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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Oct 20. 2021

참치와 검찰권력의 해체적 근접성

여전히, 미래권력은 검찰개혁에 있다.

*잔혹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쉘 푸코의 저 유명한 <감시와 처벌>의 서두는 18세기, 대혁명 이전에 처해진 프랑스의 한 사형수에 대한 기록으로 "권력과 형벌의 스펙터클"에 대한 장대한 서술을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권력과 형벌의 문제에 대하여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푸코는 해당 저서에서 사형의 과정을 매우 상세히 전하고 있으나, 그 잔혹함에 대한 대강의 일말만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미엥의 처형> 삽화

『(주:다미엥에 대한 판결은 다음과 같음)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할 것, (중략) <암스테르담 신문>(Gazette d’Amsterdam)은 이렇게 보도하였다. 드디어 그는 네 갈레로 찢겨졌다.(중략) 고령에도 불구하고 사형수를 위로해주기 위해 약간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던 생폴 주임사제의 정성을 다하는 태도는 구경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국왕 시해를 시도했다가 체포된 프랑스 궁 시종무관 다미엥은 푸코가 ‘신체형’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잔혹한 처벌을 받아 대중이 보는 가운데 처참하게 처형된다. 판결은 그의 처형 절차를 20가지가 넘는 조치로 세세히 지시하였고, 대중이 볼 수 있도록 노트르담 대성당 정문에서 그레브광장의 처형대까지 이동해 거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절대왕정시대의 권력행사의 "카타르시스"는 단지 권력의 잔혹성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세분화한 고통을 창출해내는일이며, 형별의 희장자들을 낙인찍고 처벌하는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직된 행사라고, 푸코는 지적하였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여, 대중들을 향한 권력의 폭력 시현은 미시권력의 편재를 통한 전면적인 생활과 행위의 통제로 변하였다고 푸코는 인식하였다. 여기에는 물리적 처벌 혹은 추방이라는 방법(특히 추방은 그리스의 도편추방제와 같이,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형태의 처벌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다.)이 아니라 "감금"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 시현이 작동하게 된 경위가 있다. 감금형으로의 변화는 권력이 작용하는 방식을 크게 바꾸었는데, 단지 격리와 감시를 통해 인간을 굴종시킬 수 있다는 것, 단발성 처벌 이후 권력의 손아귀에서 잠시 해방되었던 과거의 처벌방식에서 벗어나, 권력이 정한 기간만큼 처벌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 죄의 경중에 따라 달라지는 구금형의 강도는 실제로는 구금의 기간 뿐으로, 그렇다면 형벌이 과거에 비해 정량화되고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현대 문명국가는 보편적으로 이런 형태의 형별체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더 이상 우리가 권력의 작용으로써 살이 찢기고 피가 끓어오르는 고약한 냄새를 광장에서 구경을 하게 되는 일은, 사라졌다. 명시적 처벌,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권력의 행사가 경감되었다는 점에서 문명의 승리일수도, 혹은 그것을 대체한 미시권력의 통제와 감시 기능의 현현 속에서 그를 바라볼 때 도리어 권력집단의 승리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처 JTBC

 현대 문명사회에 있어서도 여전히 "해체의 스펙터클"은 매우 원초적이며 강렬한 대중에 대한 호소력을 지닌다. 참치 해체쇼를 예로 들자면, 생선 해체를 직접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은 권력은 아니고 일반적으로는 정보 공개의 투명성에 기반한 소비자 대중과의 관계 확장을 목적으로 한 행위다. 다만 목적은 다르되, 그 양상은 전근대의 공개 신체처벌과 상당히 유사하다.

 

 참치 해체쇼는 대중들에게 직접 호소를 하는 행위이므로, 처형과 마찬가지로 대중이 많이 볼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행해진다. 게다가 더 더 많은 대중들이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도록 음악이나 큰 구호, 위 첨부사진처럼 언론 홍보를 동원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무려 20단계로 규정된 처형과 다미엥의 처형과 마찬가지로 매우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순서가 있다. 체계는 그 자체로 권력 혹은 집행자, 이 경우에는 참치 요리사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권력은 그것이 권력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의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체계적인 참치 해체의 과정은 그것이 "중요한" 일이고, 이것을 소비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소비자에게 메세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미엥의 처형을 목도한 대중들이 곧 뿔뿔이 흩어져 그 스펙터클을 생생하게 타인에게 전달하듯, 해체된 참치를 생생하게 "맛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참치 해체에 수반된다.


