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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Sep 20. 2022

이 공간을 곁에 두고 싶다. 뉴욕커피상점

우수한 비엔나커피에 월등한 블렌드 로스팅


"여기 드셔보세요."

"엇. 어엇. 감사합니다."


 뜻밖의 목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비엔나 커피가 올려졌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사장님께서 서비스로 제공하신 것이다.


"어우 씨 우리 얘기 들으셨나봐."

"어차피 원두도 살 거잖아. 그냥 마음 편히 마셔."

"응 그렇긴 한데. 어유 거품 봐."


  나는 민망함에 목을 움츠리며 아내에게 말했다. 커피가 맛이 좋아서 가게에 눌러앉을 기세로 있다가, 이쯤이면 비엔나커피도 먹어볼 거라던 이야기를 하던 참. 


 나는 비엔나커피의 거품을 조심스럽게 티스푼으로 한술 뜬 데미타세 잔을 들어 후루룩 마셨다. 


 아 이거 참 좋구만. 이 공간, 곁에 두고 싶구만.


 이것은 지난 1월, 겨울에 있었던 이야기.



 겨울, 속초 반달살이 마지막 날에 우린 속초를 등지고 강릉으로 향했다. 여행 초기에 바깥양반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오빠, 강릉도 하루 가줄거지?"


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나는 그때 눈을 바짝 찡그리며 거부의 의사를 명확히 했다. 속초 반달살이잖은가. 속초에 무엇이 있는지 샅샅이 먼저 둘러볼 것이지, 와서 몇일이나 되었다고 강릉을 욕심을 낸단 말이냐. 


 바깥양반은, 뭐 진지하고 깊은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라서. 그리고 굳이 강릉에 가지 않아도 양양 고성 등등 내가 기꺼이 가줄 곳은 또 많은 탓에 내 말에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그리고 보름 여, 긴 시간을 속초 일원을 샅샅이 훑었다. 


 이쯤이니 여행의 마지막 날에 강릉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마침 일요일이다. 그 말인 즉슨 속초에서 굳이 강릉에까지 넘어와서, 핫플레이스들을 찾아가진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당일치기 일정, 게다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줄을 서가며 카페를 가진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강릉에 와서 일이 좀 꼬였다. 강릉에 와서 첫번째로 들른 식당이 칼국수집이었는데 50명이 넘게 줄이 서 있다. 젠장. 칼국수를 먹겠다고 이 겨울날에 저 인파라니. 


 그 다음으로 바깥양반의 초이스에 따라 첫번째 카페를 들렀는데, 우리가 즉흥적으로 온 것이라 그 뒤에는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해서 내가 한군데 카페를 찾아서 함께 가보았는데, 웬걸 전혀 바깥양반의 취향에 맞추기 민망한 노스텔지어틱한 카페였다. 나쁘다기보단, 우리 취향이 아니야. 


 그래서 카페에 앉아 급하게 지도 앱을 켜고, 왠지 "삘"이 딱 오는 곳이 있어 와봤는데. 세상에나.

 나는 옛 인사동의 카페 귀천을 기억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 초반, 군대를 가기 전까지, 독서토론 동아리에서 선후배 몇명끼리 조용하고 아담한 대화를 나누던 공간이다. 선배에게 이끌려 가서 어둑하고 좁디 좁은 공간에서 이것이 문화생활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런 탓인지, 아니면 내 원래 성격이 집돌이에 내향적이었던 탓인지, 나에게 카페는 귀천처럼 좁아야 마음이 편하다. 바퀴벌레가 틈새를 찾고 고양이가 박스를 찾듯, 구석탱이에 콕 박혀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것이 나의 카페 취향이다. 바깥양반과 정반대인 게 문제. 


 그런데 뉴욕커피상점에 들어서는 순간 딱 여기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첫번째 공간은 커피룸 이외엔 테이블이 딱 둘, 그리고 이 작은 공간에 복닥복닥하게 커피애호가의 눈을 즐겁게 하는 소품들이 가득하다. 


 미국식 팝아트와 체게바라가 마주보고 있는 유머러스한 공간구성에, 얼마나 부지런히 커피를 볶으시는 것인지 저 작은 커피로스터가 바리스타룸에 같이 놓여있다. 그리고 여러가지 원두가 구비되어 있는 것이 카페가 아닌 커피를 즐기는 곳이라는 확신이 단번에 들었다. 

 창밖으론 강릉의 언덕길인데 바로 구도심 카페거리에 접한 곳이라 제법 이 길을 지난다. 그러나 오며가며 차를 멈출 생각은 아무래도 들지 않았던 곳. 길 양쪽엔 허름한 건물들에 철물점, 페인트집 같은 것들이 깔려있다. 나중에야 알고보니 이곳이 요즘 강릉에서 쓴다는 무슨 교리단길인가 뭐신가라는데. 창밖의 풍경도 딱 좋잖아. 


