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나, 세계
첫번째, 교사에게 적절한 글쓰기의 과제로써 "나"에 대해서 쓰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글쓰기는 무척 힘든 일이므로 글쓰기의 소용을 깨우친다고 해도 쉽사리 글이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도, 그것이 먹방 유튜브 촬영이라거나, 불편한 사람과의 식사가 되면 전혀 즐거운 일이 되지 않듯이, 글쓰기도 낙서하듯, 일기쓰듯, 편하게 끄적거리는 것을 넘어서 격식이나 목적, 공공성이라는 조건이 부여되면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런데 글은 그 자체로 공공의 것이라,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글쓰기는 고민이고 노동으로 남는 것이다.
글을 쓰고 글을 읽는 사람들로 만들어지는 언어공동체, 그 속에서 나를 드러내는 일을 버티어 내기 위해선 글쓰기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임을 알아야 하고, 그렇다면 아예 자기연찬을 위한 글쓰기로, 나를 이해하기 위한 글쓰기로 이 노동을 받아들인다면 글쓰기의 두려움은 덜어질 수 있다.
감상문 쓰기가 자기연찬을 위한 글쓰기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리뷰어들의 분석 영상을 보는 것은 그를 통해 깊이있는 영화에 대한 이해를 얻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영화를 보고 분석영상까지 봤으니,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한 상태이다. 만일 여기서 멈추면 우리의 자기개발은 멈추어 버린다. "더 나은 이해"를 내 머릿속에만, 감상으로만 남겨두고 그것을 하나의 독립적인 결과물로 만들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감상을 종합하여 글로 남기면 영화 리뷰에서 본 내용을 복습하는 셈이 되면서 나 자신의 감상과 그것을 결합, 비교대조하는 과정을 갖게 되니 단순한 리뷰영상 시청보다 훨씬 고도의 사고과정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영화 감상문처럼 모두가 즐겁게 찾아와서 보는 글이 또 없으니,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해나가기 바라는 사람이라면 도전해봐도 좋을 법하다. 또 영화리뷰처럼 내가 편하게 볼 수 있는 글도 없다. 영화감상문, 독후감, 모두 꾸준히 해 나가면 좋은 활동이다.
글쓰기의 입문 두번째는 에세이다. 말 그대로 일기처럼 자신의 생각을 비교적 자유롭게 서술하는 글이다. 피천득 선생님과 법정스님이라는 수필의 스승들이 우리 문학계에 계시고 수십년간 창의적인 다양한 수필작품들이 서점가를 점령해왔다. 에세이 역시 수 없이 많은 참고자료가 쌓이고 또 쌓여있다. 그러나 에세이가 나 자신에게 이로울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훌륭한 에세이들이 주는 위로와 공감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글이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가치로울 수 있을까?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이로운, 그러한 보편적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평범한 글은 나의 글쓰기 노트에 이미 수 없이 쌓여있다. 여기에서 한 층 더 나아가야만 나의 글쓰기가 이어질 수 있다. 보통은, 소득 없는 글쓰기 노동에 지치고 나가 떨어진다. 또한 내가 볼 때 서점가의 수 많은 에세이집들은 타겟이 명확하되 한정적인 편이다. 직장인의 현실이나 특정 세대, 특정 집단의 공감 소재를 글쓰기 하다보면 길은 언젠가 막힌다. 다른 소재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글은 다른 경험에서 오기에, 나중이 되면 글쓰기의 소재를 찾는 일이 글쓰기보다 중요해지는 주객의 전도가 이루어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가 생각하기엔 글을 오래 쓰려면 반드시 "보편성"에 입각한 글쓰기를 해나가야 한다.
저녁 8시 30분. 도심 방면으로 향하는 전철은 많지 않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고요하다. 이 시간의 전철이란 모름지기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것이므로, 거꾸로 도심을 향해 집으로 가려는 나는 한적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대편 전철 안에는 오늘도 한가득, 고단함을 양 어깨에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사람들이 있겠지. 그 인파에 실린 채로 집에 가지 않는 나는 운이 좋은 것일까. 머리를 전철 유리창에 비스듬히 기대고 잠을 청하려는데 케이크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퍼억. 쨍그랑.
