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으로 괜찮았고 객관적으로 인지도 있는 세군데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 말을 속초에 들를 때면 실감한다. 10년쯤 전부터 거의 매년 찾고 있는 여행지라 시나브로 시나브로 바뀌는 그 풍경들을, 방문할 때마다 새삼스럽게 느낀다.
10년 전쯤에 처음 속초에 가서 붕포머구리회를 먹었을 때는 정말로 미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경험이었는데, 거기엔 나름의 맥락이 존재한다. 속초에서 물회를 먹기 딱 1년 전 강릉에서 처음 물회를 먹었던 일이다. 강릉에 오래 살고 있는 친한 형이 내 급작스러운 방문에 데리고가 준 집인데 그 물회의 맛이 심심하니 삼삼했다. 그리 대단한 경험이 아니었단 뜻이다.
왜 그랬냐면, 강릉의 장안횟집의 경우 그 지역의 근본 물회집이라 할만한데 오징어와 가자미 중 하나를 골라 심심하고 삼삼한 국물에 말아먹는 스타일. 나는 그렇게 대단한 인상은 받지 못했고, 나를 데리고 간 형님 부부께서는 미역국을 맛나게 드시며, 이 미역국으로 배를 데우고 물회로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속초 물회를 그 1년 뒤에 처음 접했을 때엔 정말로 신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장안횟집처럼 오징어나 가자미 중 고르는 것이 아니라 해삼과 멍게, 그리고 세꼬시 이 세가지가 어우러진 맛이라 자극적이고 색달랐다. 심심한 맛이 아니라 간도 제법 세고 시큼했다. 양도 무척 많았다. 지금에야 특별한 것이 없다는 소릴 듣는 집이지만 사실 봉포머구리나 그 청초수물회가 특별한 것이 없는 게 아니라, 10년 전엔 그것이 새롭고 신선한 것이었다. 비슷한 메뉴를 파는 곳들이 늘어나서 원조가 빛이 바란 것이다.
봉포 머구리가 원래 자리잡고 있던 옛 구옥에 방문한 것이 2011년이다. 그땐 동명항 위쪽 어촌동네에 건물에 정말 바글바글하게 현지인들이 몰려와서 먹던 집이었다. 그런데 불과 1,2년 사이에 청초호의 신관으로 옮기더니 거기에서 또 무지막지하게 사람들을 끌어모은 뒤 원래 고향인 동명항 윗자락에 건물을 세워 옮겼다. 청초호엔 청초수물회가 전복을 넣은 메뉴와 미관으로 대표 맛집 자리를 차지했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10년 뒤, 그 두곳에서 예전의 감동을 찾기는 어렵다. 봉포머구리집에선 청초호로 옮아간 2013년경부터 이미 외국인 노동자를 쓰고, 밀려드는 손님들들을 감당하는 것을 버거워하며 접객에서 어려움을 노출하기 시작했고, 손대기 어려운 반찬들이 많아졌다. 청초수물회는 메인 메뉴인 해전물회 중 전복을 전혀 즐기지 않는 내 식성 탓에 두어번의 방문에서 그냥 가성비가 아쉽다는 생각만 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서야 하는 투정이고, 지금까지도 1박 정도 일정을 잡고 갈 때는 무조건 물회는 봉포로 꼭 한끼씩은 먹고 오곤 했다. 일정은 한정되어 있고 검증된 맛집을 가는 게 순리이니, 다른 식당들을 굳이 도전해서 아쉬움을 남길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이번에 겨울에 속초에서 20일 가량을 머물면서 봉포와 청초수를 비롯, 다른 물회집들과 비교해볼 수 있게 되었고, 영순네 횟집에서 '다른 물회 맛집도 얼마든지 있구나'라는 체험을 실제로 해본 다음에야 우리 역시도 다른 물회집들로 눈길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번에 속초에서 삼일간 머물며 물회를 먹어보았는디,
영금정에서 80발자국가량 아래에 위치한 영금물회,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놀라운 수확이었다. 나에겐 미각의 새로운 지평이었고 다시금 물회의 매력을 일깨운 집이다. 이곳도 성수기에는 대기열도 생기고 나름 알음알음으로 알려진 집이라는데,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올라오기 전 마지막 식사를 고민하다가 잠시 검색을 해보고는 방문해보기로 해, 최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각종 리뷰 글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사장님이 대단히 친절하시다는 것이었는데 정말로 실제로 그랬다. 11개월, 한창 말썽이 극심한 우리 아기를 배려해서 테이블 위의 식초는 3배 제품이라서 절대로 아이가 손 닿지 않게 하시라고 따로 말씀해주시고, 아기가 다른 테이블에 달려들어가 식초통을 잡으려 하자 신속히, 그러나 사려깊고 조심스럽게 오셔서는 식초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을 주시는 두 사장님들. 어찌 그리 어투가 차분하고 조곤조곤한지, 맛을 보기 전에부터 잘 왔구나 생각하게 되는 곳이었다.
