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나, 그리고 아이
오늘날의 도시인에게 타지에로의 여행이란 일반적으로, 지방의 무너져가는 삶의 토대를 가린 장막을 바라보는 것이다. 제주도든, 양양이든, 부산이든 어디든. 사람들이 새로 태어나며 융성하던 땅이 더는 돈도 밥도 일구어줄 수 없는 까닭에 의해 사람들에게 버려지고, 남는 것은 그 땅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한 사람들. 그로 인하여 밝은 거리의 이면을 조금만 들추고 들어가도 쇠잔해진 토지의 이력을 읽어낼 수 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땅의 이면엔 무너져가는 돌담과 빠글거리는 파마를 한 할머니들이 유모차를 끌고 힘겹게 걷는 것을, 어디에서나 본다.
막 세상을 만나가는 아이를 데리고 기울어져가는 땅을 거니는 일에는, 그로 인하여 만감이 교차한다. 부모님이 나이를 드심은 다른 것보다는 목소리로 안다. 화장으로 피부를 가리고 염색으로 흰머리를 가리며, 각종 건강보조식품으로 활력을 유지한다고 해도 어느날 어머니의 목소리에 확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진 뒤로는, 그 이전의 목소리로 돌아오지 않으신다. 나는 아직 효도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평소엔, 각자의 생활에 빠져, 또 각기 건강하리라는 믿음에 그런 부모님의 나이듦에 대하여 마주할 일이 많지 않다. 그러나 오히려 멀리 떠나온 길에서 나이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쉽게 떨쳐지지가 않는 것이다. 저기 힘겹게 걷는 노인에게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듯, 부모님의 나이드심에 대해서도,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인 탓에.
그러곤, 나는 지금의 나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잘해나가고 있는 것인가. 늙어가는 부모님에게 한 삶을 정리함에 있어서 자식으로서 뿌듯함을 전해드릴 수 있는 것일까.
그러한 생각은 내 앞에 달려가고 있는 어린 딸아이로 인하여 더욱 강렬해진다. 핏줄은 아래로만 흐르지 않는 탓에, 내 살점을 바라보면서는 내가 잘라져나온 한 켠을 돌아볼 수 밖에 없다. 어렵사리 나도 손주를 선물해드렸고 나는, 나의 자식의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지금도 앞으로도 애를 써 나가야 한다. 결실을 위한 노력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공백을 부른다. 내가 더 많은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아이는 나와 멀어져간다. 같은 과정으로 나 역시 부모님의 존재로부터 독립을 해왔을 테지. 물장구를 멈추면 죽고야마는 불쌍한 바다오리처럼 쉼 없이 달려야 하는 소시민의 삶은 애처롭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양보하는 일은.
그러나 길 위에서 아이의 등을 바라보며, 또 저기 무심히 지나가는 백발의 노인을 보며, 나의 삶과 부모님의 남은 삶을 돌이켜생각하건데, 인생의 좋은 것은 결국 나중에 온다며 스스로를 향한 위안을 마음 한 구석에서 캐낸다. 오늘의 더 나은 삶은 무엇일까. 나의 삶이 충분히 의미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게 되는 때는, 과연 언제일까.
늙어가는 부모님에겐 장성한 자식이 잘 살아가는 것 이상의 기쁨이 드물다. 단순히 돈 잘 벌고 잘 사는 것 이상으로, 지금의 삶에서 보다 나은 것을 일굴 수 있는 의지로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토대를 보다 단단히 하는 것, 부모님이 살아오신 토대는 이미 무너지고 없지만, 내가 단단히 일군 토대에 부모님을 함께 올려드리는 것, 또 그 토대에서 함께 살아온 날, 남은 시간을 나누는 것. 이런 일들이, 한 사람의 아름다운 마무리, 자식으로서 의미있는 일, 또 어버이로서의 일말의 도리가 아닐까.
나의 보통의 한미한 삶 속에는 무너져가는 토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친지들이 가득하다. 우리 부모님도 나도, 그런 토대 위에서 어찌 어찌 지금까지 버티어왔다. 뒤로는 무너져간 담벼락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나의 마음을 괴롭힌다. 괴로움은 더 큰 욕심과 의무감으로 변하지만 한편 아이는 틈만 나면 아빠의 다리를 붙들고 안아달라, 놀아달라 외친다. 따라서, 나는 마음을 비우고 아이와 놀아주는 일에 전념을 하고 나면, 아이가 잠든 뒤에 나의 삶의 갈피를 정리해나간다. 오늘 일. 내일 일. 해야할 일과 하고픈 일들. 그런 일련의 시간에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간다. 아마도, 부모님도 나와 같은 일을 겪으며 훌쩍 늙으셨겠지.
그러므로 인생의 좋은 것들이 나중에 온다는 말은, 선택의 사항이라기보단 그저 단순한 어떤 교훈이다. 해야할 일과 하고픈 일 사이에서 번민하게 될 때 나는 그저 다행히 당도할 수 있게 되면 바라볼 먼 미래를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의 삶을 떠올린다. 부모님의 남은 삶이 길지 않다. 지금 무언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이의 남은 삶은 길다. 지금의 결실들이, 나중에 내내 이로울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위안 삼아가며 그냥 바람을 맞는다. 다행히 작은 결실이 하나 둘 서서히 맺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