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트 3편보다 훨씬 이게 좋아요
전쟁과 핵무기가 없는 세상
21세기가 된 지금에 와서 반전 반핵은 다분히 정치적인 구호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전쟁과 핵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것임에도 그것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보수 기득권층의 노리개김으로 전락한 현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리즈가 만들어진 19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전쟁과 핵무기는 문자 그대로 존재의 위협으로 기능했다. 사람들은, 미국과 소련의 파워게임에 언제 어느 때에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늘 머리 한구석에 새기고 있어야 했다. 물론 그것은, 지독한 가난과 독재자의 권력놀음이 더욱 큰 존재의 위협이었던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겐 먼나라의 이야기였지만.
매일같이 하늘로 쏘아올려지는 인공위성들, 주변에 하나 둘 늘어나는 미사일기지와 핵탄두의 개발 소식을 들으며 서구인들은 무엇을 상상했을까. 세계대전이라는 전지구적 규모의 재앙으로부터 마악 회복되었을 참에, 베트남전의 참화가 반복되었다. 베트남전에 있어서는 철저히 가해자인 서구인들이었으나 눈 앞에 다가온 공포에 떠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있지 않다. 사람들은 고민하고, 구호를 외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영화 혹성탈출. 시리즈 최종작인 <Battle For The Planet Of The Apes>는 이번에도 정색하고 덤벼든다. 전쟁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직설적으로 인간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는 꼴이기도 하다. 최후의 반전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1편이 은유적인 연출을 택한 반면에 이후의 속편들은 모두 거침이 없다. 그리고 정직하다. 반전과 반핵을 외치는 영화의 진정성은 역사의 다원성에 대한 집착에서도 나타난다.
3편에서 처음 시간의 다원성이 언급되었을 때 그것은 단지 시공간을 뛰어넘는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열어, 극에 설득력을 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자이라와 코넬리우스가 떠나온 미래는 완전한 멸망을 맞이한다. 인간은 핵무기에 오염되어 숨어살거나, 완전한 짐승으로 유인원들에게 사냥 당하는 신세다. 결국 인간이 지금처럼 도덕적으로 타락한 채 달려간다면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미래라고, 조소하는 것 같지만 4편의 말미에서 시저는 스스로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증오를 거두어야 한다고.
그것은 다른 미래에의 예감이다. 유인원과 인간이 서로를 증오하는 미래. 타락하고 저주받아 함께 멸망하는 미래. 그것이 정해진 미래라면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터이다. 문제는 그 방법을 어떻게 찾아나가느냐 하는 것이고, 그래서 <Battle For The Planet Of The Apes>는, 그에 대한 결론으로 마무리지어진다.
유인원과 인간의 공존
시저가 이끄는 유인원집단이 유인원들의 혹성 탄생을 선포한지 680년 후, 유인원 현자는 그들의 역사를 들려준다. 타락한 인간 문명과 위대한 지도자 시저의 탄생. 머지 않아 인간은 핵전쟁으로 멸망하고 시저는 살아남은 이들을 모아 사회를 조직한다. 그 속에서 인간과 원숭이는 모두 조화롭게 살며, 원숭이는 원숭이를 죽여서는 안된다. 위대한 지도자가 이끄는 원시 이상사회. 그것이 인간 그 이후의 문명이다.
다시 20세기로 돌아와서, 그러나 그것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인간들이 핵전쟁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갈등의 불씨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인원 사회가 급격히 인간화하고 있었다. 종족에 따라 계급이 분화되면서 이질감이 커지고, 그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빈번해지는 모양새다. 또한 유인원과 인간 사이에도 완전한 수평적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거에 유인원들을 노예로 부리고, 지구를 멸망으로 몰아간 인간들의 '원죄'는 유인원들에 종속된 관계로 만들었다. 어렵게 일구어 놓은 그들의 사회에 명백한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지도자 시저의 법이다. 그는 절제와 인내를 갖춘 위대한 지도자. 고릴라 종족의 우두머리 알도의 저항을 억누르며 균열되어가는 사회를 잘 통제하고 있다.
인간은 증오스러운 존재다. 그것은 시저의 분노이다. 그러나 시저는 그 분노를 통제하고 사회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다. 조력자인 맥도날드가 그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는데, 파괴된 도시에 그의 부모인 자이라와 코넬리우스 부부의 자료가 남아있을 터이니 그로부터 답을 얻자는 것이다. 그에 따라 시저와 맥도날드, 유인원 현자 버질은 무기를 들고 멸망된 도시로 떠난다.
멸망된 도시에서 자이라와 코넬리우스의 자료를 찾은 그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핵전쟁의 참화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멸망되기 전, 정부조직의 '주지사'의 통제에 따르고 있었다. 유인원들에 의해 멸망당해 크나큰 증오심을 가지고 사는 인간들. 그들은 시저 일행을 추격하지만 결국 놓치고, 시저는 어렵사리 마을로 돌아온다.
그로 인해 유인원과 인간의 사회는 격변을 겪게 된다. 오염된 인간들을 직접 목격한 시저는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그들의 사회가, 하나로 힘을 합해야 한다. 그러나 고릴라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간과는 함께 할 수 없다. '의회'는 고릴라들의 폭거로 무산되고, 코넬리우스는 칩거한다.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고, 마침내 오염된 인간들의 복수가 시작된다.
