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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n 19. 2023

바보야, 문제는 교원정책이야

초등학교 교실의 소황제들과, 교사들의 현실 혹은 오은영 멱살잡기

 지난주에 고경력 초등학교 교사분께서 쓴 글이 주변에 제법 회자가 되었다. 교권붕괴, 아동학대법, 적대적 학부모문화 등을 경험한 글은 오은영 박사의 멱살을 잡고라도 묻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 되었다. 


 처음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두번째론 교사모임 단톡방에서 다른 친구가 올려서, 거듭 글을 읽고 느낀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게 오은영 박사 멱살을 잡아서 해결될 일일까?"였다. 글의 핵심 내용이 "어떻게 아동학대 방지법을 이용해 저마다의 아이가 소중한 학부모들이 교권을 붕괴하고 있는가?"인데 막상 결론은, 오은영 박사에게로 향하는 교사들의 적개심이니, 글쎄. 아동교육과 학교교육의 전문적 영역이 서로 다르고, 글의 맥락과 결론이 서로 다르고, 


 결정적으로, "우리 아이는 소중학고 존중받아야 해. 학대받아선 절대 안돼."라는 의식은 일종의 절대적 당위성을 지닌 명제다. "학부모님 아이들이 학교에서 적응도 하고 다른 아이와 어울리고 행동통제도 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라는 명제와 교환되거나 논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서두에 먼저 말하자면 나 역시 고등학교 교사로 한창 분주히 일하던 시기에 아이들의 허위 진술로 아동학대 혐의를 받아 형사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 전부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그 일로 장기간의 크나큰 스트레스와 경제적 고통, 아이들과의 단절을 두루 겪었다. 글 앞에서, 이제부터 내가 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교권붕괴의 현실이나 아동학대 방지법과 관련된 학교 현장을 잘 모르긴 커녕, 몸소 느낀 바를 중심으로 이야기 될 것이다. 

 

 첨언하자면 나는 출근 후 잠시 외출해, 학교 앞 자동차 정비소에 차를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무단외출중이던 여학생을 잡아서 학교로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긴 대화를 했고, 오래 봐서 잘 아는 아이였기에 외향적 성격과 경영학 진로를 원한다는 점을 고려, 스트리머를 해보라고 권했다. 그로부터 석달 뒤, 그 아이는 외향적인 성격을 살려 페이스북에 흡연과 음주를 인증하는 사진을 올렸고, 댓글로 그걸 지적한 나와 한바탕 싸움판을 벌인 뒤, 그 일로 앙심을 품고, 기획적인 허위진술로 학교 복도를 걷고 있던 것을 내가 끌고가더니 "여캠"을 권했다고 형사에게 무고를 하였다. 형사는 그것을 "통매음 권유"라는 아동학대 혐의로 엮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의 교권붕괴의 한 양상은 이러하다. 차량을 입고한 영수증과 아이와의 페이스북 대화 캡처 포함, 모든 증거가 완벽했기에 검찰은 무혐의 판단에 있어 나를 소환조사 한번 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아이의 무고와 형사의 실적 욕심에 길고 긴 고초를 겪었다. 형사님, 발은 뻗고 주무십니까, 예?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위의 내 경험에 대한 한풀이가 아니라, "아동의 권리 확보"라는 현상이 왜 "교권붕괴"라는 현상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 그 초등학교 교사의 글에 논리의 공백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해당 글은 그것을 학부모의 적대적 문화, 그리고 그 토양이 된 오은영 박사로 지목한다. 


 그러나 교권붕괴는 홍성 중학교에서 교탁에 누운 학생들처럼, 초중고 전체 단위에, 혹은 대학교에까지 유사하게 확산되어온 문제다. 오은영 박사의 아동교육론이 "멱살잡아 물어야할" 교권붕괴의 핵심 요인이라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역시 그러한가? 학부모의 교권 침탈은 오은영 박사 등장 이전엔 어떠했는가? 


 늘 제도와 정책에 대한 무관심은 곧 눈 앞의 현실 진단에 머물게 되고, 비판은, 구조가 아닌 사람에게 모아진다. 나는 자기 분야에서 나름 진심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개인에게 특정 집단의 비난이 가해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보단, 내가 경험해본 바, 아동학대 방지법과 학교정보공개, 학부모 참여 등 다양한 제도적 변화에 따른 학교 내 권력 분점, 교사의 권위 해체에 비하여 교사의 전문성을 보호하고 신장하며, 교육의 지속성에 기여할 교육활동의 안정성에 민주당 정부든 보수당 정부든 하등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즉, 문제는 오은영 박사도 아동학대 방지법도 아니다. 문제는 교사를 공공부문 노동자로서 정부의 통제 아래에 두고 싶어하고, 정부에 쏠릴 비판의 화살을 "경제 실패는 교육의 실패, 사회 불안도 교육의 실패"라는 프레임으로 교사에게 돌리려 하는, 전통적이고 부도덕한 역대 정부에 있다는 점을 나는 말하고자 한다. 

