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존 Jul 25. 2023

그저 양심에 호소한다: 무너진 학교, 법률가의 칼 앞에

사람은 죽었고 피는 흘러 맺힌다.

 민주주의는 피로 이룩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아동보호법. 전국의 교사들에게 심대한 고통을 주는 이 법은, 정인이와 같은 무수한 아이들의 피로 인해 점차 강화되어온 길을 겪었다. 지난날까지 큰 문제 의식 없이 오가던 말과 행동들이 이제는 하나 하나 아이들이 감각할 정서적 상처까지를 폭넓게 인지하며 철저히 아동을 보호하도록 점차로 법 적용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교사들은 사소한 말과 행동마저 학부모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법 적용이 강화되는동안 교사의 권한은 축소되어왔다.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학생인권조례가 아니라 핸드폰이 불러온 사회변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아이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면서 수업 때 딴짓을 하고, 시시각각 학교 상황을 공유하며 교사의 개인정보를 엿가락처럼 가지고 놀고, 그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올바로이 인식하고 교정해주어야 할 학부모들은 핸드폰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보다도,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편익이 너무나 크기에 굳이 핸드폰을 이용해 교사를 들볶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카톡 프로필 하나 마음대로 못하는 현실을 교사들이 인지하고 차츰 적응해가는 사이, 핸드폰이 불러온 사회변화는 너무나 빨리 교단을 바꾸어놓았다. 생각해보자. 체벌금지의 직접적 계기가 된 오장풍 사건 역시 아이가 핸드폰으로 찍은 동영상으로 인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민주주의가 피로 이룩된다면, 아동학대법의 확대 적용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교사들의 피눈물 또한 지금 교권보호를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되는 흐름으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의 고통은, 목숨은, 그와 같이 공리주의적으로 교환가치로써 논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동학대를 방지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먼저 세워져 있었고, 그에 맞추어 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학교 교육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어느곳에서도 큰 관심은 없었으며, 서이초 선생님 사건과 앞뒤의 동시다발적 교권침해 사건들이 집중된 맥락이 교권보호에 대한 경종을 울리게 되었음을 나는 말하고싶다. 슬프게도 우리는 여러 동지들의 희생으로 앞날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서 비로소 바뀔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 존재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문화의 변화, 제도의 변화, 총체적인 사회변화에 비하여 우리 학교교육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취약한 구조를 그대로 유지해왔다. 거의 200년 전 학교 구조와 교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공교육을진데 말해 무엇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는 그 어느 시대에나 산업의 효율성 이상의 목적으로 운영되어온 바가 없다. 의무교육도 교육복지도 결국에는 행정가와 기업가의 계산이 끝나 만들어진다. 왜 교육청들은 무상교복을 도입해놓고 5년째 교복지원금을 고정해놓고 있는가? 5년 사이에 아이는 줄고 물가는 지속적으로 인상하고 있는데 말이다.


 오늘의 학교교육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마치 아파트 대단지 한 귀퉁이에 구색으로 세워주는 임대아파트처럼, "룰"을 주무르는 강자들이 타고 올라가야 할 교육의 사다리에, 마치 들러리처럼 다수의 아이들과 교사들이 매함께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모양새로 보인다. 이미 초등학교에서부터 사립과 공립으로 나뉘는 현실에 글쎄, 대학 혹은 그 이후까지 공정이라는 것이 기능할 여지는 있을까. 돈이 없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블라인드니, "대회" 문구 삭제같은 요란법석을 떨고는 그들만이 타고 오를 수 있는 동앗줄은 따로 놓인다. 정순신과 이동관의 아들은, 과연 학교교육의 덕으로 명문대를 갔을까.


 그리고, 용골이 부러져버린 배처럼 형해화된 학교에서 교사들은 이익만으로 교실을 바라보는 기득권들에 의해 아이를 끌어안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는 신세로 남았다. 왜 학교교육은 지금까지 이 모양일까. 왜 교육을 이처럼 방기해두고 있는가. 무너지는 교육현실, 고통받고 신음하는 교사들과, 다수의 아이들을, 왜 이대로 둘까.


 서이초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안타깝다 생각하던 차,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공부하는 도반의 분노에 찬 톡이 대학원 동기들 방에 울렸다. 나는 아이를 보느라 글 한 줄 올리기 어렵도록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다른 도반들은, 참담함을 곱씹으며 서이초에 직접 추모를 다녀왔다. 나 빼고 우리 대학원의 동기는 모두가 초등학교 선생님들이다. 그리고 나는 서이초 선생님의 소식을 곱씹으며 같은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왜, 이런 엉망인 학교 현실은 바뀌지 않는가.


