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net of the Apes
초광속 우주선 속에서 찰스헤스턴의 중얼거림으로 시작하는 <혹성탈출>의 1편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영화다. 그러나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2000년즈음에 동네 비디오대여점을 뒤지다가 포기했었고 리부트 3부작이 비록 3편에선 상당히 한심하게 마무리됐지만 적지 않은 유명세로 클래식의 존재감을 덮어버렸다. 그러나 5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실제로, 지금 보아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세계의 주인은 진화한 유인원들이다. 침팬지(평민), 오랑우탄(원로), 고릴라(용사)로 구분되는 사회질서 속에서 그들은 종교와 법, 사회계율을 통해 하나의 문명을 일군다. 1970년 미국을 출발한 주인공 일행이 우주여행 중에 불시착하게 되는 이 행성에서 인간은 원숭이들의 사냥감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는데 '노예'라기보다는 '가치가 없는 연구대상' 정도로 원숭이들에게는 인식된다. 원숭이들의 법전 제 26조 9절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사악한 인간을 조심하라 인간은 악의 볼모다 탐욕에 눈이 멀어 유희로 신의 창조물을 죽이나니 땅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를 살해 하도다 그러니 번식하게 하지 말라 자신과 너희의 집을 파괴 할테니 그를 피해 정글에 가둬라 그는 죽음의 사자다"
인간은 원숭이들에게 철저히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세계를 위해 사라져야 할 종족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인해 원숭이들은 인간을 말살하지 못하며, 인간 역시 말살되지 않은 채로 살아오고 있다. 비밀구역의 존재에 그 이유가 숨어있다.
인간들은 원숭이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그리고 테일러(찰스 헤스턴)은 그곳에 불시착하여 인간들을 처음으로 만난다. 원숭이 문명이 수천년간 이어져오는 동안 왜 금지구역이 터부로 남아있을까? 원숭이들에게 잡혀간 테일러는 그 금지구역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고고학자 코넬리우스와 동물심리학자 자이라 부부를 만남으로써 이 행성의 수수께끼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자이우스박사. 영화는 진실을 찾는 인간과 두 젊은 학자, 그리고 진실을 알고 또 그것을 감추려 하는 자이우스박사와의 갈등으로 긴박하게 흘러간다. "말을 하는 인간"으로 원숭이 사회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테일러는 원숭이들의 청문회에 끌려가게 되고 그곳에서 인간문명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코넬리우스 부부의 이단심문에 증인이 된다.
인간의 문명은 존재했던 것인가? 그리고 인간은 원숭의 문명의 모태인가? 이러한 명제는 인간이라는 짐승의 무도함을 명시한 원숭이들의 법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테일러는 그 존재만으로 사회의 위협요소로 떠오른다. 인간에 대한 상상 가능한 모든 비판과 비방을 참을 까닭이 없는 테일러, 저항하지만 청문회는 아무런 결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간다.
그날 밤, 자이우스 박사는 테일러를 불러내어 그를 실험재료로 쓸 것이며, 그것을 피하려거든 테일러의 종족에 대해 말하라고 윽박지른다. 미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테일러지만 자이우스박사는 지능을 가진 인간 종족의 등장을 오랫동안 예견하고 있었고, 테일러의 등장을 보고는 그 종족을 전부 찾아낼 속셈이다.
"돌연변이 하나는 괜찮아도 떼거지로 있는건 곤란해"
원숭이들은 인간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테일러는 이 행성이 원래는 인간의 것이었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도 그 역사의 비밀을 풀겠노라 결심한다. 그날밤 자이라의 도움으로 테일러는 탈출을 감행하고 테일러와 자이라, 코넬리우스, 그리고 자이우스는 금지구역의 유적지에서 조우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1300년 전의 인간문명을 발견하고 논쟁을 이어간다.
이미 이곳을 탐사한 바 있는 자이우스 앞에서 인형과 쇠뭉치등을 발견한 테일러는 이 행성의 역사가 지구처럼 인간의 것이었음을 확인한다. 원숭이들은 인간의 문명을 이어받은 것이며, 아마도 인간은 자연재해나 재앙으로 몰락한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원숭이 사회의 창시자, 혹은 모든 법률의 주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이우스 역시,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테일러와 같은 인간 종족의 존재를 추적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은 지혜와 무지가 공존하는 생명체로 감정에 지배받아 자신과도 싸우는 호전적인 동물이지"
"증거라도 있나?"
"금지구역은 원래 낙원이었어. 그런데 인간들이 사막으로 만든 거지."
"인간에서 원숭이로 진화한 행성이라...대답 안해주면 직접 찾아나서지."
"원하는 걸 찾으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대화. 테일러는 노바와 함께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지 않아 진실을 발견한 테일러는 길게 오열한다. 절제력을 잃고 타락해버린 인간의 역사. 결국에는 스스로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은 인간들의 역사를 그곳에서 만난 것이다.
존재의 공포
1960년대는 세계대전과 핵전쟁의 공포가 극에 달하던 시기이다. 구 소련과의 경쟁은 미칠듯한 군비확장으로 이어졌으며, 19세기인들이 띄워올렸던 우주여행의 꿈은 강대국의 야욕으로 뒤바뀌어 탄도미사일의 공포를 불러왔다. 인간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공포에 몸서리 치면서도 그 공포를 버리지 못한다. 왜일까. 원숭이들은 말한다. 인간은 지혜와 무지가 공존하는 생명체라고. 영화는 이렇게 냉전시대를 조명하면서 차츰 목소리를 올린다. 인간 스스로를 해치는 온갖 망상에서 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극 초반부에서 랜던이 성조기를 꽂는 장면. 이것을 비웃는 테일러의 허탈한 웃음 역시 자주 회자되는 명장면이지만 이만큼 당대의 미국사회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은 없는 듯하다. 우주선은 호수 밑으로 가라앉고 그들은 생존의 가능성 조차 희미하지 않은가! 미지의 땅에 국기를 꽂는 것이 지상의 가치로 작용했던 제국주의의 모순을, 이미 세계대전을 경험한 이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인간의 미래란 존재하지 못할 터이다. 이들은 강대국의 속성을 결코 버리지 못한다. 야후와도 같은 인간들을 처음 만나 내뱉는 테일러의 대사가 이를 보여준다.
"더 우월한 자가 지배하는 거야."
랜던을 비웃는 테일러를, 그리고 원숭이는 비웃으면서 사냥한다.
문명
영화를 바라보면서 또다른 재미있는 점은, 원숭이 사회의 시스템이다. 출신(종)에 따른 엄격한 역할구분으로 운영되는 원숭이 사회는 인간의 사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종교까지 따르고 있다. 마치 중세 유럽사회를 그대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사회 역시 평등을 가장해 짐승(인간)들에게 무자비한 살상과 비인도적인 실험을 계속함으로써 내부의 폐쇄성과 경직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런 역설적 상황을 통해 드러나는 전복적 상상력은 테일러의 온갖 산전수전과 맞물리면서 인간문명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인간이 지금 이룩한 문명은 또 어떠한가. 우리는 그런 실험과 살상행위를 무시로 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을 비판할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영화는 이렇게 꾸준히, 열성적으로 인간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그 모든 생명들을 가벼이 여기는 우리는 얼마나 우스꽝스런 존재였던가. 실험대상이 되어 울부짖다니. 1968년, 그 시대인들이 느끼고 있던 시대의 질곡이 영화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논쟁은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또 다른 의문을 남기며 영화는 반전으로 마무리된다. 인간은 정말 모두 멸망한 것일까. 금지구역의 유물 속에서 2600년대까지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