음식이 나온 뒤에도 거의 1분 가까이 우리 테이블에 무릎다리를 하고 앉으셔서 먹는 법을 하나 하나 설명해주셨는데, 또 재미있는 점이 회덮밥이 만원밖에 안하기에 만5천원 하는 보통 물회와 만8천원 하는 특 물회 중 고민하다가 특을 주문하자, 보통에도 특에도 전복이 모두 들어가는데 양의 차이일 뿐 구성은 다르지 않으니 그냥 보통을 드셔도 된다고 말씀을 주시는 이 사려깊음이란. 아니, 보통은 내 덩치만 보더라고 아 특을 드시는구나 하고 3천원을 더 벌 생각을 하실 텐데 말이다.
만원 회덮밥, 만5천원의 멍게와 전복이 들어간 세꼬시 물회. 그런데 양이 대단히 많았다. 정말로 정말로 많았는데 아침을 8시반쯤 먹고 12시 조금 넘어 도착한 우리 둘이서 이 음식들을 다 비우느라 퍽 힘이 들 정도였다. 가자미를 쓰지 않고 세꼬시용 잡어를 쓰시는듯한데, 그렇다고 해도 전복이 들어간 물회가 만5천원에 이 가격.
그러나 그보다 반가운 것은 명란젓을 비롯한 반찬의 구성이다. 도저히 밥이랑도 못먹을 짜디 짠 봉포머구리의 새우장 같은 반찬이 아닌 실용적인 반찬들에 저 미역국. 조미료를 거의 쓰지 않은 담백한 맛의 미역국이 정말이지 기대감을 높인다. 명란젓을 회덮밥에 넣어서 같이 비벼도 좋을 것이고, 생채를 넣어도 더 맛이 나겠다. 우리는 초행이라 정석적인 회덮밥의 맛으로 그대로 먹었지만, 다음에 방문했을 땐 명란젓은 넣어 먹어야 겠다 생각을 했다. 물회 맛을 천천히 보면서 나는 덮밥용 밥을 명란과 몇 술 먹었다.
그리고 아내는 천천히 물회에 육수를 붓는다.
"오..."
"참기름 향이 강하네."
"아냐. 참기름 향이 강한 게 아니라 소스가 심심한 거야. 야 이렇게 맛을 내는구나."
"맛있어."
"응. 봉포랑 청초는 간이 세니까 참기름을 넣어도 오히려 향이 묻히잖아. 여기는 간이 약해서 참기름이랑 멍게 향이 되게 잘 살아있네."
나는 샐러드에 드레싱도 안치고 잘만 먹는 편이라 재료의 원래의 맛을 굉장히 중요하시는데 다른 유명 물회집들과 달리 영금물회의 경우 물회를 한숟갈 뜨면 이건 멍게 물회인가 싶을 정도로 멍게의 향이 잘 살아있다. 그리고 참기름과 육수가 잘 어우러져 심심하게 숟가락을 끌어당긴다. 테이블 위에 설탕과 3배 식초가 따로 놓여있는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 원래부터 간을 심심하게 내니, 자극적으로 먹고 싶은 사람은 한숟갈 반씩 넣으라고 벽에 안내글이 붙어 있다.
사장님의 1분 가량의 친절한 안내멘트에, "육수에 물회를 버무리셔서 따로 먼저 맛보셔도 됩니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런 방침도 이해가 될 만 하다. 회가 맛있어야지. 그리고 회를 육수가 막 덮어버리지 말아야지. 가뜩이나 양도 많아서 배는 부른데 자꾸 자꾸 손이 가는 심심함, 그리고 원재료의 맛의 극치. 그러면서도 장안횟집의 물회처럼 특색이 없지도 않다. 전복이 오도독 씹히고 멍게가 쫀득하게 이에 걸리고 세꼬시는 바삭바삭 씹힌다.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은 상태에서 방문했는데도 허겁지겁 물회를 반씩은 비운 다음에 회덮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한주먹 가득 올라간 분량의 세꼬시를 젓가락으로 휘 휘 비벼 먹는 그 맛. 멍게 회덮밥이나 성게알 덮밥이 메뉴에 없는 건 약간 아쉽지만 선택과 집중 차원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게 만원이라니!
영순네 횟집은 지난 겨울 여행 때 방문한 곳이다. 그러나 영금물회와 더불어, 두 대표 물회집들과 좋은 비교가 될 것 같아서 지난번 방문기 내용을 조금 옮겨 적는다.
영순네는 전복과 해삼이 들어간 특물회가 2만원으로 청초수의 시그니쳐메뉴인 해전물회보다 싸다. 일반 물회는 1만5천원이므로 봉포의 기본 물회 16000원보다 또 싸다. 가게의 입지와 사이즈를 보면 충분히 알법한데, 전국구 대기업인 두 집에 비해 이곳은 콩알만 한 구멍가게다. 그런데 차를 대고 가게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들어와서 보는 것이 또 틀린 것이, 기계가 음식을 날라주는 앞의 두집과는 달리, 그리고 다른 수많은 물회집들과 마찬가지일 테지만, 점원분들께서 깔끔하게 복장을 차려입으셔서는 아주 빠릿빠릿하게 접객을 하신다. 식사 경험에서 접객이 차지하는 것이 적지 않음을 관광지에 오면 느낀다.