 이 마지막 과정의 의미는 이러하다. 소고기를 먹든, 참치회를 먹든, 어느 정도 가격을 넘어서는 식재료에 대해선 도축일 혹은 해체일을 밝히는 것은 굉장한 신뢰도를 준다. 손님이 식당에서 제공받은 음식이 누구에 의해, 언제 도축되어, 어떻게 조리되었고, 어떤 다른 재료들이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곧 스펙터클을 이용한 권력의 시현과 사실상 같은 과정이며,  고급 식당에서 굳이 일일이 음식에 꼬리표를 붙이고 설명을 덧붙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치회와 같은 신선식품은 특히나 어떤 생선에서 나온 어떤 부위인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니, 해체쇼를 직접 관람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해동까지 마친 회를 맛보는 것의 의미는 소비자가 최고 수준의 권력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그러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검찰 권력을 바라볼 때 그래서 나는 참치 해체쇼와 <감시와 처벌>에서 읽은 다미엥의 처형이 떠오르곤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무원 집단이, 그 갖고 있는 직무 분야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정치권력, 언론권력, 경제권력들로부터 막대한 특혜를 베풀거나, 특혜를 입거나, 탄압을 할 권능이 부여된 역사가 몹시 길었고, 대개의 한국의 역대 권위주의 정권은 그러한 검찰의 부정부패와 각종 비위를 눈감아줌으로써 자기 입맛에 맞게 이용해 왔다. 종국엔, 권위주의 정치집단이 거의 영향력을 상실한 2020년대에 이르러선 검찰권력 스스로가 정치권력화하여 촛불혁명으로 수립된 민주정부에 치명상을 가한 쿠데타를 기도하고, 현재 다음 대통령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이다.


 검찰은 헌법기관임에도 법과 절차에 따른 공정한 업무수행이 아닌 권력의 스펙터클을 주로 활용해왔다. 즉, 검찰은 다미엥을 처형하는 집행자들이었고 참치를 해체하는 칼잡이들이었다. 재벌 총수를 포토라인에 세우는 시각적 기법, 한 가족의 삶을 100여곳 압수수색하는 산산조각의 메뉴얼, 범법자는 풀어주고 무고한 시민은 잡아가두는 권력의 맛뵈기의 권능이 한국 검찰권력이 지금까지 휘둘러 온 창칼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가? 하는 것은 매우 긴 논의가 필요할 것이지만 21세기 문명국가의 죄형법정주의 앞에서 한국 검찰권력은 그 자체로 전근대의 야만이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검찰의 이러한 작태를 타파, 아니 해체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곁에 두고 가기엔 너무나 중대한 직무요, 조용히 또 천천히 고쳐나가기엔 지금 당장에도 너무나 많은 피들이 광장에 흩뿌려져 있다.


 기획수사와 강압수사, 보복기소와 별건기소를 남발하는, 남발해 온 검찰권력에 맞서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여 검찰권력을 "해체"한다고 할 때, 그 과정은 참치의 해체쇼에 준한 시각적 스펙타클과 정보공개의 투명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참치의 각 부위를 도려낼 때처럼, 그 순서와 해체의 계획에 있어서도 매우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메뉴얼이 있고, 그것이 시민들에게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해체된 참치를 그 자리에서 맛볼 수 있듯이 시민들이, 검찰권력의 해체를 몸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경험이 부여되어야 하지 않을까? 검찰이 스스로 지금껏 해왔듯 말이다. 즉, 검찰권력에 대해 지금까지 그들이 행해온 처벌과 해체의 스펙터클을 그대로 시민권력의 손에 의해 집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검찰개혁이 성공했는지 실패하였는지, 어떻게 검찰권력이 해체되었는지, 또 검찰권력의 해체를 통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떻게 예감하고 또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2021 10 19 PD수첩의 김웅 의원과 조성은  녹취록 보도를 기화로 윤석열과 검찰권력의 해체는 결정적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단지 그들이 가진 직무 상의 결정권을 과도하게, 혹은 느슨하게, 혹은 아예 눈을 감고 행사했던 것과는 궤를 달리하여 검찰이 직접 정치권력  언론과 결탁하여 총선을 목전에 두고 규모로 정치공작을 벌인 사례다. 사실이 모두 밝혀지면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은 모두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것이다. 그러나 단지 당사자들 뿐일까. 해방 이래 70년간 법치국가를 말그대로 농단한 검찰권력의 토대 없이 윤석열과  검찰  수하들의 이런 행위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검찰권력의 화신이 있다면 가장 그에 근접한 것이 바로 윤석열 아닐까. 조국 장관 일가를 향해 윤석열 검찰이 행한 것이 바로  명백한 증좌일 것이다. 윤석열은 문재인 정부와 조국  법무부장관을 향해 검찰권력을 역대 최대한의 힘으로 행사하였고, 이는 이전에도 없었고 또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니, 나와서는 안될 일이다.


 함무라비 법전 식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논리가 아니라 나는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검찰권력의 해체에는 실제로 참치 해체에 준하는 정보공개의 투명성과 절차의 구체성과 결과의 실재성이 존재하길 강렬하게 희망한다. 그런 점에서 검찰권력은 그 자신이 칼잡이이기도, 또한 도마 위에 올라야 할 참치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한 없이 참치해체에 안성맞춤한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 사실 70년간 검찰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 검찰 권력이 풀어준 범죄자들, 그로 인해 뒤틀린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본다면, 정말로 검찰권력 몇몇은 광장의 다미엥처럼 만들어놓는다 해도 당장 "문명국"의 위상을 훼손하진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병우라든가, 김기춘이라든가, 윤석열이라든가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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