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시 특별편
태풍이 온다고 해서 전날부터 걱정과 함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걱정이란, 당연히 뭔 재난 상황에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며 마음의 준비란, 이틀 동안은 숙소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각오다. 아침이 되니 남해엔 이미 태풍 영향권이라 비가 내린다. 다행히 바람은 아직 불지 않는다. 아이가 깨어 맘마를 달라고 해, 나는 전날 사온 잔멸치를 볶기 시작한다. 아이는 식탁 의자에 앉혀 영상을 보도록 하고. 아 물론 아내님은 주무시는중.
어린이집에서였던가, 반찬 중에 아이가 멸치볶음을 잘 먹는다. 그래서 봄에 멸치볶음을 한 통 가득 만들어놨더니 이번 여름철이 되어서야 거의 다 소진되었다. 아이 반찬이라 웬만하면 우리가 손을 대지 않은 탓도 있고, 영 멸치볶음만 먹인 건 또 아니니까. 그러고보니 아이가 미역국도 좋아하는데, 여기에서 머무는 일주일 사이에 미역국을 할 여유가 될지는 모르겠다. 간소하게라도 한끼 정도는 밖에서 사먹기로 했고 머무는 숙소에 조리용품은 완비되어 있는데 조미료가 단 하나 없다. 남해 미역으로 굳이 여기서 미역국을 끓이겠다고 마늘이며후추며 간장이며 다시다며를 사기보단...올라가는 길에, 미역 한두룸이라도...아...그러기엔 또 집에 이리 저리 들어온 미역이 아직 퍽 된다. 더 열심히 미역국을 해먹어야겠다.
더불이 이녀석은 요즘 들어 아빠가 상에 올린 열무김치를 빼앗어먹기 시작하더니만, 이제는 숫제 김치 내어노으라며 서툰 발음으로 "김치- 김치-" 한다. 그런고로 우리 따님께서는 남해 멸치와 더불어 할머니의 열무김치로 매 끼니마다 호식. 아이 그릇에 넉넉히 담아준 밥을 성심 성의껏 열심히 먹어준다.
치앙마이를 다녀오고, 어린이집을 쉬면서 바이오리듬과 수면패턴이 많이 흐트러진 상태라 아침도 평소에는 엄마아빠와 함께 8시 이전엔 먹던 아이가, 여행 동안에는 10시나 넘어서야 겨우 밥을 조금 얻어먹는다. 미안한 마음도 적지 않지만 여행에 와서는 우리도 미뤄둔 일을 모조리 밤 늦게나 할 수 있어 다 함께 자는 시간이 늦다. 빨리 방학이 끝나고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 아이가 원래의 생활리듬을 되찾고 다시 끼니마다 밥을 잘 먹을 수 있도록 해야겠지.
아이를 밥을 먹이고 조금 놀아주고 있으니, 아내가 위층에서 내려온다. 비가 와서 오늘은 외출을 줄이기로 하였으므로, 아침은 전날 장을 봐 온 우삼겹을 굽고 비빔면을 했다. 시어머니의 열무김치를 종종썰어서 넣어줬더니 이 편식쟁이는 자기 딸만큼도 김치를 먹지 않는다.
"넌 어릴 때 채소 안먹고 컸어? 아버님 어머님께서 식습관 교육을 안해주셨나?"
"어릴 땐 먹었지 다."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지만, 아~무래도 아내의 편식은 문제가 있다. 그걸 뜯어고칠 수는 없다만 건강히 살아야 할 것 아니겠니.
아이는, 밖에 나가지 못해도 신이 났다. 내가 거꾸로 들고 놀아주자 신이 나서 또 또 해달라며 달려들고는, 내가 잠시 설거지를 하는 틈을 타 엄마 앞에서 스스로 물구나무를 서겠다고 애를 쓴다. 이 팔팔한 녀석을, 한 순간 실수로 계단에서 구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쿵 쾅 소리가 들려 뛰어가니 아이는 내 바로 앞에서 바닥에 철퍼덕.
얼마나 놀랐을까 하며 아이를 바로 끌어안았는데, 뺨엔 찰과상이 생겨있고 놀란듯 크게 운다. 안아주고 달래주니 울면서도 대답을 똑부러지게 하기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목이라도 부러졌으면, 머리라도 깨졌으면. 방금 전까지 물구나무를 서며 개구지게 놀던 아이를 가슴에 묻을 뻔 했다. 복충 숙소를 빌려서는 3일간 매 번 계단에 따라다녔지만, 아이가 하루에 수십번을 오르내리다보니 우리가 모두 신경을 쓰지 못한 틈이 만들어져버린 것이다.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아내와 같이 다짐을 하고선, 겨우 겨우 아이를 달래 잠을 재웠다. 정말이지 놀랍게도, 아이는 잠시 계단을 겁내더니, 몇시간 지나자 아빠의 조심하라는 당부에 "응!" 하며 다시 제 발과 제 손으로 계단을 오르고, 내린다.
아이의 생명력도, 긍정성도 모두가 놀랍기만 하다.
가보기로 한 식당이 한군데 있어, 차로 20분 정도를 달렸다. 남해의 길은 단순하다. 높은 산 사이 사이로 좁고 구불구불한 길들이 대부분 외길이다. 그래서 한두번만 달려도 네비를 찍고 가지 않아도 된다. 남면의 주란식당. 9천원에 반찬이 뻐드러지게 나온다. 계산을 하고 영수증을 받으니, 이걸 들고 가면 옆에 있는 유자 특화 카페를 20퍼센트 할인해준다고 한다. 예정이 달라지긴 했지만, 백년유자란 곳에 가서 회황찬란한 유자음료들을 맛보고 나왔다. 들어가면 세가지 음료부터 테이스팅을 하게 해주시는데, 키즈케어존임에도 아이를 데리고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주고 아이를 위해 카스테라며 우유며 따로 챙겨주셨다. 와 전문가 포스의 사장님 짱이야!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스산해져가는 바람을 지켜보며 우리는 잠시 남해스러운 여가를 보냈다. 강렬한 향을 풍기는 유자 하나로 모든 것이 남해스러워졌다. 평범한 아침 밥상도, 아 그래 남해 멸치가 있었군. 계단에서의 까무라치게 놀랄만한 사건도, 스르륵 녹아내려간다. 모든 게 다행이다. 다행이다. 함께 있어서 다행이다.
늦도록 늦잠을 자 팔팔해진 아이는, 밤이 깊도록 잠에 들지 못하며 제 아빠와 엄마를 괴롭힌다. 나는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며 아이를 재운다. 자기를 그리는 줄을 알아보고 아이는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