메뉴의 가격과 내부의 분위기, 그리고 알음알음으로 가게를 가득 채운 많은 손님들로부터 이미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기본 찬 역시 앞의 두집보다 낫다. 특히 이 미역국의 경우에, 따로 사진을 찍을만큼 맛있었다. 원래 물회집의 상당 지분을 이 미역국이 차지한다. 미역국이 이리 맛있으니 봉포나 청초수가 생각이 날 턱이 있나. 함께 깔리는 단호박찜, 꽁치졸임, 파래전 등 단순한 구색맞추기용이 아니라 하나 하나 제 몫을 하는 반찬들이 또 반갑다.
본론인 물회와 성게알비빔밥을 말하자면 둘 다 맛있게 먹었다. 양념장이야 시고 맵고 달고 시원하지. 회가 중하다. 1인분씩 시킬 수 있다는 점도 메리트인데, 사실 회전율이 높은 청초수가 해전물회를 2인분 단위로 끊어파는 것이 고약한 상술이지, 1인분으로 이정도 양에, 이 구성이면 더 할 나위 없다. 비빔밥에 성게알은 넉넉한데, 다만 겨울은 좀 쓴맛이 돌 때라고. 그래도 성게알은 성게알인지라 아내는 반드시 시켜서 싹싹 비운다.
그리고 뷰까지 이렇게 나름 갖추고 있어, 영순네는 그냥 단순히 맛있는 물회가 아니라 속초 느낌이 팍팍 나는, 옛날 봉포머구리집이 작은 식당이었을 경우의 향수를 떠올리게 해준다. 모듬 물회라는 그 정체성에 있어서도.
동쪽바다세꼬시는 양양에 위치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식당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둠물회가 아닌 가자미 단품 물회로, 역시 봉포머구리 식의 모둠 물회에서 비껴나 있는, 장안횟집에 가까운 스타일이면서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맛이다. 가격은 회덮밥도 물회도 모두 만6천원.
가자미 세꼬시가 넉넉히 들어간 회덮밥은, 왜 가자미가 사랑받는 생선인지를 알 수 있도록 달고 고소하다. 다른 모둠 물회에 들어가는 잡어 세꼬시랑은 격이 다른 맛이다. 게다가 이곳은 방송에도 여러번 소개되었듯, 직접 배를 몰아 낚시꾼들과 함께 가자미를 매일 잡아오는 곳으로도 이름이 높다. 직접 가자미를 잡으니 단가에서도 메리트가 있는 것이겠지. 그래서 양이 넉넉해 다소 높은 가격대에도 불만이 없다.
물회는 회를 무쳐서 나왔다. 이것이 동쪽바다세꼬시가 현대적으로 잘 어레인지 된 맛집이라는 인상을 강화한다. 그러니까, 이 물회라는 것이 막~ 엄청 연구되고 개발된 요리는 아직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회를 무쳐서, 그걸 물회를 하면 더욱 양념과 잘 어우러지겠지. 더 맛있겠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아직 이렇게 물회를 내는 집을 본 바가 없으니, 이 식당만의 특색이고, 연구의 성과라 할 만 하다. 그리고 여기에도 한 주먹 가득하게 가자미가 올라가 정말로 고급진 횟감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세꼬시 한상차림도 별도로 제공하는데 아무래도 이 식당은 그게 메인인듯.
조금 소소한 디테일로, 반찬으로 나온 부침개에 오징어가 씹혔다. 꽤나 따듯하고 맛이 있었는데, 이런 식당에서 원래 부침개가 맛이 있기 어려운 걸 생각하면 정말로 정성이 들어간 부침개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재미난 점은 뭐, 대단한 건 아니다만 가자미가 가득 든 수조를 가게 뒤편으로 나와 화장실로 이동하며 볼 수 있다. 뭐 횟집에 수조 있는 거야 흔한 일이다만 봉포나 청초수에서 그런거 이제 못보니까.
결론은, 이제 우리는 두 곳의 물회집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돈은 소중하고 물회는 비싸기 때문에, 한번 한번 방문에 신중 또 신중을 기하며 식당을 고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순네 횟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둠물회의 맛을 충실하게 그러나 더 만족스럽게 제공하며, 영금물회는 고전적이면서도 새로운 물회 장르를 경험해 볼 수 있고, 동쪽바다세꼬시의 경우 그런 고전적인 맛을 현대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되게 제공한다.
강릉, 속초, 고성을 통틀어 막국수라면 무조건 백촌막국수가 최고다. 백촌막국수 외에 다른 집은 그리 고려할 여지가 없다고 봐도 좋다. 그러나 물회는 그런 압도적인 집은 아직 없다. 다양한 장르가 열려있고 꽤나 다른 개성들을 지녀 모두 저마다의 맛과 멋을 뽐내니, 한번쯤, 짧은 일정에 구애받지 말고 보다 다양한 식당을 방문해보면 좋겠다.
우린 앞으로 그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