그는 삼십대 후반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몸집이 작고 색이 바란 녹색 작업용 점퍼를 입은 남자였다. 엉거주춤 무릎을 구부리고 그는 바닥에 떨어진 케이크를 추스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떨어졌을 터인 쟁반은 본래 제과점에서 쓰이지 않는 쟁반. 다음 역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떨어트렸을 터인 그 케이크와 쟁반은 본래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에게 전해지기 위해 그 남자의 손에 들려있었던 것일까. 전철 속의 저마다의 사람들은 케이크로부터, 그리고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과일을 얹은 생크림 케이크는 전철 바닥의 먼지를 가득 묻힌 채 상자 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바로 옆 자리에 앉은 중년의 여성이 휴지를 건넸고 남자는 힘없이 받았다. 누군가가 먹다가 남긴, 이제는 먹지 못하게 된 케이크와 남자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이 한결같다. 사회면에서는 부의 양극화를, 경제면에서는 웰빙 히트상품을 보도하는 사회. 누군가가 남긴 케이크를 상자에 담아 어디론가 향하는 남자와 아무 망설임 없이 먹다 남은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는 사람이 한 지하철 안에 공존하는 도시. 혼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솟는 등록금에 신음하는 사이에도 매일처럼 술로 밤을 보내는 대학생활의 일말 속에서 나는 케이크를 남기는 사람인가, 아니면 쟁반에 담아 가져가는 쪽인가. 누군가를 위해.
건네받은 휴지로 바닥에 묻는 크림을 남김없이 닦은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출구를 향해 돌아섰지만, 조금 전 그의 온전한 보호 아래 있던 케이크와 상자는 무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구부정한 남자의 뒷모습이 케이크와 닮아 있었다. 낡은 작업복 점퍼의 그는 어디로부터 어디로 옮아가려던 중이었을까. 이 지하철 속에 우리는, 그러니까 케이크와 쟁반처럼 애초에 별개의 존재인 것일까, 제과점에서 함께 태어나지 못한 채 섞여서 만나다가 함께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마치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그 질문들이 하나같이 맵고 아픈 것이어서 그를 바라보는 삼삼오오의 눈빛들이 그리 쓸쓸했던 것인지.
나는 그가 홀로이길 바랐다. 케이크가 오로지 홀로인 그만을 위한 것이었기를. 남자의 집에서 어린 아이가 케이크를 기다리고 있지 않기를. 그가 던진 수많은 질문들과 함께, 그것은 하나의 절실한 바람이었는데 그러나 케이크와는 무관하게 나는 그가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가 행복하다면, 그날 그 지하철 속에서 그를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이 조금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칭기스칸의 아버지는 아들의 며느리가 될 먼 마을의 소녀와의 혼약을 맺고 오는 길에 독살을 당한다. 그리하여 어린 칭기스칸, 당시의 테무진은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잃고 수년간 인고의 시간을 거친다. 그런데, 이 독살에 얽힌 사연이 재미있다.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무리가 머무는 천막에 머물렀는데, 초원의 관습에 따르면 집의 주인은 방문자를 후히 대접해야 하고, 방문자는 집주인이 대접하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된다. 예수게이는 제법 큰 초원 유목민 집단의 수장으로 당연히 경쟁하던 다른 부족, 적대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원의 규칙에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보호할 것이라 굳게 믿었기에 사이가 나빴던 집단에도 크게 의심하지 못하고 몸을 의탁했던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자신과 가족 전체의 운명을 크게 바꿨다. 천막의 주인은 예수게이에게 음식을 권했고 그 안엔 치명적인 독이 듬뿍 담겨있었다.
사이가 좋지 못한 다른 부족의 천막에 머무르면서도 그들이 주는 음식을 기꺼이 받아먹을만큼, 칭기스칸의 아버지가 이 "환대의 규칙"을 굳게 믿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유목민이 머물던 몽고의 초원이 너무나 광대광막한 대자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 앞에 선 인간은 자연에 비하면 너무나 나약하고, 가진 것은 너무나 없었다. 초원의 유목민은 정말이지 가난했다. 쇠붙이 하나면 큰 재산이었고 칭기스칸은 나중에 평생의 라이벌이 되는 자무카와 어린시절 만나 동무를 맺을 때 선물이랍시고 흰 뼛조각을 주고받았다. 그들에겐 이웃이, 서로가, 자신의 존재의 바탕이고 근거였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환대란 절대규칙이었다. 나중에, 칭기스칸의 아버지를 독살한 집단이 아들에 의해 혹독하게 도륙당할 때 아무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환대의 법칙을 깬 비겁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멀고 먼 시공간을 넘어서 환대의 중요성을 다시 발견한 한 지성인이 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손에 꼽히는 한나 아렌트다. 아렌트는 유대인에 여성이라는 소수자, 약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전체주의와 홀로코스트라는 참극을 오랜 시간 탐구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전체주의는 정말이지 놀라울정도로 비인간적인 체제였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모든 수감자들의 존재는 소멸되었고, 이름은 번호로 대체되었으며, 총살이 예정된 날 수감자들은 제 발로 걸어 자신의 무덤을 판 뒤, 그 앞에 서 총구를 마주보았다. 존재의 소멸. 그리고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문명사적 격변을 마주하며 아렌트는 인간 존재의 신성함이나 절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대신, 그녀가 발견한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였다.
