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eath the Planet of the Apes
직유와 은유
<혹성탈출> 1편이 <걸리버 여행기>의 냉전시대적 패러디라면 첫 속편 <Beneath The Planet Of The Apes>는 보다 현실에 밀착한 정치적 영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념비적인 1편이 공교롭게도 1968년, 혁명의 시대에 개봉되어 당대의 철학과 소통한 흔적이 바로 이 영화랄까. 그래서 <Beneath The Planet Of The Apes>는 1편에서 시도했던 '감추기'에서 보다 적극적인 '보여주기'를 택한다. 은유하지 않고 직유하며, 예시하며 비꼬고 과장하며 증명한다. 그래서 1편에서 '야후'의 전형성을 벗어나지 못하던 미개인간들의 모습은 2편에서는 전혀 다른, 충격적인 모습으로 변주되며 그것은 고스란히 냉전시대 거대국가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여러모로 68년의 흔적이 묻어나는 영화.
2편은 완파된 우주선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테일러의 동료 브랜트가 그를 뒤따라 미래 지구에 불시착한 것이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도드라진 오점이다. 브랜트의 등장은 내용을 보다 풍성하게 해 주었지만 이후의 속편에서 결정적인 논리적 모순들을 만들어 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의 포스팅에서 다루겠지만.) 그는 테일러를 찾아 원숭이 혹성에서의 모험을 시작한다. 테일러는 노바와 여행 중 실종된 상태이고 노바는 홀로 자이라를 찾아 가는 중. 브랜트는 노바와의 조우를 통해 자이라와 만나게 되고, 원숭이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었다.
고릴라들의 군사지도자 '장군'. 그는 인간들은 모두 죽여야만 한다는 극단주의자로 열렬한 선동을 통해 원숭이사회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병권을 손에 쥔 그의 드라이브에 원로와 평민인 오랑우탄들과 침팬지들은 불만을 삭이며 편승하는 것을 택한다. 영화 속에서 진보주의자로 표상되는 자이라는 그에 대해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만, 자이우스박사와 코넬리우스의 만류에 겨우 따라가는 수 밖에 없는 처지.
1편에서 사회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침묵과 억압을 택하는 사회 지도층으로 표현되었던 자이우스박사. 2편에서는 강성한 군사권력에 이끌려가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나온다. 그의 지도력과 원숭이사회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장군의 일방적인 요구에 부응할 수 밖에 없다. 박사는 자이라와 코넬리우스에게 장군에 대해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극중에 표현되고 있는 원숭이 사회의 전체 규모에 비해 고릴라부대는 너무 거대하다.
이것은 냉전시대의 사회상과 더불어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지점이다.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고 하지만, 실제 그들이 싸워야 할 적들 중 원숭이들에게 결정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종족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일방적으로 인간을 사냥하고 다니는 정도가, 1편에 이어 2편에서도 나타나는 고릴라들의 '존재 이유'이다. 그것도 훨씬 큰 살상수단을 지니고.
이쯤 되면 대충 각이 나온다. 원숭이들의 사회계율인 '법'은 인간의 보편적인 사악함을 규정하고, 그에 따라 군대는 인간들을 끝없이 사냥한다. 저항할 수단이 전혀 없는 인간들이지만, 원숭이들에겐 공포이다. 정상적인 판단을 지닌 자라면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턱이 없지만, 법이 그렇게 정했으니 인간은 사라져야 한다. 세계대전의 광기 속에서 유대인을 학살할 때 쓰인 나치스의 논리 그대로이다. 맹목적인 적개심을 부추기고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키는 이러한 선전 수단은 세계 대전 종식 후 미국에서 더 확장되고 다변화된다. 자, 이렇게 원숭이들은 곧 인간이다. 인간은 곧 원숭이이다.
브랜트는 그 장면을 본 후 자이라 부부와 만나 테일러의 정보를 듣는다. 잠시 뒤 그 자리에 나타난 자이우스 박사는 자이라의 태도에 대해 언쟁을 벌인 후, 인간과의 전투를 위해 자리를 비울 동안의 자신의 연구 책임을 자이라에게 일임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만약 금지구역에서 뭔가 발견하면 우리 문명이 발전할수도 파괴 될수도 있지 그걸 염두에 두게." 박사가 떠난 후 브랜트는 고릴라들에게 잡혔다가, 도주하는 소동을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고릴라군대의 훈련장면을 모두 목격한다.
