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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Dec 23. 2022

눈 오는 날 대청호, 롤라, 너에게 떡볶이는 무엇인거니

여기서 떡볶이를 시켜요?


"어, 저 이거 빌려가도 되는 건가요?"

"네 그거 가시기 전에 반납만 해 주세요. 벌써 하루 사이에 절반이 없어져서요."

"아. 아아. 아하아. 네."


  오전 10시 5분. 카페는 갓 오픈하여 빵을 구워 매대에 내고, 쏟아진 함박눈에 급히 대처하기 위하여 통행로에 박스를 까는 등 분주하다. 나는 짐을 풀고,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고, 아내가 주문을 하고 자기 블로그에 올릴 사진들을 취재하는 동안에 카페에 있던 산타 모자와 루돌프 머리띠를 빌려, 부리나케 밖으로 나왔다. 


 눈. 


 보기 드문 함박눈이 대전에 펑펑 내리고 있다.

 부부동반 모임이 대전에 잡혔다. 12살에 고향을 떠나온지 벌써 30년이 되어가지만, 1년에 서너번은 와서 벌초도 하고 차례도 지내고 제사도 하고, 그래도 아직은 어디 가서 대전 사람이라고 자칭 할 수 있는 입장은 되는지라 내가 길잡이가 되었다. 세 부부, 그리고 우리 아기를 데리고 여행할 코스를 짜보라기에 우선 동구의 대청호에서 중구를 지나 유성구로 넘어가는 코스를 잡았다. 


 여행은 시작부터 난관에 휩싸였는데, 중부고속도로를 탄 우리는 무탈하게 세시간이 다소 안걸려 약속된 카페에 도착했지만, 경부 고속도로를 탄 다른 부부들은 스트레스를 있는대로 받아가며 폭설로 인한 기나긴 교통체증을 겪어야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만 10시에 카페에 도착했는데 웬걸, 그때까지 눈이 전혀 내리지 않던 대전에 이제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몇 미터 앞이 눈에 가려 보이지 않고, 우리가 막 오른 언덕이 눈으로 인해 차가 오르기 어려워질 만큼.

 그리하여 신나게 아빠는, 아기를 데리고 눈을 구경시켜주고 난 뒤에 카페 안에 돌아왔다. 처음엔 함박눈에 신기한듯 웃음짓던 아이도 몇번 미끄러져 손에 냉기를 느끼고 아빠가 안아주지도 않으니 나중엔 겁을 먹어 울기 시작한다.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온풍기 바람을 쐬어주니 한동안은 그 앞에 두 손을 내밀고 바람을 쏘이다가, 이제는 자기 다리로 또 카페 공간을 쏘다니기 시작...하다가, 카페에서 전시해놓은 콜라병 높이의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고 뛰더니, 그걸 안고 그대로 넘어져서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눈 아래와 턱, 두 군데나. 하여튼 아이를 볼 때는 잠시도 방심하면 안돼.

 그 와중에 아내는 떡볶이를 시켰다. 떡볶이. 우리가 카페에 도착한 것이 10이고, 나는 오는 동안 미리 아침 끼니로 계획을 하고 챙겨온 베이글을 먹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배가 딱히 고프진 않았다. 반대로 아기를 보느라 베이글이든 뭐든 먹을 여력이 없던 아내는 배가 고팠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떡볶이를 시킬 줄이야. 여기에 다른 메뉴도 퍽 많던데, 너에게 베이글은 대체 무엇인거니, 하는 생각. 소울푸드라는 게 각자에게 의미가 있는 거긴 하지만 이렇게 불쑥 불쑥 의외의 판단을 할 때 조금 놀란다. 뭐 그런 것 치곤, 카레 향이 강한 것 빼곤 떡볶이는 꽤나 멀쩡한 맛이었어. 아직도 미친듯이 쏟아지는 함박눈을 보며 떡볶이를 먹는 게 나쁘지 않은 감상이다. 

 그런데도 또 한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또 이번엔 하늘이 개기 시작하더니, 12시가 되니 말 그대로 날씨가 "쨍"해졌다. 청명하디 청명한 하늘이 맑은 고기압의 한파와 함께 찾아올 준비를 하기라도 한다는 양. 다른 부부 중 한 팀이 도착했고, 그들과 함께 천천히 눈이 치워지길, 다른 부부가 식사 장소에 도착하길, 하늘이 투명해지길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 시골집이 이 대청호를 끼고 있어서 지도 앱을 켜 보니, 아래 대청호반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우리 시골 자락이 보일 성 싶다. 마침, 다른 부부 중 남편 쪽인 형님이 산책을 좋아하고 하여, 그래도 또 내가 길잡이를 한 김에 산책길을 좀 알려줬다. 이리로 가면 농경지 겸 산책로. 저리로 가면 죽 호수를 따라가는 큰 도로. 대청호에 카페가 생기기 시작한 초기부터 자리를 잡은 터줏대감이 저 앞에 삐죽 호수를 찌르고 들어가는 자리에 눌러앉아있다. 


 우리는 조금 경치를 구경하다가, 큰 도로보다는 아직 밟은 사람이 없는 눈 덮인 소로 쪽을 택했고, 나는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읊조리며 길을 잡았다. 저 아래, 마침 길이 연결되어 보이는 섬이 있어서.

 대청호는 박정희 정부 시기에 댐이 만들어져 생긴 인공호다. 카페 롤라에서 우리 시골집 방면, 그 가운데 호수 아래에는, 아버지의 외갓집이 물 속에 잠들어있다. 그리고 마치 그 마을을 그리기라도 하는듯, 카페에서 내려와, 아마도 예전엔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빼기였을 자리에 두개의 큰 돌무지들이 있어, 호수 가운데를 내려보고 있다. 


 나는 그 돌무지 옆에 서서 물 아래 아버지의 외갓집을, 그리고 바로 건너에 우리 시골집 자락을 바라본다. 저기 멀리에 학교도 보이는데 거기가 아버지의 모교인 것이고. 이쯤 되니, 눈이 그친 화창한 하늘이 고맙기 그지없다. 아직도 눈이 펑펑 내리는 중이었다며 여기까지 와볼 업무를 못냈을 것이고, 와봤더라도 우리 시골집 방향은 눈에 가려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무심히 찾은 곳에서 아기는 14개월 인생에 제대로 된 함박눈을, 아빠는 멀리 조망되는 우리 시골을, 물론 그 공간은 내가 어린 시절 뛰어다니기도 했던 길이다. 아직 도시화가 진행되기 전이라서, 내가 어린 시절엔 저 자락에 어린 아이들이 많이도 살았다. 그리고 엄마는 자기의 소울푸드인 떡볶이를. 


 여행의 시작에 나는 반가움, 그리움, 애잔함, 아이를 바라보는 여전한 행복, 이런 감정들을 가득 안고 호수를 한동안 내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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