나치에 의해 유대인의 존재가 완전히 소거되었듯, 타인에 의해 누군가의 존재가 소멸될 수 있다면 반대로 타인에 의해 존재가 증명될 수도 있다. 이미 이성이나, 종교나, 우리의 존재를 증명할 절대성들은 모두 반박되었으므로 타인의 존재,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목격하고, 나와 상호작용한다는 지점은 매우 강렬한 존재의 증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일 서로가 서로의 증명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환대"하는 것. 두 팔을 미리 벌리고 타인을 언제든 맞이하고, 서로가 최상의 존재성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통하여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대의 법칙이 몽골 초원에서, 그리고 우리 나라의 "이리오너라"에서,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빈곤한 식탁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발견되어 온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아렌트는 그녀의 철학의 많은 부분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인용하며 표현했는데, 먼 옛날엔 그만큼 사회가 단순했기에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진리를 이끌어내는 일도 현대사회보다는 쉬웠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유지되어 온 이 "환대의 법칙"은, 즉슨 그만큼 인간의 본성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환대의 법칙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것은 문명의 발전 속도가 아직 자연을 극복하는데 미치지 못하였을 때,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성의 공포 아래 떨어야 했기 때문이다. 식량은 부족하고 사람들은 쉽게 죽어갔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아이, 하루 아침에 자식을 잃은 사람들을 저마다의 공동체는 끌어안았다. 그들은 커다란 환대의 울타리 안에 살았던 것이다.
현대사회에 환대는 여전히 유의미한가? 그렇다고 아렌트는 보았다. 이제는 자연이 아닌 기술과 사회구조가 인간을 압도한다. 억압한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톱니바퀴 앞에 인간이란 샅샅이 갈려 흩어지는 낱알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권력, 물리적 폭력 등 인간의 이지가 우주까지 뻗어나간 20세기, 21세기에 도리어 인간의 존재는 갈수록 나약해지고, 우리의 존재 감각조차 상실할 위기인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존재의 증명인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이 필요하고, 서로의 존재의 증명을 올바로이 하기 위한 공존의 방식 그것이 바로 환대다.
환대를 공동체의 원리라고 이야기하며 최근 퍽 우울한 사례를 한가지 들었다. 초등학교 학부모님께서, 자녀의 학교가 지난해 오전 10시 30분까지만 쌍방향 수업을 하고 나머지 수업은 모두 컨텐츠형 수업으로 해 수업 결손이 우려되어 학부모들이 쌍방향수업 시간을 연장해달라 학교에 요청했는데, 학교장과 교감이 도리어 학부모회장을 불러다가 학부모들의 여론을 무마해달라는 청을 했다는 것이다. 교장 교감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학부모회장은 그 말을 따랐고 그로 인해 다수의 학부모들은 집단행동의 동력을 잃었다. 단지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은 수업을 조금만 더 제공해달라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나에게 이 사례는 "환대"가 없는 학교조직의 문제로 읽혔다. 무릇 학교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며, 아이들의 존재의 밑바탕을 그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학교는 아이들도 환대하지 않았고, 아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한 학부모들도 환대하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절절이 끓는 가슴을 싸안고 학부모들은 모니터 앞에 지루하게 앉아있는 아이들을 걱정하며, 하루에 수십번도 더 폰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면 자녀교육에 있어서 환대는 어떨까. 다시 말하여, 존재의 증명 수준으로 아이를 환대하며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또 얼마나 그 드문 일인가. 아이라는 예측불가능성의 우주를 바라보며 부모는 가슴을 졸인다. 아이들의 존재를 그 자체로 사랑하며 장차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장차 아이가 어떤 존재가 되더라도, 우리는 아이를 사랑할 것인가? 칭기스칸의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지라도" 환대할 것이라 믿으며 그의 적수들이 모인 천막에 몸을 의탁했다.
