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 무찌르기> 감상
저자 다이앤 래비치 교수가 치밀하고 광범위한 데이터를 통해 분석하고 있는 미국 공교육 개조의 역사를 읽어내는 동안 한가지 선입견이 머리에 만들어지기 시작하더니,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내내 날 옭아메고 있었다. 보통은 이런 것이 좋은 독서는 아니다. 85세의 노 교수가 400여 페이지에 걸쳐, 그것도 요즘 추세와 달리 꽤나 빡빡한 쪽편집으로 설명하고 있는 40여년의 역사적, 사회적 변천상을 정직하게 또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나의 선입견보다는 글 한자 한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남부와 북부, 동부와 서부를 아우르며 바야흐로 미국 전역에서 지속되어 온 이러한 "교육의 파괴자들"의 치열하고 장구한 투쟁을 내가 나의 언어로 재해석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란 오직 한가지, 이것들이 결과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를 스스로 탐지해나가는 것이고, 그리하여 내게 형성된 이 선입견은, 결국 하나의 명확한 질문이자 답변이 되었다. 그것은,
"미국 의료체계 수준으로 교육체계를 전면적으로 민영화하려는 자본주의 집단의 총체적인 대공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번 이 결론에 비추어 텍스트를 읽어보도록 하자. 이 모든 소란들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여기서 말하는 소란이란 우선 평가 제일주의다. 레이건 행정부인 1980년대에 시작된 미국의 교육개혁은 실상은 개혁이라고 말하기 대단히 어려운 단촐한 조치인데, 일제평가를 도입하여 주 단위, 학군 단위로 여러 학교 학생들의 성적을 비교하고, 교육당국이 정해둔 합격선에 미달된 학교에 대해선 교사 해고, 재정 감축, 심한 경우 학교 폐쇄까지 가능하도록 한 조치이다.
2022년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교사, 그것도 교육과정 및 혁신교육 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여러가지 참여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겐 이것이 대단히 기이하고 이상한 정책으로 읽힌다. 왜냐하면 2022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식 학교평가의 평가요소가 이놈의 "일제고사"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의 결과적 평등 이상으로 조건적 평등을 강조하는 대한민국에선 평가를 통한 교사 해고 및 학교 폐쇄 같은 일은 가능하지 않으며, 유사한 시도를 했던 이명박 정권에서도 현장의 무수한 저항의 목소리들로 인하여 제도가 실효성 없이 유지만 되다가 시나브로 사라진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성적을 평가하는 방식 바깥에서 학교를 평가하고 개선해야하는 교육당국의 역할과 노력은 있었고, 그런 노력들은 "교육과정 편성 및 운영"에 대한 점검과 피드백으로 이루어졌다. 어떤 과목들을 개설하고, 어떤 비교과활동을 구축하여 학생들을 지도하고, 어떻게 학생들과 상담하고 인성지도를 하는지 등이 학교평가의 지표였으며, 학교평가에 있어서 적어도 공적 차원에서는 학생들의 성적이 큰 의미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즉, 한국과 비교해보았을 때 미국식 학교 개조의 방식은 학교가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로지 일제고사에서의 평가성적 한가지 뿐이며, 바꾸어 말하며 이것은 가르침 없는 시험, 교육 없는 평가라는 패러다임을, 교육당국으로부터 학교로, 학습자 교사들에게로 내면화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직하게 이에 대해서 명토박아야 하지 않을까. 학생들의 평가점수와 학교 및 교원 평가를 연계하는 것, 그것은 애초에 교육과는 일말의 연관성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번째 소란스러운 사태란, 우습게도 이러한 교육 없는 평가 식의 학교개조에 미국 최고 수준의 갑부들이 어마어마한 자본을 투자하고 있다는 점이다. 월마트,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을 넘어선 전세계 최고 수준의 갑부들이 일제고사 형식의 표준화 평가 개발에, 그 평가체제를 학교현장에 도입하기 위한 캠페인에, 이 캠페인을 실현할 정치인들의 선거에 무지막지한 돈을 쏟아붓는다. 대체 왜? 그런데 한꺼풀 현실의 장막을 들춰보면 이런 거액의 후원자들이 본인들이 사립학교를 직접 유치하거나, 사립학교와 간접적으로 연계된 사업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 래비치 교수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다. 이들은 본인들이 직접 사립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기존의 공립학교 체제를 붕괴시키려 하며,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공존이 지속되는 지금에도 국민의 세금으로 상당한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 여기에 온라인스쿨이 정식 학교에 준하는 학력인정을 받으면서 이제는 마트 회의실이든, 교회 건물이든 공간을 마련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필요한 것은 학교설립 인가장과, 저경력의 자격미달의 교사들 뿐. 어떻게 그것이 교육의 성공을 담지하느냐? 간단하다 이들의 논리는, 일제고사에서 높은 성취수준을 요구하고, 미달자에 대해서 높은 부담을 지운다면 경쟁과 효율의 원리에 따라 이들의 성적은 오르게 되어있다니까.
