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밥집 소망식당
완도까지 가는 길, 여섯시에 출발해서 내가 운전하는 동안 무엇을 먹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휴게소에 잠시 들러 델리만쥬를 아내가 사와, 아이와 나눠먹은 게 전부. 그것 외에는 대개 음료로만 배를 채우며 왔다. 배를 타기 위해 완도항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은 두시다. 원래 예정에는 완도에 있는 괜찮은 중국집을 가볼 생각이었는데,
"해남에서 점심 먹자."
"응 괜찮지."
"그, 백종원 유튜브에서 해남에 고깃집이 나왔었거든 그런데..."
"응."
"점심에 육회 600g 먹는 거 가능?"
"뭐어?"
그것은 요즘 인심을 잃고 있다는 백종원 씨의 유튜브 채널 시장투어에 나온 집이 해남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내야, 워낙 고기는 좋아하니 해남에서 먹는 한끼를 반기지 않을리가 없지만, 문제는 메뉴였다. 제주도에 가서 한달 내내 돈을 써가며 외식을 충분히 할 텐데 해남에서 쇠고기를 먹어? 점심에? 아무리 저렴해도? 이런 고민들. 그래도 저렴하면서 가게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메뉴가 생고기인데 글쎄 점심에 생고기 600g이라...쉽지 않다.
"어 죄송해요, 오늘이 제사라 안열어요. 내일 엽니다."
"네에? 아 알겠습니다-"
"네네 내일 엽니다-."
그러나 상황은 쉽게 정리되었다. 확인을 위해 전화를 걸었더니 이번에 가보려던 한아름식당은 마침 명절 다다음날이던 그날, 제사라서 가게를 열지 않는단다. 아쉽게 되었다. 아내도 고심 끝에 점심 생고기 600g이라는 선택을 받아들였는데.
그래서 차선책으로 예전부터 봐두었던 식당으로 길을 잡았다. 소망식당. 해남읍내에서 대표적인 밥집으로 꼽힌단다. 이번에 네비에 검색을 해보니 광주점 오픈. 좋아 신뢰도 상승이다.
눈길을 뚫고 가게에 도착한 시간은 딱 12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하이고 길기도 길다. 두시간쯤은 제설조차 안된 고속도로를 달려오느라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었기에 몸에 허탈감이 제법 짙었다. 그러나 아빠는 쉴 수 없다. 예상 밖의 폭설에, 최근에 엔진오일을 갈 때 워셔액을 보충해주었다던 카센터에서 겨울용 워셔액을 넣을 생각은 못했었나보다. 워셔액이 열어서 눈길을 달리느라 앞유리에 덕지덕지 붙은 얼음가루들이 시야를 온통 방해해도, 그것을 닦아내지 못한채로 왔다.
가뜩이나 힘든 길인데 두배 더 힘들어지는 차량 컨디션 탓에, 식당에 내리자마자 정수기를 찾아 뜨거운 물을 담아 차로 달려갔다. 물을 좍 뿌린 뒤에 와이퍼를 두어번만 돌려서 닦아도, 거짓말처럼 깔끔해졌다. 이렇게 10초만에 해결될 일인가. 그러나 여기까지 사고 없이 온 것에 감사하자. 그렇게 차를 한번, 그리고 화장실을 한번, 오가는 사이에 아직 점심식사 시간이 되기 전이라, 홀에는 우리뿐이어서인지 이내 식사가 깔렸다. 찌개 하나에 돼지주물럭 하나, 그리고 깔끔하고 소담한 반찬들. 이렇게 2인세트가 2만5천원 가량.
찌개는 정석적이다. 잘 익은 신김치를 써서 시원하면서 개운한 국물이다. 돼지고기도 조금은 들어있어서 즐겁게 먹을 수 있다. 요일별로 된장찌개와 김치찌개가 나오는 날이 다르다는듯. 그런데 이 돼지주물럭이 놀랍다. 단언컨데 최상급의 돼지주물럭. 제육과는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될만한, 마치 쭈꾸미 볶음처럼 양념이 붙어있는, 국물없이 자작한 매콤달콤한 이 녀석.
지난 여름에 제주도에 와서 백반집 투어를 하면서 제육볶음을 한, 열군데 식당에서는 먹어보았다. 원래 평소에 제육볶음을 어디서 사 먹을 일이 잘 생기지 않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요리도 아닌 편이라 그렇게 제육볶음을 먹어봤어도 특별하다는 인상이나 감동을 받은 척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이 주물럭 때문에 또 오고 싶어질만한 집이다.