그러니, 우리에게 몸을 의탁한 아이들을 기꺼이 환대하지 못하는 일은, 초원의 법도를 어기는 일인지도, 아이의 존재를 지우는 일인지도, 또, 그로 인하여 우리의 존재조차 지워내는 일인지 모르겠다. 세태의 탓을 한다지만 요즘 청소년들이 부모들과 대화하는 일이 드물다 하는데, 부모와 자식의 상호 환대의 관계가 청소년까지 또 성인까지 유지된다면 왜 부모를 아이들이 외면하겠는가 싶다.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면서 정작 아이의 욕구에는 무관심한 부모들의 사례가 우리 사회엔 조금도 드물지 않다. 부모를 환대하는 아이는, 아이를 환대하는 부모에게서 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아이를 속 편하게 행복하게만 기르냐는 말. 그러나 사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반드시 환대의 자녀교육이 필요하다. 아렌트의 철학에서 환대가 요구되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의 사회구조가 인간의 존재를 위협할만큼 거대하고 폭압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리어 환대를 못할망정 이 사회구조 속에서는 더욱 아이를 재우쳐야 한다는 논리구조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아이는 무엇을 자신의 존재의 근거로 삼을 것인가? 단지 성적표, 단지 학력, 단지 학벌. 그런 존재의 증명자들로 가득찬 세상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학벌만능, 능력지상주의, 자본제일주의.
환대가 자녀의 공부와 모순되는 가치인 것도 아니다. 아이를 얼마든 환대하며 공부를 이끌수도 있다. 한가지 방향으로 통제만 하지 않으면 말이다. 아이가 축구를 좋아하면 신체발달을 환대하며 그것에 충분한 열정을 발휘하도록 하며, 그와 더불어 독서를 권면할 수 있다. 요리를 좋아한다면 세계 여러 요리를 맛보게 하며, 그런 요리들을 더 잘 맛볼 수 있도록 미각을 익히고 외국어를 권장할 수 있다. 공부는 단세포적인 것이 아니다. 아주 단순한 반복행위로도 고도의 지적 성숙을 유도해낼 수 있다. 그것을 잘 해내고 말고에 자녀교육의 성패는 달려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아이의 어떤 개별 행위를 보고 그것을 고치고, 장려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이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공동체와 상호작용하며, 타인과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지를, 부모 스스로가 성찰하며 아이를 가르칠 일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고 삶의 양식이 될 때 아이는 기꺼이 타인을 환대할 수 있는 마음의 큰 터울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두편의 글은 보편성에 기반을 두고 내가 쓴 글이다. 위엣글은 스물여섯살에 썼으니 농담으로라도 잘 쓴 글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글쓰기의 방법론을 설명하기 쉬워서 제시했다. 두번째 글은 교사생활을 10년 이상 했고 대학원 공부로 전문성을 갖춘 상태에서 쓴 글이다.
이 두 글의 구조는 비슷하다. 글쓰기의 착상을 던진 어떤 "계기"를 서술하고, 그에 내가 느낀 "주제"를 제시한 뒤, "의미"를 해석해나가는 것이다. 첫번째 글과 두번째 글의 계기, 주제, 의미는 아래와 같다. 다만 두번째 글에서는 글의 접근을 다 쉽게 하기 위하여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의 사례를 먼저 들었다. 이런 글쓰기의 기교는 조금 더 글쓰기가 손에 익은 뒤에 가능할 터인데, 그건 그때 기회가 되면 이야기 하도록 하자.
1.
계기 : 퇴근 길 케이크를 떨어트린 남자를 봄
주제 :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소외
의미 : 자본주의에 포위되어 타인의 가난에 무관심한 공동체
2.
계기 : 학부모와의 대화에서 학교
주제 : 학교와 학습주체의 관계
의미 : 환대라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의 각성 필요성
사실 이 "계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글쓰기의 거의 교범과 같이 활용되는 방법이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 설명하면서 독자들에게 쉽게 글에 다가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누구라도 그러나, 이 계기에서 주제와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에는 어려움을 느낀다. "착상"은 찰나와 같이 흘러가는데다, 어떤 하나의 현상을 보편적인 인간 공동체의 문제로 끌어내는 것이 고도의 사고 혹은 아주 풍부한 경험을 요하기 때문이다.
