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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ug 16. 2021

"해방될 지 몰랐으니까."

오키나와의 비극과 한국의 오늘

 영화 <암살>의 이 유명한 명대사는 사실 당대인들에겐 절절한 현실이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병탄된 조선인들은 이미 일찌감치, 오키나와가 일본에 의해 국권을 박탈당해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본래 류큐라는 이름을 가진 이 작은 섬나라는 중국 역대 왕조와 조선에 입조를 하는 등, 일본과 분리된 독자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27년과 187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신정부가 류큐를 완전 병합하고 오키나와로 격하하는 조치를 하게 되지요.


 일본 정부는 류큐를 완전히 일본화하기 위해 근대학교를 설치하고 일본어 교육을 강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점기의 정책 그대로지요. 아니 사실은 류큐, 다시 말해 오키나와가 일본의 동아시아 식민지 정책의 실험장 역할을 했습니다. 근대학교를 건설하고, 근대식 교육을 통해 언어와 정체성을 일본인의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근대 산업국가의 노동자로 양성해는 것이죠. 


 일본의 오키나와 교육정책은 두가지 특성이 있었습니다. 첫재는 “언어와 풍속을 혼슈와 동일하게”라는 일본화 교육입니다. 언어 강습소를 설치하고 “오키나와 대화” 라는 교재를 만들어 먼저 사범학교의 교원을 양성했습니다. 전통적인 마을학교를 폐지하고, 각지에 소학교를 설립합니다.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교사 양성과 일본어교육에 가장 공을 들입니다. 초등학교 과목을 수신(도덕 교과),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지리, 역사, 회화로 하였는데요, 특히 “오키나와 대화”가 중요하게 쓰입니다. 언어통합을 꾀한 것이죠. 식민지 조선과 똑같죠? 네 똑같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서당이 철폐되고, 전통교육이 단절됩니다. 특히 오키나와 어를 사멸하기 위해 “방언표”라는 수단을 썼습니다. 오키나와어를 기록해서 아동이 실수로 발화할 시에 이를 찾아 처벌하는 방법이었죠. 이로 인해 오키나와 마을공동체는 자발적으로 오키나와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두번째 특징은 “황민화 교육”입니다. 1887년 오키나와 사범학교와 중학교에 군사훈련을 도입합니다. 1890년 교육칙어로 황민화 교육 강화하여, 일본어와 단발, 기모노를 강제합니다. 이건 조선과는 좀 차이가 있네요. 기모노는 강제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학교 교육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하였고 이는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1984년의 대만 점렴과 1904년의 러일전쟁에 오키나와인들이 점령군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여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입장이 반전되기 때문입니다. 섬나라의 2등 국민이던 오키나와인들은 제국의 전사로 "출세"하는 경험을 하면서 일본인으로 정체성이 변화합니다. 조선이 일제에 의해 병탄되었을 시점에는 이미 오키나와는 완전히 일본제국의 일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은 여지없이 오키나와를 2등 국민으로 격하하여 죽음으로 내몰긴 합니다만.


 그래서입니다. "해방될지 몰랐으니까."라는 이정재의 저 대사가 진심으로 들리는 것은 말입니다. 36년의 강점기는 후대인들이 먼 역사의 거리를 두고 보면, 그렇게 긴 기간만은 아닙니다만 당대인들에게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의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식민지들이 제국에 동화되는 것을 지식인들이 먼저 학습하고, 자신의 처신을 정하곤 했을 테지요. 어쩌면 을사오적에겐 대만 점령을 통해 오키나와가 일본제국의 일원이 되었던 것처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일부가 되어 조선인들이 언젠간 만주침공의 첨병이 됨으로써 완전한 제국의 일원이 될 것이란 기대를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음, 그런 기대는 상당히 현실이 되었지요. 승리한 전쟁이냐 패배한 전쟁이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 많은 한국 청년들이 일본군의 총칼이 되어 전쟁터로 끌려갔으니까요. 단지 차이점이라면 일본의 국운이 융성하던 시기와 쇠망하던 시기가 엇갈렸다는 점 뿐이겠습니다. 


 오늘날, "해방될지 몰랐으니까."라는 외침과 교차되는 36년이라는 무저갱의 시간과 그것을 살아내는 하루하루의 삶에 대하여 겹쳐보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부패한 사법부와 자본권력 카르텔이지요. <암살> 속 이정재의 시점에서 "해방될 지 몰랐던" 식민지의 역사가 이미 50년에서 80년에 걸친 역사의 "현실"이었다면. 광복 이후 단 한순간도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사법 카르텔 역시 어언 80년이 되어가는 역사의 "현실"이니까요. 우리는, 해방될지 몰랐던 식민국가에서 제국의 일원으로 살아갔던 이정재처럼, 도무지 종결될 기미가 없는 자본-사법 카르텔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겁의 시간처럼 보이는 하루 하루 속에, 우리는 사법부의 일원이면 죄가 안되고, 돈이 있는 자면 벌을 받지 않고, 권력이 있으면 끌려가지 않는 "그들만의 제국"의 피식민지 상태에 처해 있는 셈이죠.


 광복절인 오늘, 이 글을 썼다면 더 좋았겠습니다만 하루 지난 오늘 이제나 저제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워온 원혼들을 기립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과 죽음이 헛되지 않았던 것을 증명하는 길 역시, 오늘 우리의 싸움을 계속해나가는 것임을 되새깁니다. 지금도 사법-자본 카르텔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그들의 제국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만, 결국엔 식민지를 끝장내고 말았듯이 그들의 권력도 무너지고야 말 테죠, 무너트려야 할 테지요. 


 방법은 많고, 이미 충분한 비극이 쌓였습니다. 기꺼이 제국의 일원이 되겠다는 사람보다는 그 제국을 무너트리자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점도, 우리에겐 희망이 됩니다. 그때가 되면 사법개혁의 붉은 탄환으로 "개혁이 될지 몰랐으니까!"라며 외치는 그들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라는 희망을 광복절의 마무리에 함께 띄워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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