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데 뜻밖에도 괜찮았
한가지 사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그 탁월하고 신선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인도의 한 영화를 표절했다는 문제제기를 당한 바 있다. 영화의 핵심 소재인 "가난한 자가 부자 집에 위장취업한다"라는 스토리가 닮아있었다는 것.
물론 별 소용 없는 문제제기였지만 이 사례처럼, 현대 대중문화의 역사가 100년을 넘기면서 내러티브에 있어서 더는 새로울 것이 없어지고 대부분의 작품들은 기존에 한번쯤은 다루어졌던 것을 원하든 원치않든 닮을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한 거장의 평생의 노작이든 빛나는 천재의 재능으로 빚어진 초유의 작품이든 우리의 인식 한켠에서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대유할 대상을 찾아버리고야 만다.
한 평생 작품활동을 하며 관객들과 소통해 온 미야자키 하야오, 특히나 늘 작품에 자기 자신을 강하게 투영시켜 온 그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내내 불친절한 연출의 한 원인은, 내가 보기에 이러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익숙한 선택을 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생각나기도, <판의 미로>가 생각나기도 하는 "새로운 세계로의 소년 소녀의 모험"이라는 이야기에서 끊임없이 관객들이 물음표를 품고 결말까지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법. 관객이 익숙한 영화문법에서 벗어나 주인공인 마히토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방법. 그것은, 설명을 최대한 줄이고 그저 보여주면서 이 이야기의 새로움을 직접 대면하는 불친절하고 다소는 지루한 연출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별로 성공적이진 않았다. 느린 템포에 이야기는 지루하고, 소년의 여정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툭툭 튀어나오는 각종 연출 장치들은 신선하기보단 뜨악하다. 원저가 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이 세상 만사에 대한 1문 1답 형식으로, 소년을 위한 잡학사전 같은 느낌이라더니 이 영화도 불친절하게 짬뽕된 각종 소재들이 마구 뒤섞여 있어 하나로 메세지가 응집되지 않는다.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모성애라는 소재도, 대주제로서 소년의 여정의 지향점이 되어야 할 문명에 대한 비판과 자연 보호라는 주제도 이 산만하고 불친절한 연출에 희석되어 버린다.
그로 인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결과적으로 대중성을 갖추지 못한 작품으로 보인다. 나는 학교 체험학습 차 17살 고등학생들과 함께 이 영화를 관람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나오면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재미도 없다며 혹평을 던졌다. 물론 드물게 자긴 괜찮았다는 아이도 있었다. 공감받지 못할 소년의 이야기를 관람한 소년 소녀들의 감상.
그러나, 그런 관객 중심의 관점이 아니라 주인공 마히토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을 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조금 다른 매력이, 풍겨오긴 한다. 매력이 넘친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리고 늘 보아오던 지브리의 방식이지만, 엔딩도 그 때 그 시절에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말하는 바가 전해져 오긴 한다. 아스라히. 그리고 서서히.
이야기는 소년이 도쿄대공습으로 인해 엄마를 잃고 트라우마를 품은 채로 시골의 외가에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곳엔 엄마의 친동생이 새엄마가 되어 임신한 채 소년을 기다리고 있다. 소년은 말이 없고 뻣뻣한 태도를 고수하며, 가족과 하인들의 호의에도 제법 엇나가는 일을 계속한다.
그러한 소년은 자연스럽게 외가가 품은 어떤 원초의 신비에 이끌린다. 권능자의 사도인 왜가리가 그를 조롱하며 유혹해오고, 그 과정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동물들이 소년의 모험을 촉구한다. 모험을 망설이며 경계하던 소년이 마침내 선택을 하는 결정적 계기는 이모였던 새엄마가 신비의 탑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충직한 늙은 하녀 키리코 씨와 마침내, 소년은 깊이 감추어져있던 탑에 오르기 시작한다.