 

 보수적 정부는 기본적으로 노동자를 억압하려는 성향을 갖는다. 민주적 정부는 기본적으로 권력 분점 구조를 만들려는 성향을 갖는다. 이 양쪽 정책기조가 합쳐져, 교사는 정부로부터 억압을 당하기도 쉽고, 그나마 갖고 있던 콩알만한 학교 내 권한마저 빼앗겨만 왔다. 민주당 정부의 경우 학교를 민주적으로 만들려는 목적만 두었지, 그 안에서 전통적으로 지켜져 온 교육의 근본 특성-전통에 대한 존중, 교육의 절대성, 교사를 통한 교육과정 설계 등-에 대하여 큰 고민 없이 정책을 이끌어왔다. 


 그러하니, 국민들에게 총알받이로 내세울 공무원들인 교사는 담임교사 수당 13만원, 부장교사 수당 7만원이라는, 실제 발생하는 노동소요를 고려했을 때 최저시급보다도 못한 돈을 받고 굴림당하고, 수시로 교육권을 침탈하려는 시도에도 저항하지 못하며, 그로 인해 마침내는 적지 않은 교사가 면직을 택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교사의 면직과 그로 인한 교육공백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정부로서는 상당히 파렴치한 스탠스인데, 백년지대계라면서요, 국가의 핵심 사무잖아요. 근데 교사 양성과 임용을 개인의 선택에 떠넘기고 선발시험 한번으로 떼우니, 빠져나간 교사들은 다시 채우면 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교육 공백은 기간제 교사들로 학교에서 알아서 떼우고, 이 과정에서 전문성 있는 미래 교사들이 잠재력을 펼치지 못하든 말든, 그저 그것은 개인들이 알아서 교직에 비집고 들어올 문제이니, 정부당국은 관심도 책임도 없다는 것 아닌가? 


 실제로 아동학대 방지법 관련 사안에서는 각 관련 주체들이 다양하게 얽혀서 이익에 따른 행동을 한다. 불쌍한 지역 장학사는 학교에 명령권도 없이 민원의 창구 노릇만 하기 때문에 해당 사안을 조사하고 보고하느라 불려다니는 일 자체에 그로부터 발생하는 스트레스에 비하여 아무런 효능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경험을 실컷 한 사람들이 교장 교감이 된다. 그럼, 당연히 이 사람들은 교장 교감으로서도 같은 반응을 한다. 수동적으로 절차를 주관하는 입장만 취할 뿐 문제에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는 관성을 뚜렷이 보이고, 그러한 관성은 승진체계를 거치는 동안 학습된다.


 아동학대 범죄 수사로라도 실적을 채우고 고과를 평가받아야 하는 형사들은, 당연히 교사들을 잡아먹으려 안달이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해도 일단은 송치할 수 있는지 가능성을 진술서 안에서만 찾아낸다.적어도 내 경험엔 그랬다. 이 과정에서 각 시도교육청의 교권보호 담당관이나 자문변호사에게 문의를 해도, "법이 그렇고 절차가 그래요..."라고 대답을 듣는다. 징계를 받는다. 소청? 전문성 따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귀찮은듯이 와서 대강 서류를 읽고 자기 예단에 따라 판단한다. 적어도 내 경험에 그랬다. 그리고 그런 교사를 보호할 노동조합도 없고 현장 인력도 없다. 민주당 정부에서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라도 해결해줬어야하지 않나. 


 교사는, 철저히 개인 단위로 분해되어 양성되고, 임용되고, 부림당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역시 따로, 처분된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거대한 교원정책의 근본적 문제이고, 멱살을 잡혀야 할 건 아동교육 전문가인 오은영 박사가 아니다. 양 당 정치인들, 노동전문가들, 교육학 전문가들, 일부 사법 담당자들이다. 나는 더욱이 그래서 원 글의 글쓴이의 고통이나 경험에 대해 깊이 공감하지만, 개인에게 적개심의 화살을 돌리는 태도에 반대한다. 문제는 초등학교 교실에만 있지 않다. 문제는 우리 교사들 모두에게 닥쳐오고 있다. 문제는, 모든 교사를 관리하고 보호하여,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애써야 할, 정책의 철학적 공허함과 적대적 노동관에 있다.


 곧 선거는 다가오고 반복되는 레파토리처럼 약간의 공무원 봉급 인상이 공약되었다가, 또 몇년 봉급 동결로 되갚음받을 것이다. 각자도생 소사이어티에서, 교사는, 보호받는 경험 따위 조금도 얻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교실 문을 또 열겠지. 그런 우리의 불안함이나 학부모들, 그리고 아이들의 불안감도 같다. 언제 어떻게 불행이 찾아올지 모를 두려움으로 학교에 가는 건,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들 자신일 거라고, 학부모들은 교사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교사와 학부모 양자의 상충하는 불안과 두려움은 제도의 빈곤과 정책 책임의 부재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교사인 우리의 탓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들의 탓도 아니다. 


 남의 멱살 말고 우리가 서로 손을 잡자. 교사끼리 모여서 이야기하고 대책을 이야기하는 편이, 분노와 함께 사직서를 써내려가는 것보단 누구에게라도 훨씬 좋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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