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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Sep 15. 2022

홍차가게 소정의 사뿐한 여유로움

옥천, 대청호반

 홍차가게 소정에 도착하면 뜻밖에도 정겹고 그리운 물상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옛 버스정거장이라니. 그것도 말끔하게 관리된. 이런 풍경은 조금 멀리 시골로 들어가야 볼 수 있지 않나 요즘.


 가뜩이나 이곳까지 오는 길도 여유로운 호사다. 위쪽의 충복 보은에서 내려오는 길은 대청호반 도로고, 옥천에서 올라오는 길은 양쪽으로 가로수가 그득한 소로로, 사철 언제 오더라도 한적하게 오기 좋다. 소정이 자리잡은 곳은 대전에서 동쪽, 옥천에서 살짝 언덕을 하나 넘어가면 된다. 그 옥천은 대전시의 위성도시라고 할까, 행정구역상으론 충남도청 소재지였던 대전과 충북 옥천은 구분되지만, 어릴적 우리 가족은 옥천과 금산에 주말 나들이를 다녀오곤 했다. 아직까지도 위로는 금강과 대청호, 아래로는 큼지막한 산에 가로막힌 분지 지형으로 지역이 난개발될 가능성이 적어서, 어린시절의 향수를 지닌 어른아이인 나에겐 맞춤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 버스정거장 맞은편엔 정구장이 있다. 테니스장도 아닌 정구장이라니 세상에. 마침 우리가 방문한 시기가 햇살 좋은 5월인지라 초등학교 총동문회의 체육대회가 있었고, 그래서 왕복 2차선 도로 건너편으론 제법 왁자지껄한 흥겨운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런 소란스러움이 조금의 방해가 되지 않을만큼, 소정의 작고 낮은 문을 넘어서면 이곳은 신세계. 산을 낀 대청호가 저 멀리 내려보이고, 그 사이로는 간간히 채소밭. 그리고 홍차가게 주변으론 잘 조경된 꽃나무들이다. 그리고 마당 한가운데는 스프링클러가 빙글빙글 돌고 있어서 이 화창한 날의 풍경에 딱 좋은 치장이 되어주었다. 


 생각만 해봐도, 길 건너의 운동회 소리는 나무 잎사귀 사이로 바람과 섞여들고, 저 멀리는 한가로운 대청호의 풍경, 그리고 찍찍찍, 빙글빙글 돌아가는 스프링클러의 소리라니. 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란 말일까. 우리는 아이를 데리고 갔기에, 가게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차양 아래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아주 살짝 덥긴 하다. 그러나, 이보다 호사는 또 없다. 방 안에 갇혀서 창문의 프레임만으로 이 풍광을 보는 것보단,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봄바람을 즐기는 것이 훨씬 좋을 테지.

 아이를 내가 안고서 아내가 주문을 하고 자리로 왔다. 한동안 아이와 돌아주다가, 기회를 보아 아기를 안고 잠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본다. 과연 가게 안에는, 홍차에 대한 사장님 부부의 애정이 솔솔 카라멜향처럼 풍기고 있다. 1인당 8천원을 내면 온차와 냉차 중 하나를 택해 즐길 수 있는 시스템. 코로나 이전엔 스콘도 직접 구우셨다고 하는데, 이런 점은 뒤늦게 찾아오게 되어 아쉬운 점이다. 지금도 대전에 살았더라면. 


 그러나, 스콘은 결국 곁들이이고 중요한 건 홍차지. 나는 웨딩임페리얼을 시켰다. 카라멜향이 강한 맛있는 홍차다. 블렌디드티를 즐기는 건 아이 취향일까 싶다만은, 스트레이트보다는 이처럼 블렌디드티가 좋아서 거의 늘 카라멜향을 지닌 티를 찾는다. 아내는 크림 얼그레이. 가장 기본적인 얼그레이에 크림이 가미된 향일까? 사장님의 설명이 친절하고 여유로와서 더욱 좋다. 그리고 초심자가 와도 얼마든지 좋은 차를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반갑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작은 가게에 절반 이상은 비어 자리가 조금씩 여유가 있었는데, 실내를 잠깐 구경하고 나오니 주차장도 가득 차고 테라스 자리까지 가게가 꽉 찼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그러나 정성을 들이는 탓인지 차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실내도 살짝 구경하고 나와,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실내는 에어컨이 싱싱 나오는 편안한 좌식 공간이다. 노키즈존이 아니라면 아이를 풀어놓고 차를 즐기기 퍽 좋으련만은 아쉽다. 밖에는 자상한 사장님이 이따금 돌봐주시는듯, 길고양이로 보이는 아이들까지 서넛이 응달에서 봄바람을 즐기고 있다. 홍차를 기다리며 가게 주변을 한바퀴 휘 도니, 가게 옆 작은 집에선 고양이가 나무에 발톱을 갈고 있고, 화단은 더 넓게 펼쳐져 있다. 


