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갔다.
아내는 일어나서 남해읍의 김밥집에 전화를 걸었다. 먹고픈 김밥집이 있었는데, 전화를 받은 사장님은, 태풍 탓에 오늘은 가게를 쉰다고. 이런! 나는 조용히 아내의 낙심한 미간을 보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전화를 걸었다. 코앞의 서면에, 괜찮은 밥집이 있다.
"나 김밥 사러 갔다 올게."
"어어? 김밥집이 있어?"
"어. 여기 바로 앞에."
"오."
이건 나의 지독한 로컬 편향적 여행습관 탓이다. 메뚜기 성향의 아내완 달리, 나는 어딜 가면 그 동네를 한가로이 걷는 걸 좋아하고, 그 동네 사람들이 가는 식당이며 카페며를 먼저 챙긴다. 이미 숙소 근처의 동네 밥집을 챙겨두었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 조만간 가야지 생각중이었고, 오늘이 그날이네.
마침, 태풍은 남해를 할퀴지 않고 지나갔다. 다만 비를 제법 뿌렸는지 어딜 가나 물이 위협적으로 흐른다. 나는 조심히 차를 몰아내려가 식당에 당도했다.
남해읍에서 멀지 않은 서면의 한 식당. 여기에 나문희 선생님과 박근형 선생님의 사인이 있다. 호기심이 들어 소풍? 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코로나로 인한 극장가 한파를 둟고 최근에 크랭크인을 한 영화라고! 야! 여기 오길 역시 잘했다. 평범한 동네 밥집에서 나문희 선생님과 박근형 선생님의 흔적을 구경해본다. 작성된지 3개월 밖에 안된, 이렇게 싱싱한 사인이라니.
한줄에 3천원, 김밥은, 무난한 맛이다. 뭐어 대단히 맛난 걸 기대하겠나. 지나치게 얇지 않으며, 그 안에 깻잎에 오뎅에 맛살에 햄까지, 재료가 넉넉히 들어가 있어 가격에 비해 아깝지 않다. 조만간에 아내와 여기서 아침을 먹기로 했으니, 그때 제대로 맛을 보기로 하고 훌훌 김밥을 받아 밖으로 나온다.
작은 동네여도 있을 것은 다 있다. 모퉁이의 천장이 낮은 집은 간판은 잘 보이지 않아도 미용실이다. 몇번 지나는 동안엔 문이 닫혀있어, 안을 볼 수 없었는데 김밥을 받아서 차로 가는 사이에 문이 열려있는 것을 힐끗 보니 안에는 사장님과 손님 한분이 머리를 말고 계시다. 태풍이 지나긴 했어도 이 날씨에, 용하기도 하셔라.
낡은 동네를 지나는 것은 이런 즐거움이 있다. 55년 묵은 양조장이 있다. 여기서도 내일은 막걸리를 사보기로 했다. 북카페가 있고, 비건 카레집이 있다. 맘스터치도 있다. 아이들을 그래도 둔 집이나, 여행객들이 들르나보다.
작은 남해의 동네를 돌아보며, 천천히 거닐며, 그러나, 집에서 김밥을 오매불망 기다릴 아내를 위해서 길을 서둔다. 동백이는 아침에 벌써 밥을 한가득 먹여두었으므로, 김밥 세줄과 라면 1인분이 오늘 우리의 아점이다. 저녁은 뭐를 먹게 될까. 나는 동네를 둘러본 뒤 다시 차에 오른다.
다행히, 낮잠까지 한 숨 자고 나니 다시 화창한 푸른 하늘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우리가 있는 숙소가 좀 좋다. 6박에 70만원 조금 안되는 가격인데 에어컨 최신식에 보일러도 뜨거운 물이 펑펑이며, 편의시설이 잘 구비되어있고 무엇보다도 언덕배기 위의 집이라 뷰가 무척이나 좋다. 광양만을 끼고 저 너머는 여수다. 여수밤바다가 밤마다 내리깔린다. 그래서 차를 타기 전, 차에서 내린 다음, 이 풍경을 슬그머니 보는 것도 재미다.