작품이 이 지점에 오기까지의 30여 분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상당히 불친절하다. 일본인에게도 그럴 것이다. 당대의 흔한 습속이었다 해도 굳이 이모를 새엄마로 배치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리 설명을 자제한 연출이었다해도 트라우마로 인한 아이의 여러 행동을 그렇게 갑갑하게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도쿄대공습은 <반딧불의 묘>에서도 차용된 소재였지만 일본인이 느끼는 것과 다른 피해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이 느끼는 바가 크게 다를 것이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그로 인한 전쟁의 참화, 자연파괴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다루는 방식은 내내 이러하다. 큰 틀에서 일본인 입장에서 느끼는 세계의 보편적 비극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한 개인사로서 다루는 영화의 방식은 내내 비판의 소재일 수 밖에 없다. 마히토의 아버지가 군수기업의 대표라는 것이 영화 내에서 조금도 비극으로서 다루어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러한 불친절하고 의문점을 남기는 연출방식을 고수하며 마침내 모험이 시작되지만 마히토가 들어간 탑 속의 세계 역시 매력적이기보단 기괴하다. 죽음의 트라우마를 깊이 간직한 소년에게 탑 속의 세계는 매번 죽음을 마주하게 한다. 실상은, 탑 속의 세계는 현실의 비극이 반영된 거울세계로서 현실에서 고통받은 동물들이 강렬한 삶과 죽음에의 의지를 품고 여전히 고통 속을 방황하거나, 인간처럼 타락한 채로 살고 있다. 탑 속의 세계가 불안정해보이는 것은 현실 세계의 인간의 폭력으로부터의 일종의 도피처인 때문이며 그러한 비극에 있어 죽음이 빠질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 역시 늘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하지 않은 선택받은 존재들은 이곳에서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동물들은 인간의 피해자로서 이곳에서도 이상향과는 거리가 먼 삶에 처한 상태.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모험을 마친 소년은 이 거울세계의 진실과 만나고, 관객에겐 익숙할 선택을 한다. 그 과정에서 소년의 갈등은 해소되고, 트라우마는 극복된다. 익숙한 성장담, 익숙함을 극복하기 위한 불친절한 연출의 반복.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얻고, 기억하게 될까? 영화는, 아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인간의 악의가 우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고, 자신의 악의가 세계에 미친 영향을 경험한 아이는 보다 나은 성인으로 자라날 것이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전한다. 마음을 털어놓고 서로의 이름을 올곧이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다시금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현실의 비극으로부터 벗어날 아주 작은 돌조각들을 모아나갈 수 있다. 그 돌조각들이 더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더 더 많이 모아진다면 집도 세워지고 성벽도, 그리고 도시도 세워질 것이고 만약 그 돌조각 사이에 부정과 강의가 여전히 내재한다면? 다시금, 세상은 비극에 뒤덮이고 만물의 고통은 반복될 것이다.
탑 속의 세계는 다른 이상세계와는 다른 차별점이 있다. 전쟁, 엄마의 임신, 부정한 사도와 더불어 <판의 미로>가 생각나게 산 지점이다. 죽음의 트라우마가 주요한 소재로 쓰이는 작품답게 삶과 죽음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시 불친절하게만 흘러가긴 하지만, 고통받아 온 펠리컨들을 통해 죽음에의 의지를 보여준 점은 호평할만하다.
그러나, 영화가 꼭 친절하고 자상해야만 할까. 소통의 부재로 인한 갈라섬을, 다른 소재와 버무려 말하고 있는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모처럼 함께 본 아이들, 그리고 선생님들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건 좋은 일이었다. 모처럼의 영화수다였으니까. 머리를 뻥 비우고 보는 액션영화였으면 그리 즐거운 수다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나 영감님, 이번만 봐드리는 겁니다. 한번 이런 불친절한 작품을 냈으면 다음엔 좀 친절한 작품도 내주어야 관객들의 인내심도 고갈은 되지 않을 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