원시 이상사회의 명암
그들의 세계는 공동의 노동과 합의가 준수되는 원시 이상사회를 닮아 있다. 그 사회를 이끄는 것은 시저라는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이다. 아주 초보적인 단계로만 나뉘어져 있는 사회계급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거두지 않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문명이 '인간'의 둘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들. 인간은 원초적인 폭력성을 가진 존재일까, 인간에 대한 대안이 되어야 할 유인원들 역시, 고릴라 종족으로 대표되는 폭력성과 호전성을 버리지 못한다. 시저가 갈망하는 조화로운 사회는 이러한 폭력성이 있는 한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지구 멸망의 원죄를 지고 있는 인간이지만 마찬가지로, 서기 3960년의 미래에서는 유인원들의 "본성"이 멸망의 원흉이 된다. 결국 원죄는 누구에게나 있다. 영화는 그렇게 하나의 가능성과, 하나의 위협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희망의 촛불을 뒤흔든다.
처음 혹성탈출 1편에서 보여주었던 미래는 인간의 문명을 그대로 답습한 유인원 사회의 야만성이었다. 인간을 극복하지 못한 유인원들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인간문명의 한계 또한 드러내었다. 그러나 영화가 연대기적 구성을 띄면서 그 주체를 인간에서 유인원으로 옮아오자, 그러한 인간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 자체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화두가 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영화는 강박증에 가까울만치 '대안'을 고민한다. 영화의 서두에서 시저가 유인원 현자들과 나누는 대화이다.
"버질,시간을 초월할수 있나요?"
"이런 전제를 하자"
"어떤요?"
"인간이 음속보다 빨리 여행 한다면 결국 빛보다도 빨리 갈수 있다"
"그래서요?"
"한 음악가가 수요일에 연주를 한다치자. 생방송으로 하기 때문에 다시 할수도 없는 연주야. 그럼 그는 빛보다 빨리 수요일로 가서 자기 연주를 들어볼수 있겠지? 그리고 자기가 하는 연주가 마음에 안들었다면 화요일로 돌아와 연주를 포기하는거야."
그들은 이렇게 현실을 부정하며 현실로부터 태어날 미래를 부정한다. 이 원시 이상사회는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의 시사점으로 남을 수 있다. 사회의 여러 모순이 노출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해답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시저는 끊임없이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때로는 목숨까지 건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영화의 끝에서 완연한 결말을 맞는다.
우리는 모든 폭력을 부정한다
유인원들만 교훈을 얻는 것은 아니다. 멸망을 경험한 인간 역시, 반성하며 폭력을 부정하기도 한다.
"주지사님,이 피의 악순환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A가 B를 공격하면 B가 C를 공격하고 결국 또 다른 D와의 희생자가 될겁니다. 서로 모른다면 이대로 살게 될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지금까지 인간사회를 멸망으로 몰고 온 그 폭력성을 스스로 극복하는 것만이, 우리가 공존공영의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방사능에 오염되어 어둠 속에서 살아온 인간은, 유인원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만큼의 교훈을 얻지 못한다.
이 사이, 유인원 사회에서는 두가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인간의 대안사회인 유인원사회에서 군사 지도자 알도가 시저의 아들 코넬리우스를 죽인 일과(할아버지 코넬리우스나 손자 코넬리우스나 이 이름을 가진 이들은 죽기 바쁘다) 인간들을 격리하는 일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부조리를 조금씩 깨닫는 사이에 원시 이상사회에서는 균열이 일어나고 잇다. 이렇게 교차하며 마주치는 인간과 유인원들의 모습은, 또다시 피를 부른다.
그러나, 그래도
그러나 결국 시저와 그의 사회는 이러한 결과로부터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다시 함께 산다.
"이일에 대해 우리가 감사해야 할까, 씨저? 우릴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겠나?"
"무슨 말인가?"
"우린 자네 종족이 아냐 우리만의 운명이 있어 동등하게 존중과 사랑으로 함께 살수 있는"
"사랑? 인간에겐 폭력과 죽음뿐이야"
"알도 역시 그랬잖아요, 씨저?"
"...버질,당신은 지혜로워요"
"당신도 지혜로운 왕이에요"
"우린 무너진 것을 다시 재건한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수 있을까,맥도날드?"
"가능하고 말고,씨저!"
인간에 대한 증오를 키워 왔으면서도 끝까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지도자 시저의 모습은,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진한 감동을 준다. 그의 고민과 대안을 함께 밟아나가며 영화를 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시저는, 인간을 위해 눈물 흘린 단 하나의 유인원이다. 그의 존재가 바로 인간과 유인원의 공존이다.
영화는, 이렇게 결말에 이르러 이야기한다. 다른 미래가 가능할 것이라고. 지금까지 인간 문명의 야만성과 잔혹함을 아낌없이 성토하던 우악스러움에서 벗어나, 진지하게 다른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그런 탓에 결말의 5편은,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다. 본편과 떨어진 외전, 혹은 에필로그에 해당할 수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것은 멸망을 지켜보는 일이지만 유인원의 입장에서는 절망의 미래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일이지만 인간과 유인원은 다르지 않다. 인간의 미래는 유인원의 미래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의 미래이다. 우리는, 모든 폭력을 부정해야 하며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일을 거두어야 한다. 핵무기와 전쟁의 가능성을 없애고, 다른 종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존의 길이다.
시저의 눈물을 기억하고 싶다. 인간을 위해 눈물 흘리는 단 하나의 원숭이. 우리가 원숭이들을 위해,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들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다면 우리는 또다른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맨디무스. . . 우린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해요"
"우린 아직도 기다리고 있단다. 씨저가 죽은지 600년이 지난 지금 인간과 침팬지는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면서 최소한 희망을 갖고 미래를 기다리는 거란다."
"그 미래는 누가 알수있죠?""
"죽은자들 만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