내 선입견, 혹은 질문에 따라서 책의 논지를 요약하자면 이, 골리앗으로 명명된 자본주의적 파괴자 집단은 적어도 교육에 대해 관심은 전혀 없다. 이들이 교육에 대한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다면, 실제로 학교에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평가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정책지원을 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반교육적 책동은 사실 별도의 목적이 있다. 가깝게는, 본인이 운영하는 교육사업체의 수익이다. 학교를 설립하면 공공자금이 들어온다. 기존의 공립학교에 지급되던 지원금을 나눠서 주는 것이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럼 이 자금으로 교사를 채용하고 건물 수리비 등을 지불한다. 돈을 많이 쓸 필요는 없다. 공립학교는 훨씬 열악하기 때문에 사립학교들을 적당히 엉망으로 운영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책을 읽으며 명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서 추론해낼 수 있는 것은, 이 교육의 파괴자들의 목적은 완전히 공교육 시스템을 사립학교 체제로 바꾸어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미국의 의료체계처럼.
잘 알려져있듯이 미국의 의료체계는 완전히 자본주의에 종속된 체제다. 클린턴과 오바마 등 역대 민주당 행정부에서 정권의 사활을 걸 기세로 의료보험 체계 개선에 매진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했다. 미국인은 1인당 연간 1만달러, 우리 돈으로 1400만원 이상을 지출하며 의료비로 인한 파산은 매우 흔한 일에, 스스로 주사를 놓고 상처를 꿰메는 정도는 기본 소양이 되어 있다. 이 체제 속에서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사기업은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린다. 공공의료체계를 부정하고 개인이 책임 지는 것이 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전체인 것은 아니지만, 의료민영화 진영은 교육의 파괴적 대개조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어마어마한 자본을 입법로비와 연구보고서에 투자하며 이 시스템을 유지해나간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가능한가? 외부자의 시선에서는 질문을 던지게 되지만 기실 미국은 하나의 나라도 아니며, 하나의 주 단위로서로 "국가로서 존재하기엔 너무 큰" 나라다. 너무나 많은 인종, 너무나 많은 계층, 너무나 많은 집단이 미국 내에 존재하며, 체제 내의 외부자들에게 자신들과 마찬가지의 공공서비스를 누리게 하는 것은 보수적 기득권세력에게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히스페닉의 이민자 자녀에게 왜 대학교육의 예비과정인 중등교육을 시켜야 하는가? 초등학교만 나오더라도 그들의 천직인 화장실 청소는 아주 잘할 텐데 말이다. 이것이 그들이 공유하는 멘털리티의 일단이다.
1980년대 이후의 교육 대개조 이전에도 무수히 교육체제를 분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를 테면 1920년대부터 시행된 지능검사는 이민자와 흑인들로부터 백인 가정의 학생들을 보호하는 장치로 쓰였다. 지능검사로 우수한 학생과 열등한 학생을 가르고, 우수한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을 제공해주자는 논리는 꽤나 잘 먹혔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에나, 미국의 주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그런 교육체계를 통해 형성된 백인-고학력자들이다.
이런 과거로부터의 교육분리 전략을 돌이켜보건데 "미국 의료체계 수준으로 교육체계를 전면적으로 민영화하려는 자본주의 집단의 총체적인 대공세"라는 질문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교육주체들에게는 의료체계라는 거울이 있는 점이 비극이다. 교육-의료라는 사회적 안정망의 대표적인 영역이, 그 한쪽은 완전히 자본주의에 의해 조각나 있는 상황에서 교육이 과연 자본주의의 공세로부터 온전할 수 있을까.
여기서 대한민국에 무척이나 유의미한 시사점이 있는데, 이들 교육 파괴자 세력이 노리고 있는 공격대상 중 하나가 "교육위원회"라는 점이다. 미국은 선거를 통해 지역의 교육위원들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교육정책의 결정권을 맡긴다. 중앙집권형 체제인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인데, 이러한 양국의 시스템 차이는 1950년대, 미군정이 한반도를 빠져나가면서 교육위원회의 구성과 운영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물론 이후 이어진 한반도의 역대 권위주의 정부가 지역 단위 교육위원회를 그대로 뒀을지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이들 교육위원회를 사수하고자 하는 시민적 저항, 학교를 지키고자하는 교사와 학부모의 반란이 40년에 걸친, 교육 파괴자들의 공세에 맞서 곳곳에서 승전보를 울리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대한민국에도 보다 많은 시민사회 거버넌스 확립을 위해서라도 지역 교육위원회 선거를 고려해볼만하다. 미국에서는 이들 교육위원회 사수가 사립학교 난립을 막고 공립학교를 지켜내는 역할을 실제로 여러곳에서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교육위원회가 구성되고 선거를 통해 민주적 소통을 거친다면 유의미한 교육담론이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공정과 상식"의 시대, 질적 공정이 아닌 양적 공정으로, 합의되어 만들어나가는 상식이 아닌 선험적 상식이 강제되는 시대, 교육은 무사할 수 있을까. 능력주의 담론과 조국 전 장관 일가를 탄압하며 만들어진 허구적인 교육체제의 전환적 시각이 과연 앞으로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까. 다행한 점은 한국의 교육은 한 정권이 독자적으로 무언가 바꾸어놓기엔 너무나 복잡한 체계라는 점이며, 불행한 점은 그래서 다윗 쪽의 입장에 선 우리들 역시도, 이 불덩어리 같은 문제를 어찌 해결해내지 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에서 지금껏 이루어져왔던 실천들이 어떤 낙관적 전망에 근거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은,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채의 입구까지 골리앗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올 때, 할 수 있는 것은 손에 손에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