그런 하늘 풍경 아래, 어제 죽을뻔했던 딸네미와, 가슴을 쓸어내린 아내는 함께 카페에서의 여가를 즐긴다. 브레드 멜이라고, 이름을 들어보면 뭔가 이그조틱하고 어센씩한 그런 카페인데 멜이 여기 말로도 멸치거든요. 브레드멜은 그러니까 멸치빵 카페...네?
다행히, 빵에는 멸치가 들어가지 않는다. 다만, 여기의 뭔 또 특별한 메뉴라고 보리커피라고 파시는데...음...엄...콜드브루로 내리신듯한데...음...엄...다른 음료 드시는 걸로. 빵은 특색있고 맛있었다. 인테리어도 예쁘장하므로, 보리커피를 마시는 무리수만 범하지 않는다면 넉넉히 들러서 여유를 가질만하다.
개인적으론, 우리나라에서 커피로 뭔가 시그니쳐함을 내보고 싶다면 그 생크림 좀 그만 올리고 이상한 가루 그만 뿌리고 그냥 네추럴 프로세스드 원두 잘 골라서 커피에서 체리맛 딸기맛 느껴지는 걸로 콜드브루를 하거나 하면 딱 좋겠다. 진짜로 괜찮은 네추럴 원두는 콜드부르를 만들면 기분 좋은 딸기맛이 커피향에 섞여든다. 관리가 좀 어려워서 그렇지만, 고객 대부분은 그때 그때 와서 맛을 보기 때문에 제품의 편차도 전혀 모를 텐데.
동백이는 태명이 그래서 그런가, 꽃을 좋아한다. 이제는 그냥 자기가 꽃만 보면 달려드는 수준이다. 카페와 식당 사이, 잠시 물배와 밀가루배를 빼겠다고 남해의 남면을 한바퀴 느적하게 걷는데, 아이가 이리 저리 걸으며 세상 모든 방향으로 포인팅을 하다가, 마을에서 꾸민듯한 너른 꽃밭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꽃을 열심히 꺾는다.
다행히도 이 꽃밭에 별다른 목적이 있는듯싶진 않고, 아이가 고사리손으로 아무리 열심히 꽃을 캐내고 꺾는들 티 하나 나지 않을 규모라서 그냥 두었더니 우리 따님은, 엄마와 아빠에게 열심히 꽃을 따서 배달한다. 처음엔 조금 받아주다가도, 나중에 가선, 아니 이렇게 하면 우리가 꺾은 꽃을 어찌할줄 모르겠기에 그만 아이의 손목을 잡고 끌고와버렸다. 그리곤, 꽃과 더 놀겠다는 아이를 달랜다고 엄마와 아빠가 양 손을 잡고 훠이 훠이를 해준다. 그랬더니 그만 꽃은 잊고 뿅. 그래. 단순한게 더 무서운 시기지.
무서운, 시기. 저녁까지 먹고 숙소로 돌아왔더니, 따님은 또 열심히 하루의 에너지를 소진한다. 튜브 풀장에 물을 받아 물놀이를 시키면서 토마토를 먹였더니, 자기가 담근 물에 토마토를 담그시는 따님. 아빠에게 토마토를 먹인다더니만, 그 토마토를 물에 담근 뒤에 나에게 가져다주는 너, 깨문 토마토를 가지고 물 속에서 촉감놀이를 하는 너. 그 물을 또 마신다고 코를 박는 너. 너. 너어. 너. 아이 너. 너. 휴우.
그렇게 오늘도 알차다면 알찬, 빡세다면 빡센, 하루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두꺼운 구름 사이에로 기울어져가는 태양이 온전히 지평선 아래 몸을 감추자, 비로소 구름은 자리를 비웠다.
아이를 재우고 나왔을 땐, 여수의 밤바다 위로 총총히 별은 빛나고, 하늘은 티없이 맑다. 나는 버스커버스커의 여수밤바다를 틀어놓고, 이 밤의 여유를 뒤늦게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