그리고 종교. 1편에 잠시 소개가 되었던 원숭이들의 종교는 창조자인 그들의 신을 섬기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신의 가호로 군대의 승리를 기원하는 모습조차 인간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한다.(이 장면에서 침팬지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종교라는, 한편으로는 기만적인 선전수단이 전승을 기원하는 것은 현실 세계의 가장 그릇된 모순일 터이다. 이렇게 영화는 구석구석에서 비판의 칼날을 감추지 않는데, 심지어는 베트남전 반대시위에서 차용한 듯한, 반전시위대의 모습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종교 미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침팬지들은 이렇게 반전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간단히 진압되어 버리지만, 영화 말미에 찾아오는 파국은 이들에게 예외없이 닥친다. 전쟁을 부추기는 사회구조와 이념, 전쟁을 수행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의 대립의 결과, 그 피해는 누구에게 찾아오는지 이들은 증명한다. 영화는 이렇게 직설적으로 현실을 반영하고 비꼬고 있는데, 그들이 찾는 인간들은 더욱 기괴하다. 브랜트가, 그들을 만난다.
고릴라들에게 쫓겨 숨어들어간 지하 동굴은 옛 도시의 폐허였다. 그곳에 문명을 유지한 채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핵미사일을 종교로 모시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폭력이며 절대적인 권능, 곧 위대한 신을 표상한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인간들이 그를 종교로 모시는 아이러니는 절대적인 공포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복종을 택하는 인간의 속성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다. 그렇다면 핵미사일을 신으로 모시는 인간들이라고 정상일 턱이 없는데, 그들은 진화의 유산으로 초능력을 얻게 된 고도의 지적 생명체들이다. 그들은 텔레파시로 인간과 대화하고, 조종하기까지 한다.
브랜트와 테일러의 존재에 대해 심문을 하는 그들은 서로를 살인하게 만든다. 겨우 위기에서 벗어난 그들에게, 고릴라부대의 습격이 닥치고 영화는 거대한 결말을 향해 간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듯하다.
인간, 미개함과 고등함 사이
1편에서 드러난 인간의 모습은 원시 상태의 미개함이다. 그것은 원숭이들의 관찰대상으로 인간을 격하시키고, 인간이 고등동물로서 지금까지 저질렀던 여러 죄악들에 대한 역지사지의 기회를 제공한다. 동시에, 지구를 멸망시키고 타락하는 인간 문명의 부조리함을 꼬집고 있었다. 그것은 도저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인간들의 부도덕함에 대한 웅변으로 들린다. 그러나 2편에서의 인간상은 전혀 다르다. 훨씬 더 진보한 인간의 지적영역은 텔레파시를 통한 다중지능의 존재를 예감케 한다. 그들은 초능력으로 환각을 만들고 다른 인간들을 조종하기까지 한다. 그래, 다른 사람을 조종한다.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은, 모든 것이 적개심과 공포를 조장함으로써이다. 절대적인 가치로 존재하는 종교는 핵미사일이라는 절대악이고 스스로가 "평화적이고 진보된 방법"이라고 말하는 인간 조종은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세계에서 여러 강대국들이 사용하는 정치수단과 같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이는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그 힘의 존재만으로 다른 이를 조종할 수 있다. 이것이 영화가 주장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진화한 지적 능력은 다른 이들을 조종해 싸우게끔 한다. 이이제이로 상징되는, 수천년을 이어져 온 제국의 통치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미개함과 고등함 사이에서 수천년동안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타락한 채 지내야 할 운명이라고, 힘주어 그렇게 영화는 꼬집고 있다. 세계의 경계조차 희미한 오늘날까지 매일같이 근거없는 적개심과 공포를 확대 재생산하며, 군사력을 강화하는 인간들은 결국 지하동굴 속의 고등인류, 정글 속에 미개인류의 모습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 우려와 비판에 귀를 막은 채 각자의 목표로만 달려가는 우리가 맞닿을 결말 역시 영화와 다를 것이 없겠다는 것이, 영화를 보고 난 감상일 밖에. 희망의 열쇠인 자이라와 코넬리우스는 그들의 선택에 어떠한 권한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