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증명, <포드V페라리>

각자의 욕망이 충돌하여 남기는 것은 뜨거운 스키드마크

by 공존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항상 삶의 근거를 우리 바깥에 확보해 두어야 한다. 그런 탓에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은 윌슨을 만들어 자존을 지켜냈고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뱀파이어들은 불사의 저주에몸부림치면서도 거듭 자손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피로 연결된 나의 가족이든 수 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든 나를 증명하는 것은 나 자신이기보다는 나를 둘러싼 관계망이다.


<포드V페라리>의 두 주인공은 각자의 이유로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 상태다. 미국인으로서 전무후무한 "르망 24" 우승자 캐롤 셸비는 심장판막이 손상되어 더는 레이서로 살 수 없는 현실에 겨우 적응해나가고 있다. 영국 참전용사 켄 마일스는 빼어난 드라이빙 실력에도 불구하고 자본권력의 독무대로 변해버린 자동차업계에서 꿋꿋하게 독립 메카닉 겸 레이서로 살고 있지만, 더는 버틸 수 없는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자신의 정비소와 레이서로서의 삶을 포기한다. 한편 그 반대편에서는, 권력을 쥔 자들의 "존재의 투쟁"이 가열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업체인 포드사는 경쟁업체의 거센 도전으로 심대한 위기를 겪고 있다. 사장인 헨리 포드 2세는 실적 그 이상으로 포드의 가치 손상에 분노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거장 엔초 페라리는 세계 최고의 차를 수공업으로 만들고 있음에도 파산한 상태다. "르망 24"의 연속 우승에도, 최고의 차를 만든다는 자부심에도 현실의 벽은 차디 차다. 셸비, 마일스, 포드, 페라리. 이들 네 사람 모두에게 말이다.


각자는 저마다 최고라는 자부심과 존재의 근거를 품고 있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홀로 완성시켜낼 순 없다. 셸비에겐 "팀"이 필요하고, 마일스에겐 차가 필요하다. 포드와 페라리에겐 명예와 권력을 뒷받침해줄 이 세계가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이고 흔적인 것이다. 이 영화가 빛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이들이 엮어내는 드라마가 레이싱의 속도감만큼이나 현란하고 엔진의 열기만큼 뜨겁다. 브레이크와 엔진오일이 되는 주변인물과의 상호작용도 매끄럽고, 이들이 모두 찰싹 달라붙어 함께 달려야 할 레이싱코스처럼 상황 설정이나 배경 묘사도 풍족하다. 넣을 것은 채워넣고 뺄 것은 상당히 과감히 쳐냈는데 포드사의 부사장과의 갈등이나 마일스 일가의 상호작용을 통해 드라마를 고조시킨 반면, 레이싱팀의 다른 인물들- 이를 테면 마일스와 콤비를 이룬 드라이버 등 서사에 소용되지 않는 주변부 인물은 등장시키지 않았다. 레이싱 그 이상으로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드라마에 충실코자 했고, 성공했다.


레이싱 장면의 쾌감은 굳이 말할 것도 없다. IMAX로 감상했는데 4D로 2회차 감상하고싶은 의지가 뿜뿜한다. 속도감과 무게감 가득한 화면 속에 크리스찬 베일의 고집스러운 영국인 연기가 빛난다. 신스틸러인 리오 비비 역의 조쉬 루카스가 극의 완급조절을 충실히 해낸다. 다채로운 화각으로 레이싱에 대한 몰입을 이끌어내면서 자연광 위주의 촬영으로 인물에게 깊이 몰입할 수 있게 했다. 모든 요소가 잘 어우러져 긴 러닝타임 내내 긴장을 유지한다. 마일스 부부의 케미가 또 매우 좋은데, 첫 등장씬은 물론 부부싸움조차 스릴을 준다. 똑똑한 연출이다.


깊이 있는 드라마와 주제의식, 그리고 레이싱의 긴장감과 후반부의 여러번의 반전까지 즐길 점이 수두룩한 영화. 그러나 다만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감수성에 내가 약간 적응을 못하는 것 같다. 에필로그의 감정묘사가 클리셰적이다. 드라마를 중시하는 감독의 성향은 잘 알지만 조금, 투 머치하달까. <3:10 to 유마>에서 보여준 정도의 여운이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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