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면 같기도 하고
양양에 가면 도토리막국수를 다루는 집이 있다. 막국수 자체의 퀄리티도 괜찮거니와 메밀면과 도토리면을 골라 먹을 수 있다는 메리트로 여름엔 꽤나 사람이 몰리는 집이다. 평상에서 먹는 자리도 있어 시골집 기분을 내기 그만이다.
밀가루로 뽑아낸 탱글한 면, 메밀로 뽑은 달달하고 부드러운 면, 고구마 전분을 섞은 쫄깃한 면. 각각의 개성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국수를 먹는 그 본령일 것인데, 이렇게 새로운 식감의 면을 맛보며 넓어지는 맛의 지평은 미식의 즐거움을 새삼 일깨우는 일이다. 도토리면의 그, 툭툭 부드럽게 끊어지는듯하면서도 또 부드럽게 혀에 감기는 맛이 말이다.
꼭 이 집이 도토리면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겐 그만큼 새로운 경험이었달까. 육수부터 면까지.
원미면옥은 대전에서 대청호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대전역에서 출발해 그 동쪽은 대청호로 인해 대전 서편의 유성구와 서구, 대덕구와 비교해 영 도시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인데, 그 덕에 옛 원도심의 모습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길목이 많다. 나에겐 이 길목은 우리 시골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고 여름이면 더위를 식힐 겸 야밤에 아빠와 함께 포도밭에 가서 약수도 마시고 포도 한상자씩 사오던 동네다.
대청호 방면으로 차를 몰다가 왼편으로 길을 잡아 작은 산을 넘어가면 우리 시골이 나온다. 그런데 해마다 그 꺾어지는 자리에 식당이 하나 생기더니, 몇해가 지나니 대전에 사시는 큰형님이 “저기가 여름이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어요.”라신다. 맛집인 줄은 알겠으나 우리야 늘 지나는 길목에 식당이 하나 생긴들 대수랴. 큰집에서 식사를 하든 시골집에서 식사를 하든, 이 냉면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생기지 않아 십수년을 그냥 지나쳐왔을 따름인데, 이번에 마침내 방문할 기회가 잡혔다. 대전 3대 냉면 중 하나라는 이곳의 맛은 과연, 어떨까나.
입구에 붙은 메뉴판에 가격을 수정한 종이딱지가 붙어있다. 최근의 물가 급등에 당연한 것이겠지. 그런데, 오른 가격이 8천원, 9천원인 게 놀랍다. 따로 육수를 내는 곳일텐데도 이 가격이라. 여행지로서의 대전의 장점이 드러나는 요소다.
대전을 흔히 노잼도시라고 하지만 사실 꽤나 매력적인 여행지다. 전국 어디와도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데다, 성심당을 기준으로 차로 20분이면 대청호에 닿아, 벚꽃철이나 단풍철에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인스타 감성이 넘치는 구도심의 각종 점포를 리모델링한 카페가 있는가 하면, 대전역 동부광장을 나오면 낡은 찻길 골목을 리모델링한 개성과 감성 넘치는 카페들이 넘쳐난다. 유성온천이 있어서 특색있고 질도 좋은 숙박업소들이 꽤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놀랍도록 물가가 저렴하다.
일자리가 없어서 청년층 유출이 심한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만큼 세종시와 정부청사 등 지역의 경제기반을 떠받치는 공공기관으로 경제순환은 그럭저럭 되고 있기 때문에 1박 정도로는 꽤나 알찬 여행 구성이 나올 수 있다. 차로 30분을 가면 동쪽에 옥천, 서쪽에 공주, 남쪽엔 출렁다리가 유명한 대둔산 등등. 그럼에도 대전이 노잼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근대화로 인해 형성된 새 도시이기 때문에 지역색 자체가 워낙에 얕은 것이 한 이유가 된다. 그 흔한 한옥마을도 없고 지역민들이 누구나 즐기는 소울푸드도 없는 것이 그로 인해 생겨난 문제점들인 것. 그러니 애꿎은 성심당이 지역 먹거리로 이름이 났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진짜로 성심당이 대전 사람들의 소울푸드는 맞다. 예전엔 대전에서 팥빙수를 먹으려면 모두가 성심당에 가서 줄을 서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원미면옥 역시 내게 그런 맥락에 자리한다. 어릴 적에 부모님과 자주 가던 소울푸드는 동학사 백숙, 구즉 도토리묵집, 소나무집 오징어찌개 정도. 그것 외에는 이곳 저곳 놀러다니던 정도지, 1953년부터 대전역 앞 원동 자락에 자리잡고 있던 이런 맛집이라고 해서 대전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이곳이 조금 더 알려졌다면, 칼국수나 두부 두루치기처럼 지역색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음식보단, 그래도 동네의 이름값을 하는 식당이 되고, 여행지로서 가치를 높여줄 수 있었을까.