 이런 공간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이런 삶을, 이런 공간에서 마치는 것도 퍽 아름다운 일일 텐데 말이야. 

 아름다운 풍광을 앞에 두고 드디어 홍차가 나왔다. 사실 다도라는 절차를 생각해 볼 때 티가 빨리 나오는 것도 좀 우습다. 주전자를 데워야 하고, 그 데워진 주전자에 물 온도를 맞추고 등등. 답답해 할 이유가 없는 것이 홍차이고 그런 기다림까지 티타임의 일환인 게다. 다행히, 소정의 홍차는 검증된 제품들의 품질 덕일까, 익숙하고 만족스러운 맛. 특별할 것이 없지만, 특별할 이유도 없는 맛. 웨딩임페리얼이 기대대로의 향을 풍기고 있다. 먼저 이것을 둘이 나누어 마시면서 천천히, 구름 한점 없는 하늘과 초록초록한 5월의 산야를 바라본다. 


 이때쯤 재미난 일이 있었는데 50대의 커플께서 우리 아이를 데리고 놀아주고 싶으시고 해 아이를 안겨드렸다. 유순하게도 우리 아이는 아주머니의 무릎 위에서 30분 이상, 아주 아주 편하게 잠도 자지 않고 놀아주었고 우리는 덕분에 평소보다 한결 편하게 차를 즐길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면서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염려 저런 걱정 끼면서 아이를 언제까지 키울 수도 없는 일이다. 


 아내는 태어나서 벌레라곤 없는 서울의 좋은 양옥에서만 살아본 사람이라, 이런 전원에서의 삶이나 거미, 나방, 개미들이 집 안에 침입하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아이를 기르고 있으니, 여름에 날파리만 보아도 야단인데 아이 덕분에 조금 더하다. 우리는 노후를 이야기하며 소정 같은, 바람도 좋고 경치도 좋은 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하지만 늘 벌레에서 막힌다. 그래서 남들 다 간다는 캠핑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저  깔끔한 숙소에만 찾아가는 중이다. 


 벌레에 벌벌 떨며 사는 아내와 그러나 우리는 벌벌 떠는 육아는 하고 있지 않은데, 매일같이 장난감은 닦아주어도 벌써 꽤나 무던해진 것들도 여럿 있다. 일찍부터 시작된 아이의 구강기가 심해 온갖 물건들을 물어뜯는 걸 보다보니 더 그렇다. 적당히 지지한 것은 깨물도록 둔다. 그게 아이의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으니. 


 하니, 원래는 함부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다른 사람 손에 아이를 맡기는 것도 이런 날씨에라면, 이런 경치에라면, 이런 맛난 홍차와 함께라면, 그냥 너그럽고 여유롭게 서로서로가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보내는 일인 것이다. 

 아이가 아직 아주머니의 무릎 위에서 노는 동안, 우리는 크림 얼그레이 냉차를 내어달라고 부탁드렸고 그것을 천천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50대 부부께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사진을 찍어드린 후, 마침 챙겨갔던 휴대용 인화기로 사진을 뽑아드렸다. 대단치 않은 호의요 답례지만 이런 오고감이, 버스정거장처럼 사람들의 오고감이 마주치는 홍차가게에서의 인연엔 딱 알맞다고 해야 할까. 


 이제 곧 가을이 무르익어가면 늘 홍차가게 소정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가장 아름다울 때, 소정에서의 풍경 또한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 붉은 황금빛의 홍차들처럼, 붉고 노란 가을의 산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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