 아동학대법처럼, 어떤 법이 생기는 것에 이유가 있다면 어떤 법이, 생기지 않는 것에도 이유란 건 있을 것이다. 학교교육이 이처럼 교권과 함께 무너진지가 수년이 되는데 왜 바뀌지 않는가. 학교교육을 이토록 엉망으로 유지할 때 갖는 어떤 다른 이익은 있지 않을까.


 학교교육이 엉망인 틈을 타서 누군가가 경쟁의 사다리를 보다 쉽게 오른다면 마찬가지로 학교교육이 엉망인 틈을 타, 누군가는 자신의 아이들을 보다 쉽게 컨트롤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의 행동은 부모의 예측범위를 손쉽게 넘기고 어떤, 불이익이 발생했을 때 학교교육이 엉망인 틈을 타, 그 불이익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하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겐 충분히 합리적이다. 200년 묵은 낡은 구조, 70년 전 대한민국에 거의 누더기 상태로 성립되어서는 역대 정부에서 충분히 보완되지 않은 한국의 학교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먹는 것은 어떤이들에겐 충분히 훌륭한 행위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학교교육을 결정적으로 망치고 있는 것은 아동보호법을 포함한 다수의 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자신들의 교육에서의 기득권을 결사적으로 지켜내고 있는 법 전문가들, 민주당과 보수당 양당에도 공히 널리 포진하고 있는 이들이다. 이미 수많은 교권보호의 외침이 입법부와 행정부에 닿아 서울시에서는 지난해 교권보호조례가 입안되었으나 10달째 계류중이다. 법안이 계류되는 동안에도 정순신처럼 개인의 법기술과 재력을 총동원해 학교교육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시도는 다수의 법률가들에 의해 계속되어왔다. 한 변호사에 의해 학폭 징계에 맞선 소송이 시작되고 법기술이 정립되고선, 거의 금과옥조처럼 법률가들이 널리 이것을 따라한다. 교육은? 이 법률가들에겐 알 바가 아니다. 애초에, 돼지들에게 걸려있는 진주목걸이와 같은 것이니 말이다.


 아동학대범죄의 적용에 있어서 교사들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져있는데도 용케 교실을 먼저 빨리 빠져나온 학교장과 장학사, 교육장, 교육감들은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넘어서 무언가를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교사를 보호하려는 시도가 그들에게도 법률의 마수가 뻗치게 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다는 것처럼. 교육청도 학교도, 어떤 다른 행정기관도 교육정책의 최전선 실무자인 교사를 보호해줄 깜냥을 내지 못해왔다. 왜, 그들은 학부모들을 교장실이나 교육감실로 끌고와서 교사들 들볶지 말고 내게 말하라는 호통 한번 치면 죽는 병이라도 있는 걸까. 물론, 학폭만 하더라도 징계권자는 학교장이다. 학교장에게 소송이 걸리고, 패소시 비용도 학교장 개인이 부담한다. 교육청은 학교장 역시 보호해주지 않는다. 학부모에게 소송이 걸리면 학교장역시 교사와 다를바 없이 날개 잘린 모기 신세밖에 되지 않는다.


 이토록 날카로운 법률가들의 교육농단에, 이토록 우스꽝스러운 현재의 학교제도에, 그래, 살아남아서 애들을 가르친다고 교사는 꿋꿋이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생계를 꾸린다. 교사들의 일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한편의 아이들로 하여금 오르막길을 올라 골을 넣게 하면서 다른 한편의 아이들로 하여금 내리막길을 손쉽게 달려 골을 또 넣도록 하는, 웃기지도 않은 넌센스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하면서 법과 핸드폰 앞에 발가벗고 뜀박질을 하니,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운동장부터 평평한 곳으로 옮겨야 할 텐데 글쎄, 힘을 쥔 자들이 그걸 할 거였으면 진작에 교사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였겠지. 선택받은 소수가 망가진 학교제도를 박차고 날아오른 반동으로 그때마다 남은 아이들과 그들을 끌어안은 교사들의 영토는, 갈수록 좁아만진다. 한 사람이, 거의 수직으로 치솟은 뱃머리에서 바다로 거꾸로 뛰어내렸다. 그로 인하여 조금 가벼워진 뱃머리는 몇뼘, 아래로 가라앉으려 하고 있으나 우리는 결코 여기서 멈추어선 안될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무너진 학교를 바로세우는 것. 바로 세워진 학교에서 아이들을 학대와 고통 없이 기르는 것. 단지 그뿐, 당연히 이루어져야 마땅한 그 일 뿐이다. 단지 마땅한 그 일을 하자고 교사는 법이 아닌 그저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보야, 문제는 교원정책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