교사의 경우 이런 계기를 만나기 매우 쉬운 직업이다. 교사에게는 매일 매일 "교실 현상"이라는 것이 밀어닥친다. 그것을 쓰지 않는 것이 낭비라고 느껴질법하게 말이다. 알기 쉽게 교사에게 이 방법이 어떻게 글쓰기에 활용될 수 있는지, 또 이런 글쓰기의 의의는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
교사에게 교실 현상의 주제와 의미를 글로 풀어내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주관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교사 자신의 감정 상태나 학생들과의 관계에 따라 눈 앞에서 발생한 일이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어떤 학생은 이쁘게, 어떤 학생은 밉게. 어떤 일은 납득할만하게, 어떤 일은 말도 안되게. 그러니까 예를 들어 "오늘도 아이들이 싸웠다"라는 계기를 설정해보자.
그럼 그 글에서 교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은 어려가지다. 아이들의 사회성, 아이들의 공부 강박, 아이들의 경쟁 스트레스 등등. 하나의 주제를 택해야 한다. 물론 "복합적 원인"이 주제로 제시될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코로나 이후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의 모습"으로 해보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 주제를 통해 내가 발견한 현상의 의미를 해석할 차례다. 내 생각엔 우리가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말릴 수 있는 것도 코로나 이후 아이들이 교실에서 마주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이들은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하고, 화해하는 법도 연습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의 이런 자연스러운 성장 자체가 멈추어있던 것이 코로나가 야기한 하나의 문제현상이다. 그러므로 교사인 나는, 이런 아이들의 싸움을 반갑게, 아니 반갑게라긴 뭐하지만 기꺼이 "깊이 탐구해야 한다." 그것이 학교교육의 원래 목적의 일부이고 교사인 나의 역할이기도 하니까.
이상, 의미 해석 끝. 여기에 두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 있다. 아니 셋인가.
첫번째는 늘 보편성을 생각하고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아이들이 싸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교사인 내 눈 앞에서 일어났으니 내게 불필요한 업무가 생긴 것이고 그래서 적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건 보편적이지 못한 인식이다. 그보단 보편적으로, 아이들이 싸우는 일을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보편적으로, 이 일이 갖는 의미나 시사점을, "나"보단 "공동체"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두번째는 절대로 타인에 대해서 의미를 해석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배 나온 부장, 침 뱉는 일진, 아 좋다. 그 사람들 꼴 보기 싫은 거 다 안다. 그러나 모두는 개인의 생애 맥락이 있다. 배 나온 그들이 뻘소리를 시전하는 것도 침 뱉는 그 아이가 또 담배를 피우다 걸린 것도, 내가 해석할 수 없는 다른 사정과 경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에 대하여 쓴다는 것은 첫번째로 윤리적이지 못하고 둘째로 쓸모가 없다. 타인의 내러티브를 말하고 싶다면 창작을 하면 된다. 내게 일어난 일은 타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겪은 이 일이 어떻게 타인에게 경험될지를 고려하며, "계기"로 활용하는데에 멈추어야 한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케이크를 떨어트린 남자>에서 과잉해석을 했다. 그의 작은 체구나 작업복은 관찰한 그대로지만 그렇다고 그가 가난한 사람일까? 그가 지쳐있고 힘든 삶을 이어갈까? 지금의 나라면 그에 대한 서술은, 스물여섯의 나보단 훨씬 절제하고 정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글 전체에서도 감상보단 사회현상에 대하여 집중했을 것이다. 글쓰기는 이런 겸손과 반성을 배워가는 일이기도 하다.
세번째는 의미 해석의 폭과 깊이를 넓히기 위한 다양한 독서와 성찰이다. 이건 당연한 이야기일 테지만 많이 보고 많이 써야 한다. 공부가 짧으니 보편적인 의미 해석이 되지 못하고 내 짧은 식견으로 해석을 한다. 다른 사람의 교실 현상에 대해, 다른 세계의 교실에 대해서 사고하고 그것이 어떻게 나의 교실과 보편적 공통점을 갖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다보면, 이제 글쓰기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진다. 충분히 관찰하고 성찰하고 글을 써보앗으므로 이제 넓이가 아닌 깊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