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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순 Feb 03. 2020

마음 통장

기억해주면 안 될까

 마음 통장

                                            이 영 순

     

너무 따스한 겨울. 하얀 눈은 구경도 하지 못한 채 해가 바뀌고 구정이 다가온다. 우리 집은 명절 차례를 떠나보냈다. 새 식구를 맞이하면서 기제사만 남기기로 했다. 물론 나의 목소리가 컸다. 넷째 아들의 아내로서 이젠 편해보고 싶다. 명절이 다가와도 무거운 옷을 벗어던진 것처럼 몸도 마음도 한갓지다. 2020년 올해의 구정은 작은 아들의 부탁에 따라 미리 설밥을 먹기로 한다. 큰아들 내외와 목요일 저녁 일곱 시로 정한다. 

     

오랜만에 양장피를 한다. 골고루 사다 놓은 야채를 썰고 노랗고 하얗게 계란 지단도 부쳐서 채를 친다. 둥근 접시 위에 색깔을 맞춰서 담아보니 색동저고리처럼 산뜻하다. 데쳐 놓았던 생 오징어도 붉은 피망 옆에 곱게 썰어서 앉혀주고 주황빛의 당근 사이에도 뽀얀 빛의 오징어 살을 놓아 보니 완벽한 색의 조화다. 

돼지고기를 물기 없이 볶아낸 후 뜨거운 물에 불려 놓았던 양장피를 합 채 시키면서 간장을 넣는다. 두반장을 조금만 넣는다는 것이 많이 들어간 거 같다. 알쿠, 짜다. 맛나게 먹으려던 계획이 실패하는 느낌이다. 걱정은 되지만 보기 좋게 담아 본다. 알록달록한 야채의 색깔 때문인지 봄날의 꽃밭처럼 향기가 난다. 코끝이 톡 쏘는 겨자소스를 곁들인다. 

     

어제저녁에 미리 재워 놓았던 갈비를 구우면서 놀고 있는 레인지 위에 팬을 올린다. 불려 놓았던 굵은 당면으로 볶음 잡채를 만든다. 흔하게 해 먹는 빨간빛의 걸쭉한 닭요리는 만들기 싫다. 간장 소스에 춘장 반 수저를 넣어 구수한 맛을 낸 후 칼칼한 맛이 나는 청양고추를 어슷하게 썰어 넣는다. 맨 마지막에 참기름 한 방울을 아깝다는 느낌으로 조심스럽게 떨어트린다. 많이 들어가면 느끼한 맛이 생길까 봐 서다. 채를 쳐서 매운맛을 없애 놓았던 대파는 접시 가장자리에 야트막하고 둥그렇게 성(城)을 쌓는다. 완성한 닭고기 조림을 성(城) 안에 들여놓고는 불룩하게 모양을 만들고 보니 먹음직스럽다. 검은 흑임자를 뿌려준다. 신기하게도 닭조림에는 노란색 참깨보다는 검은빛의 흑임자가 더 맛을 풍요롭게 하는 거 같은 나만의 느낌이 든다. 순간 내가 마치 유명한 요리사가 된 거 같이 들뜬 기분이다. 엄마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눈치 빠른 아들은 상을 쳐다보며 칭찬을 한다. 

“와, 울 엄마 칼 솜씨. 예술이네요. 흩어짐 없이 접시 위에 줄 서 있네요.” 

걱정했던 양장피의 짭짤함은 입안에서 흐르는 침샘의 중재 때문인지 간이 딱 맞는 거 같다. 입맛이 제법 정확한 작은 아들은 맛나다고 말한다. 식사의 중간쯤에 서서히 뚝배기에서 끓고 있는 된장찌개가 합류한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큰 아들. 

“왜 우리는 이 맛이 안 나는 걸까? 이것저것 다 넣어 봐도 난, 왜 안 되지?” 

“어머니 찌개가 개운하네요.” 

“그러니. 별거 넣은 거 없는데. 요리 전문가들은 멸치 국물을 우려서 한다는데 난, 맹물에 된장찌개를 끓여야 개운한 거 같더라고. 오늘도 물에 된장 풀고 애호박 넣은 건데.” 

아들 부부는 물음표를 얼굴에 가득 붙인 채 서로를 쳐다본다.

     

상 옆에서 누워있는 손자는 뒤집기에 도전하느라 혼자서 낑낑대고 있다. 수일 안에 ‘승현이 뒤집기 성공’이라는 플래카드가 우리 가족 톡 방에서 휘날릴 거 같다. 

     

설날 아침에는 오랜만에 양손 질이나 해보자. 함박스테이크를 해야겠다. 아이들이 한참 성장할 때 이런저런 음식을 많이 해 먹었다. 아들들은 성장해서 밖의 음식을 먹게 되면서부터 한 동안 잊고 살았던 음식이다. 신기하다. 손자가 태어나면서 마음도 음식도 지난날을 더듬게 된다. 아마도 추억을 찾는 거 같다. 그것이 지나간 행복이었는지. 

     

“어머니. 제가 준비해 갈게 있을까요?”

“아침에 여덟 시까지 우리 승현이 바람 안 맞게 채비만 잘해 가지고 오면 된다.”

     

큰아들 부부가 들어온다. 손자가 누울 이불을 펴주고는 상을 차린다. 함께하지 못하는 작은 아들이 목에 걸린다. 빚어 놓은 고기 두 덩이를 랩으로 꼭꼭 싸서 냉동실에 넣는다. 아들들이 한 창 먹성이 좋을 때 애용하던 하얀색 접시를 꺼낸다. 그동안 싱크대 서랍 속에서 묵언수행 중이던 포크와 나이프를 꺼낸다. 접시 위에 두툼하게 구운 함박스테이크를 올린다. 참기름을 넣고 삼삼하게 쌀밥에 간을 한 후 주먹밥처럼 뭉쳐 준다. 바글바글 끓고 있는 소스를 넉넉하게 뿌린다. 계란 프라이를 덮어준다.

 

음식도 추억이고 그리움이었나 보다. 기쁨이었다. 지나버린 젊은 날을 만난 거 같다. 꼬마들이 보인다. 돈가스를 접시에 올려 주고, 하얀 밥으로 동그랗게 장식할 때면 “아이스크림 같다.”면서 두 아들이 좋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기억된 오늘 아침은 어제의 아침보다 특별하게 난 너무 좋다.

     

새아기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달려든다. 

아니, 내가 하마. 넌 애기나 보면서 놀아라. 아직은 내가 젊고 어미의 주방이니까 편하게 있어라. 훗날 시어미가 안 하던 헛소리를 할 때. 역시 ‘시(媤) 자 붙은 사람은 이런 거였나.’ 그날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때는 늙어진 어미를 이해해줘라.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가슴속에 ‘마음 통장’을 만들어 봐. 그 통장 속에 내가 너에게 저금해놓고 싶다. 먼 훗날 어미의 말이 야속하게 이해가 되지 않을 때, 행동이 괴팍해졌다고 느껴질 때. 그런 날이 없기를 간절하게 바라지만, 혹시라도 너무 괴롭고 아픈 날이 된다면. 그때 네가 문득 오늘이 기억돼서 ‘마음 통장’을 열어 봤을 때. 날짜별로 빼곡하게 시어미와 싫지 않았던 세월이 쌓여 있다면. 어미인 내가 잘 살은 걸 테지. 그날부터 서운할 때마다 ‘마음 통장’에서 한 개씩 꺼내서 시어미를 기억하고 이해해 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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