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토론회에서 처음 배운 민주주의

(2007년 작성)

by 공존

“선정세미나라구, 비밀로 독서토론모임 하는 동아리인데 같이 안할래?”

우리 독서토론 동아리를 만난 것은 고2 가을 때였다. 점심시간에 매점을 가려고 복도를 걷고 있는데, 학생회에서 같이 알고 지내던 친구 두 명이 와 말을 건 것이다.

입시에 대한 부담감으로 고민을 하면서도,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고 그래서 항상 공부라는 당위와 동아리활동이라는 욕구 사이를 오가는 것이 고등학생 누구나의 숙명일 터이다. 나 역시 다른 학교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만화 대회에 참여하는 등 한창 떠들썩하게 18살의 여름을 지내고 난 후였다. 그리고 가을이라는 것은, 수능의 계절이며 나는 조만간 나의 현실이 될 수험생의 처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할 때였다. 그래서 대답,

“왜 나야?”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독서토론 동아리라는 건전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이 동아리가 비밀리에 운영되어 왔던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가 감당해야 할 수험생이라는 위치, 그로 인한 외부의 간섭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보다 충실한 독서와 토론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면접과 논술이 입시에서의 필수과정으로 정착된 요즘과 달리 내가 입시를 하던 즈음에는 면접도 논술도 없이 새내기를 받는 학교들이 더러 있었으니까. 완고한 선생님이 보시기엔 “똘똘한 녀석들이 고삼이 되도록 쓸데없이 모여 다닌다.”는 소리를 할만도 한 것이다.

선정세미나는 고3이 되도록 매달 꼬박꼬박 한권의 책을 선정하여 읽고, 토론을 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때론 시사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기도 한다. 마침 선정세미나에 가입한 때가 방송인 홍석천씨의 커밍아웃으로 대한민국이 한번 뜨겁게 달궈지고 난 후였기 때문에 나의 첫 세미나는 동성애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본래 1학년부터 가입을 하는 것이 보통이고 나는 뒤늦게 2학년도 끝나갈 즈음에 가입을 한 것이기에 이 첫 세미나에서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동성애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이나, 대학생 선배님들이 와서 그에 대해 조리 있는 의견을 내놓는 것을 보고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비밀동아리. 월 1회의 모임 속에서의 민주적 규율 등을 통해 세미나는 내가 들어갔을 즈음 1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난 후였다. 모임을 한 번, 두 번 계속해 나갈 때마다 내가 놀라게 되는 것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년이 넘어가는 대학생 선배들까지 꾸준히 참여한다는 것, 그리고 독서토론이라는 과정이 그런 연차와 기수를 구분하지 않고 대단히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등등의 사실이었다. 책과 토론의 주제를 선정하고 발제를 준비하는 것도 전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우리들의 몫이었고, 간사라고 불리는 대학생 선배들의 역할은 토론의 사회와 전체적인 운영 정도였다.

이런 원칙들이 세미나를 계속 살아있게 하는 힘이었던 것일까, 나중에 내가 간사가 되었을 때는 이런 경우도 있었다.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세미나를 하기로 하였는데 책을 읽고 나서 이 무소유라는 관념을 가지고 막상 토론을 하자니 막막한 것이다. 오랜 수행생활로 인식의 틀이 다져진 스님이 순간의 착상으로 체득한 무소유라는 관념을, 책으로 전해 읽고 토론의 주제로 삼기에는 17,18의 나이가 너무나 막막한 것이었다.

그래서 토론이 헛바퀴를 맴돌게 되자 사회를 보던 내가 무소유란 관념에 대해 해설을 시작했다. 되지 않은 깜냥으로 책에 대한 해설을, 대학생의 입장에서 고등학생들에게 한다는 것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그것은 고등학생 스스로의 힘으로 토론을 이끌어나간다는 우리 동아리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어기는 일이었다. 다소 힘이 부치더라도 토론은 그들이 끝까지 책임져야 할 몫이고, 대학생 간사인 나는 그들이 지치지 않게 도와주는 역할일 뿐이다. 그런 것을 모르고 잘난 척 토론의 핵심 주제인 무소유라는 관념에 대해 이러하다, 저러하다 이야기를 했으니 큰일.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대학을 졸업한 선배에게 크게 혼이 나고 말았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동아리에 참여하면서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의 간사활동이야말로 흥미 있는 일이었다. 학년 당 6명씩의 재학생과 함께 책을 고르고, 따로 발제에 대해 토의를 하고 독서토론의 사회를 진행하는 것은 물론 어렵고, 꾸준한 집중이 필요한 일이다.

항상 대학생 간사는, 고등학생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문제제기를 해 줄 필요가 있었기에 무엇보다 사물을 보는 시각을 달리 가져야 했다. 고등학생들이 추천도서류의 편협한 독서습관에 길들지 않도록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숨겨진 걸작들을 추천하는 것들도 대학생 간사들의 몫이었다. 아마도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크게 사고의 틀이 넓어지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선정세미나라는 공간이 아니고선 나 또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토론의 사회라는 것은 잘 듣고, 잘 말을 한다는 토론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나의 토론 실력을 키우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100분토론의 사회자인 손석희씨가 토론자들이 논점을 흐트러뜨리고 의미가 불분명한 말을 할 때마다 정확하게 요점을 집어서 토론의 맥을 잡는데, 우리 동아리에서 간사가 되고 나서 사회 진행의 중요함을 알고 더욱 손석희씨의 진행솜씨를 집중해서 보곤 했다.

선정세미나라는 동아리에서 7년여의 시간을 함께 하다보니 많은 부분 내 생각의 흐름을 주도하는 결과가 나왔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토론이라는 세미나의 제 1원칙은 고스란히 토론에 있어서의 나의 원칙이 되었고, 항상 토론을 염두하고 책을 읽다보니 꼼꼼히 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순수문학과 사회과학을 가리지 않고 줄을 박박 그어가며 책을 읽다 보니 나중에는, 아무 페이지나 책을 펴고 그 페이지에 쓰인 내용 중에서 발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신문의 아무 면을 펴고 그곳에서 바로 주제를 선정해 토론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7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학 1학년 때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도 토론 발제를 위해 문자를 보내다가 걸려 혼이 나기도 했고, 시험 전날 열린 세미나 때문에 그만 백지를 내고 퇴장해 버린 일. 물론 평소에 공부를 안 한 탓이지만. 좋은 토론 장소를 찾기 위해 신촌, 일산, 종로와 남산까지 곳곳을 누비는 우리는 최근에는 충무로에 위치한 MIZY 청소년 센터를 찾는다. 청소년 무료, 컴퓨터와 프로젝터 사용이 가능하고 세미나실 외에 따로 라운지를 마련해 그곳에서 보드게임 등을 즐길 수 있지만, 신촌 민들레영토 본관의 좁디좁은 세미나실에서 세미나를 가졌던 예전의 추억이 항상 아련하다.

그렇게 나의 20대를 지켜 온 선정세미나가 내년으로 20주년을 맞는다. 아직까지 우리는, 튼튼하게 함께 자라고 있다. 책을 소중히 그리고 거침없이 다루도록 나를 담금질하고 대화의 기쁨과 소중함을 알게 해 준 세미나가 앞으로 30주년, 50주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자고 이즈음 다들 떠들썩. 그때쯤 되면 어른이 된 내가 말할 수 있겠지.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선정세미나 덕분입니다.”라고.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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