 안에는 공간분할이 된 작은 방이 하나, 포토존 비슷하게 꾸며져있고 더 안에는 테이블 여섯개쯤 들어갈 공간이 나왔다. 지어진지 오래된 건물일 테니, 대강 보면 아마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메인 공간이 원래는 가게로, 중간 공간이 부엌으로, 그 뒤에 큰 방이 집으로 지어졌던 곳일 게다. 전체적으로 공간을 구경하니 어린 시절 살던 집이 떠올랐다. 한구석에 바리스타의 이력을 궁금케 하는 잡지가 눈길을 끈다.


"뭐 마시지?"

"샘플러 먹어야지. 넌 푸딩커피 마셔."

"여기 비엔나 맛집이라던데."

"난 바리에이션은 잘 안마시잖아."

 그리하여 서빙된 두개의 메뉴. 푸딩커피는 판나코타와 아포가토다. 아내는 커피를 못마시기 때문에 내가...대강 5.5샷을 마셔야 하는 상황이구나. 그리하여 홀홀 마시기 시작한다. 샘플러는 그날 그날의 원두 상태를 보고 바리스타님이 정하는 것인듯, 그런데 모카에 예가체프라니. 이거 재밌다. 


"이거 모카가, 커피 옛날 이름이 모카였잖아 모카항."

"응 알아."

"진짜 클래식한 맛이네. 재밌다."

"맛있어?"

"응 맛있어. 원두 살까? 이거 다 해서 얼마야?"

"11500원."

"헐. 진짜?"


 쓰면서 후미가 길게 남는 아주 클래식한 모카원두에 산미와 잡미가 거의 없는 예가체프를 즐겁게 마시고 나서 아내에게 가격을 물으니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이 날아왔다. 아니 나 지금, 5.5샷이잖아 이거 콜드브루까지. 그런데 그 가격밖에 안되나? 맛에 한번, 가격에 더 놀라 호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원두를 봤다. 


 저렴해. 


 이 맛에 이 가격이라면, 바로 사야지. 

"이따가 두개 사가야겠다."

"응 지문샘 것도 여기서 사면 되겠네."

"그래야지. 문 블렌딩을 파는 데가 다 있네."

"신났고마안."


 원두 메뉴판을 보니 마침 뉴욕 블렌드가 딱 내 취향이다. 두개를 사기로 했다. 그리고, 마음을 굳히고 자리에 앉아 5.5샷 분량의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이 바리스타님께서 비엔나 커피를 내어주신 것. 이런 감사하기도 하지. 와! 한 자리에서 6.5샷 달성!

 이날 뉴욕커피상점 이외에 세 곳을 다녀왔다. 둘은 아내의 취향대로 고른 한옥카페와 뷰카페. 하나는 내가 골라봤다가 실패한 구옥리모델링 카페였다. 


 사람들이 카페를 찾는 이유, 그곳에서 얻어가는 것은 저마다 많겠지만 이 바리스타가 커피를 사랑하는가? 아니, 제대로 된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드는 곳인가? 라는 질문을 해보면 그 많고 많은 카페 중에 커피를 사랑하며 즐길만한 곳은 생각보다 드물다. 


 그런데 이 작은 공간에 뉴욕커피상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알뜰살뜰 소품들을 배치해놓고서 이렇게 다양한 커피를 파는 곳이 강릉에 딱 붙어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인지. 


 대부분의 커피가 한잔에 5천원을 넘지 않는다는 점도 메리트. 그것이 이렇게 예쁜 잔에 서빙되어 나온다. 돈이 아니라 커피에 대한 애정이 빚어낸 잔들이다. 아내 취향에 따라 커피를 마시며 한잔에 6,7천원 하는 맛 없는 아메리카노를 꽤 자주 마시는 나로선 아무리 작은 가게여도 이정도 원두 라인을 구비하며 가격대를 책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게다가, 여긴 비엔나가 시그니쳐잖아? 근데 원두판매가 이정도로 짜임새있잖아? 원두를 따로 구매해가는 사람이 퍽 많다는 이야기다. 


 강릉에 오늘 오게 된 것은 하루 전 이루어진 즉흥적 결정, 그리고 오늘 뉴욕커피상점에 오게 된 것도 아주 제한된 정보만을 갖고 아슬아슬하게 결정된 일이었다. 강릉에 카페가 수백개가 될 텐데, 짧은 시간만에 자기 취향과 딱 맞는 공간을 찾는 것이 어디 쉬울까. 


 그러나 오늘 그 일이 이루어졌다. 나는, 커피의 맛이나 카페의 분위기나, 가격, 친절도 그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빠지지 않는, 무궁화 여섯개짜리, 별 다섯개짜리, 점수로는 100점짜리 내 취향의 카페를, 강릉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인데, 여기서 사온 뉴욕 블렌딩 커피를 내려 먹어봤는데, 정말 환상적인 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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