사실 백반집 제육이라는게 남자손님들을 위한 사료에 가까워서 맛있게 만들기보다는 딱 일정 수준에 맞추어 대량조리만 하면 되는 메뉴다. 그래서 급식처럼 멀건 국물이 밑에 깔리는 붉은 제육이 흔하게 나오는 것이다. 손님에게마다 따로 조리해줄 필요 따위 없어 큰 솥에 최대한 많이 때려박아서 넉넉히 조리해뒀다가, 사람들이 오는만큼 주면 되는 메뉴. 그래서 내가 제육을 딱히 즐기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소망식당의 경우, 고등어 반토막이 밑반찬과 같이 취급되는 수준으로 밀려나 있고 찌개와 주물럭이 메인, 그러나 찌개 역시 구색일 뿐이고 사실은 이 주물럭에 아마도 유일한 메인요리. 그러니 사실상은 이 백반세트의 얼굴이나 같다. 그래서 맛을 낼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만, 이 정도 고퀄리티의 주물럭이 양도 제법 넉넉하다. 아침을 굶고 장거리 운행을 한 보상심리도 곁들여, 순식간에 몇 젓가락 연속 입에 넣는다.
다른 밑반찬도 모두 맛있고, 솜씨도 좋았다. 두부는 큰 사이즈로 부친 것을 썰어서 양념을 살짝 올려 내었고, 약간이지만 박하지 무침도 나왔다. 피조개, 아니 꼬막은 특대 사이즈고 나물 세가지도 모두 맛깔난다.
재미난 것은 딱 이날, 한달 이상 정체기를 겪고 있던 아기가 손으로 밥을 열정적으로 퍼먹어가며 엄마 아빠와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간은 아이를 안거나 앉힌 상태에서 숟가락으로 밥을 입에 넣어주었고, 그것을 자기주도적으로 하고 싶은 아이는 자기가 하겠다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아이가 밥을 먹지 않는 행동에 퍽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이 식당에선 아이를 따로 의자에 앉혀두고 공깃밥을 추가로 하나 시켜서 주니 자기 혼자 숟가락도 안쓰고 열심히 손으로 퍼먹는다. 어묵볶음과 버섯나물 등, 몇가지 반찬 역시 꼼꼼하게 씹으며.
아이를 데리고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작은 칸막이로 방들이 구분되어 있는 것도 메리트다. 아이를 먹일, 고춧가루 들어가지 않은 반찬도 제법 되어 더 좋다. 새로운 미식이나 대단한 메뉴를 원하고 간 것은 아니고, 장거리 운전 끝에 궁여지책의 성격도 곁들여진 것이지만, 이쯤이면 퍽 보람찬 발견이라 할만하다. 다만, 계산을 할 때 보니 공깃밥이 2천원이었다보다. 아니 이건 좀.
해남은 우리에게 거의 미지의 땅인 말 그대로의 땅끝이었다. 최근에 완도에서 제주도 가는 배를 이용하게 되면서 해남을 몇번 지나쳤다. 그럼에도 그때마다 항구로, 혹은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바빠 머물다 갈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수준높은 식당을 한번 거쳐가보니, 해남이 확 가깝게 느껴졌다. 이런 솜씨를 가진 식당이 몇집쯤은 있을 테지. 그러면 뱃길을 오가며 지나쳐가는 곳이 아니라 이곳을 오롯이 즐길 그런 날도 생기지 싶다. 마침 5월쯤에 남해에 한번 더 오자 아내에게 말해두기도 했고. 그러니, 스쳐가는 외지인으로서가 아니라, 이곳 동네사람들과 한번쯤 같은 괜찮은 밥집을 들어보니, 이제 끼니 고민이 해소된 뒤에는 여행에 대한 생각이 난다. 어떤 식당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 숙소는 또 어떤 곳들이 있을지.
식사를 마쳐갈 무렵에는 우리 말고도 홀에 손님들이 꽉 찼다. 연령대도 다양한데 설마 이런 폭설에 해남, 여기까지 들어와서 식사를 할 사람은 없었을 테고 지역주민이 오며가며 찾는 식당같아 보였다. 포장 배달도 된다고 하니 편하게 와서 뚝배기 정식 등을 먹으러 오는듯. 물론 해남도 나름 관광지로서 메리트가 있으니 외지인들도 제법 찾긴 하겠다. 평일, 그것도 명절 연휴 바로 다음날 점심시간에 이렇게 많이 올 줄이야.
음식이란 게 뭐든 잘 만들면 맛있어지는 법이다. 돼지고기, 그중에 제육은 그러나 맛있게 제대로 하는 곳은 드물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음식이지만 잘 만들어 내는 곳을 방문해보면 확 하고 눈이 떠지게 되는 법. 나에게 제육볶음은 소망식당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할까. 물론 일반 백반집들에서 제육을 미리 넉넉히 만들어두는 편의를 부정할 수도 없긴 하지만 말이다. 나 역시 그것을 고려는 하되, 앞으로 제육에 대한 입맛은 조금 깐깐해질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