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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ug 09. 2023

“참된 나”에 얽힌 문제들, <더 웨일>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구원

 영화 중반부, 찰리의 유일한 친구이자 간호사 리즈는 불쑥 찰리를 찾아와 전도를 하겠다는 젊은 청년 토마스에게 자아와 결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건낸다.


"너야 괜찮겠지 젊을 때 전도 여행 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따분한 직장 잡고 애 잔뜩 낳으며 사는 삶. 그런데 다른 유형의 사람도 있어. 찰리처럼 그 멋진 계획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


 찰리와 그의 죽은 연인 앨런은 정말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찰리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대학 교수였다. 그의 연인 앨런은 자기에게 마련된 결혼이라는 운명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던 차에 성인반에서 찰리의 작문 수업을 듣다가 사랑을 느끼게 된다. 둘은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함께 파멸을 맞는다. 주어진 삶, 정해진 길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앨런은 그의 인생 전부와도 같았던 가족과 교회로부터 파문당해 내쫓겼고 그로 인해 깊은 실의에 빠져 길고 긴 고통을 겪다가 숨을 거두었고, 앨런의 죽음을 곁에서 내내 지켜볼 수 밖에 없던 찰리는 앨런의 죽음 이후 존재의 허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폭식과 대인기피 증세를 보이며 272kg의 초고도비만 질환자가 된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따랐다는 이유로 이러한 비극을 맞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아브락사스.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인격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형성되는 한 인간의 자아는 알을 깨고 세상의 빛과 대면하는 순간 희망과 환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마땅하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이요 진실된 세상과의 첫 대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찰리의 연인 앨런은 자신이 깨고 부수고 나온 알껍질에 매달렸다. 반면 찰리는, 그의 모든 것이라고 느꼈던, 모든 것을 버리고 택했던 연인, 즉 타자의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아이러니를 표출한다. 기실 둘 모두 완전한 자아를 발견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불 같은 사랑의 감정으로 새로운 내면의 역동을 느끼고 참된 자신을 만난 것과 같은 환상을 경험했을 뿐이었다고 할까. 그로 인한 충격은 주위의 모든 존재가 함께 감당했다. 찰리의 전처 메리, 딸 엘리, 앨런의 의붓동생 리즈가 둘의 돌변으로 인해 격심한 생의 부침을 경험한다.


 사랑에 매혹된 것이었을 뿐, 실제로 참된 자신을 발견할 용기 따위 처음부터 없었던 찰리는 그러한 현실로부터 내내 도피한다. 찰리는 죽은 연인 앨런의 흔적을 대면할 용기조차 없어 그의 방문을 잠그고 열쇠를 손 닿기 어려운 곳에 올려두었다. 앨런과의 행복했던 한때의 사진은 거실 한 켠에 덮어져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자아 발견의 실패에 대한 강박과 작문 교수라는 직업의식으로 인해 찰리는 "정직한" 글쓰기에 상당히 집착한다. 제발, 쓸데없는 것 모두 걷어치우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보라며.


 찰리의 이야기에 얹혀진 다른 두 인물, 그의 딸 리즈와 교회 청년 토마스는 자아의 발견과 가식 사이에서 찰리와는 다른 특성을 보인다. 리즈는 반항적으로 자란 탓에 선악의 구별이 모호하고 정직함과 거짓 사이의 분간이 없다. 불필요한 장면처럼 중반부에 배치된 리즈와 토마스의 대화에서 이런 점은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반면 토마스는 그러한 자아의 발견과 표출을 신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탁하는 종교인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며 영화의 후반부에서 역시 명시적으로 정직함 따위 없는 가식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리즈는 알에 들어가기 전의 원형체에 가까우며, 토마스는 팔다리와 머리만 알 밖으로 꺼내놓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알을 깨준다고 쪼고 다니는, 그런 인물상이라고 할 수 있다.


 참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가 파국을 맞은 뒤 깊은 바다와 같은 내면 속으로 침잠해 간 찰리에게 있어서 생애 마지막 구원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엘리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딸의 에세이를 통해 재능을 눈치채고, 페이스북을 염탐함으로써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던 찰리는 그리고 죽음이 확실히 눈 앞에 다가오자 마침내 딸에게 연락을 한다. 그가 원한 것은 단지, 딸의 진실되고 솔직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 이를 통해 찰리는 자신의 내면과 자아에 대한 트라우마와 사회적 자아의 직무의식을 통합해낼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더 웨일>은 왕년의 액션배우 브랜든 프레이저가 완전히 무너진 뒤 재기하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충격의 걸작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와,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273kg의 거구의 불안한 삶을 통해 거대한 몰입의 인력을 이끌어낸다. 연극과 같은 연출이 고스란히 활용된 장면 구성의 단조로움이나 서사가 없이 대화로만 극이 이끌려가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각 인물의 과거와 내면에 대한 조명은 여지없이 강렬하다. 인물의 비극성을 즐겨 활용하는 대런 아로노보스키 감독의 특성이나 주인공 찰리의 죽음을 예고하고 시작되는 영화의 특성 상 절대로 기분 좋은 결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을 잘 알면서도, 끝까지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보게 된다. 극장에 가지 못하고 넷플릭스로 보게 된 현실에 혀를 찰 만큼.


 종교에 대한 은유나 작문을 통한 부녀의 교감, 엘리와 리즈가 모두 엘리자베스의 애칭이라는 점에서 리즈의 존재가 갖는 상징성 등, 소소하게 즐길 거리도 많고 후반에 가면 웃음도 제법 터진다. 이야기를 주무르는 감독의 솜씨가 명불허전인데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의 합일이 이루어짐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는 결말이 극 전반에 잘 버무려져 있는 점이 인상 깊다. 찰리, 리즈, 토마스와 앨런 각각에게 이처럼 상이한 사회적자아와 초월적 자아의 상이 부여되어 있는 점도.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란 그 이후의 삶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으며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 바다 속에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고래 역시도 물 밖으로 나오면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할 뿐이니, 참된 나를 만난다는 것은 기쁨이라기보다 차라리 위협과 불안일 테다. 그럼에도, 그러나, 찰리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더 웨일>의 이야기가 빛나는 지점이다. 자신으로 인해 망가진 전처와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남기려 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딸의 구원과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힘썼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 적어도, 찰리는 그 문을 열어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완전히 망가진 몸, 무너진 삶 속에서 숱한 역경을 겪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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