헌데, 이 가격은 무엇이고 이 닭날개는 무엇이냐. 후끈, 하고 구미가 당긴다. 닭날개를 따로 판다는 것은 닭을 삶아서 낸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수도권에서 먹는 초계국수 스타일은 아니다. 을지로의 평래옥 스타일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게를 구경하는 사이, 음식들이 재빠르게 서빙되었다. 나는 온면, 그리고 아내는 냉면, 다른 일행들은 각기 다른 음식을 시키고, 만두도 하나.
냉면과 온면의 모양은 다르지 않다. 수북한 고면, 간장 베이스인듯한 국물, 비빔냉면에도 그렇고 닭고명이 솔찮게 들어가는데 에잉 이게 8천원? 이야. 굉장한 걸.
그런데 맛을 보니 더욱 굉장하다. 국물은 한 없이 삼삼하고 한 없이 밍밍하며 한 없이 간간하다. 그러니까 딱 육각형의 밸런스 모두를 꽉 채운 것도 아니고 적당히 채우면서 빈 자리는 남겨둔 맛. 계란 고명을 저리 많이 올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수북한 이유가 있겠지. 육수, 그리고 면과 잘 어우러진다.
일단 단점을 하나 꼽자면 닭을 삶아서 손질을 해서 고명을 장만을 하다보니, 쿰쿰한 냄새가 조금 난다. 집에서 백숙을 하면 나는 냄새인데, 익숙한 사람은 웃으며 먹을만한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굉장히 어색하고 놀랄 수 있다. 그것이 이집의 호불호를 만들 요소. 그것 말고는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런데 면이 놀랍다. 색을 보아도 식감을 보아도 순메밀면은 아닌데 식감이 뭔가 뭔가가 뭔가다. 도토리면을 생각나게 하는 탱글함과 부드러움이 살아있는 면발. 나는 이 음식이라면, 아니면 혹시 정말로 도토리면을 써서라도, 대전이라는 여행지의 대표 맛집으로써 손색이 없을 관광상품이라고 생각하는데, 마침 대전은 구즉의 묵집이 유명하기도 하다. 닭고기 육수는 냉면 중에서도 비주류이나 탁월한 면발이 합쳐지고, 게다가 놀랍도록 저렴한 가격이니 벚꽃철이든 단풍철이든 자꾸 찾아도 좋을만한 곳.
딱 보아도 파무침양념이 신선한게 매출과 회전율을 알만하고, 반찬은 무침 하나. 가격이 저렴하니 뭐 여러가지 반찬을 기대할 일은 아니다. 나는 일행들에게 닭날개를 주문해보자고 제안했다가 아내에게 단박에 커트 당했다. 닭고기 무침을 따로 내도 좋지 않을까. 냉면 육수에서 조금 튀는 백숙의 쿰쿰한 맛이 무침양념엔 잘 어울릴듯도 하다.
우리는 아기의 밥을 먹이느라 공깃밥을 하나 시켰는데 아이가 배가 부른 다음엔 내가 국물에 밥을 말아 자꾸 먹었다. 육수가 뭐랄까 심심하면서 입맛을 당긴달까. 물회에 밥 말아 먹듯, 면으로 배를 채운 다음엔 공깃밥으로 미지근히 육수를 데워가며 한술 한술 후루룩. 그만 여기서 과식을 해버렸다. 평범하긴 한데 그래도 돈이 아깝진 않은 만두와 함께. 아니 근데 정말. 구색으로는 만두보단 닭고기 무침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식사를 마치고 육수 단지를 구경하고, 또, 줄서서 먹는 맛집의 검증 요건인 커피머신까지 구경하고 배를 두드리며 가게를 나왔다. 어릴 적에 떠나온 고장에, 그것도 심지어 우리 시골집으로 가는 길에 이런 식당이 생겨서는 생전 맛본적도 없는 식당들이 야금야근 자리를 넓혀가고 있는 것을 또 본다.
이제는 내가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기엔 나이도 퍽 먹었고, 대전을 떠난지도 오래되었다. 앞으론 고향을 찾는 길은, 패밀리 어페어가 아니라 오늘처럼 관광, 가족여행, 그런 모양새가 되겠지. 그래서, 차곡차곡 여행지로서의 대전에 대해서 기억을 남길 작정이다. 내년엔 벚꽃 철에 아이를 데리고 오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