 수준도 이정도가 끝이다. 한국은 엘리트 카르텔 사회다. 최상위 강자들의 이익이 보수정치권력집단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도 허울 좋은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보수정치리더가 실제로 공정한 자본주의의 수호자로서 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조국을 거짓말장이라고 한다면, 이준석의 공정도 윤석열의 사법정의도 모두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들이 이야기하는 자유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엔, 서로를 가로막고 있는 혐오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정글 속에 내던져진 20대든 60대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 가장 어리석다. 이것을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말을 옮기자면 한 국가의 자본의 총량은 인구 수와 정적 비례한다. 상대방의 소멸을 기도하는 것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자본을 스스로 줄여버리는 것이다. 혐오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다. 상대방은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 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런 우리 모두의 스스로의 실천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