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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n 19. 2022

라쇼몽, 라스트 듀얼, 그리고 학교 민주주의와 교육주체

진실을 밝히는 것은 실천

 <라쇼몽>이라는 영화가 있다. 전설적 거장 구로가와 아키라 감독의 대표작으로, 한가지 사건에 얽힌 여러 관계인들의 관점에서 그 사건의 진실이 어떻게 저마다 달리 풀이되는지를 뛰어난 영상어법으로 보여준 명작이라고 한다. 나는 이 영화의 원작에 해당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속>과 <라쇼몽>만 읽고 영화는 보지 않았다. 원작 소설에도 영화의 특징인 “저마다 이야기되는 사실이 모두 다른 상황에서 생겨나는 기이한 기류”는, 그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나 있으니 이야깃거리로 삼아도 괜찮겠다.


 <라쇼몽>이 워낙 기념비적인 작품이니 비슷한 영화도 퍽 많은데, 이연걸의 <영웅>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이다. 다만 그 영화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뜨악한 결말에, 세번 반복되는 이야기의 변주가 크지 않아 유장하고 스케일 큰 액션이 무색하게 지루하다는 평가가 많다. 최근 리들리 스콧 감독의 <라스트 듀얼>이 라쇼몽 장르의 최신판이라고 할만한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아직 영화를 감상하지 못했지만, 비평을 참고하건데 하나의 사건에 얽힌 각 인물들의 입장에서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는 이야기, 완전히 다르게 변주되는 사실 묘사라는 점에서는 역시나,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역량 역시 명불허전이라고 할만하다. 

 학교 안에는 많은 교육주체가 있다. 정책 주체, 학교경영 주체, 교육 주체, 학습 주체, 양육 주체 등이다. 이들이 모여서 학교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얽히고 설키니, 각자의 관점에 따라 같은 하나의 사건, 즉,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고, 교사는 가르치고, 학교장은 총괄하고, 학부모는 참여하는 과정이 모두 다른 사실로,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읽힐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10여년 교직생활을 하다보니 여러가지로 의도와는 다르게 이해되는 일, 그로 인해 불편한 경험을 했던 일들이 겹치며 차츰 행동을 정리하게 되고 "타인의 시선"에 보다 신중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각 주체들이 저마다 다른 관점을 갖고, 다른 생각을 하며 충돌하는 것에 있어서 완전한 합의란 없다. 각자에게 있어서 각자의 경험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유일한 참이고 사실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각자의 생각을 협상해나가는 것은 그러한 사실 인식의 차이를 딛고,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교환해나가는 것에 불과하지,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실, 각자의 세계를 좁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협상 혹은 합의와는 별도로, 고도의 지적 심성적 노력을 요구하는 행위다. 


 학교와 학부모,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라쇼몽이나 라스트 듀얼의 비유만큼 안성맞춤한 것이 없다. 아이의 원 보호자인 학부모가, 학교에 아이를 맡겨 교사의 손에 의해서 가르치고 있는 이 한가지 사건에 대하여 학부모와 교사는 양쪽 극단에 서서 상당히 다른 현실 인식을 한다. 여기에는 가느다란 합의점만이 존재할 뿐,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합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에겐 각자가 경험한 세상이 모든 것이므로, 학부모는 자신이 믿는대로, 교사는 자신이 믿는대로 서로를 바라본다. 학교라는 하나의 공간에 모여, 학교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서서. 


 <라쇼몽>도 <라스트 듀얼>도 극 속에서 이 엇갈리는 사실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나가는데, 라쇼몽은 구체적으로 사실을 찾는 수사탐문과정이 연출되고, 라스트 듀얼은 결투재판이라는, 대충 "신이 정의로운 쪽을 이기게 해주시겠지."라는 믿음에서 싹튼 해결방법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것은 엇갈려있는,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당사자들의 문제이고. 과연 제 3자의 입장에선 어떨까? 이해관계를 벗어난, 관점의 차이에서 벗어난, 무관자들. 다시말하자면 "객관적인 시간"에선 우리는 어떻게 이 엇갈리는 견해들 사이에 진실을 인식하게 될까? 


 그것은 다름 아닌 구체적인 소명. 즉, "말하기"이다. 말하기로는 아무래도 증거능력이 부족하니 말한 것을 조리있게 글로 쓰는 것이 보다 촉구된다. 각자, 건너갈 수 없는 진실의 강에 서 있는 우리가 이 사실의 객관성을 증명하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 있는 사실을 모두 드러내서, 자신의 진실성을 밝혀내야 한다. 절대성도 진리도 사라진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철학자 들뢰즈와 바디우는 진리에 접근하는 실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어떤 사실의 진리성은 그 사실을 밝히려는 실천 노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참인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말하고, 쓰고 있는가?


 나는 최근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 몸 담고 있는 교육연구회에서 학교의 민주주의를 논의하는 가운데, 학부모의 학교교육 참여에 대한 열띤 논쟁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부모 참여 확대를 주장하는 나는, 관점이 다른 여러 의견을 접하고 있다. 그리고 즐겁게, 또 때론 열정적으로 나의 믿음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그를 위하여 쓰고, 읽고, 비판하고, 토론한다. 그 과정에서 동지가 생기기도, 비판자가 생기기도 하고 있다. 


 그러나- <라쇼몽>이 보여주듯, <라스트 듀얼>이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듯, 논쟁의 당사자로서 유일하게 합의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일 뿐이며, 어느쪽의 생각이 맞을런지, 그 최종적인 결론은 얼마나 열심히 쓰고 말하느냐에 달려있을 뿐인 것이다. 학교란 본질적으로 그런 공간이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는 방법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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