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예뻐서
장가가기 전까진 엄마가 먼저예요
이 영 순
밤 열 시가 되어간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녁은 먹었니?
“먹었어요.”
“오늘 여자 친구의 생일이었어요.”
“근데, 왜 일찍 들왔어, 좋은 시간 갖지. 선물은 사줬니?”
“아뇨. 못 사줬어요. 저녁만 먹고 헤어졌어요.”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애인이 선물도 안 사주니?”
아들은 옆에 바짝 다가앉는다.
“저희가 만난 지 5년이 되어가잖아요.”
“응.”
“제가 직업이 없을 때 친구가 데이트 비용을 다 썼어요. 우리의 커플링까지도 영은이가 했어요.”
“부자 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어찌하여 가난한 엄마에게 태어났네.”
“또 울 엄마 오버하신다.”
그랬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넉넉히 주지 못했다. 지나고 나면 왜 이리도 못해준 것만 기억이 나는지 미안한 마음이다.
“제가 이젠 취직도 했잖아요. 그동안 고마운 마음도 있고요. 맘먹은 김에 좋은 선물하고 싶어서요.”
아들의 얼굴에서 그녀를 향한 진심이 보인다.
“지갑이 낡아 보이 길래요 명품지갑 사줄까 하는데 엄마부터 사 드리고 싶어요. 친구도 알뜰해요. 명품이 한 개도 없어요.”
“사줘. 네 경제 형편이 되면 해주지 그래.”
“친구한테 말했어요. 울 엄마도 명품지갑이 없으니까 엄마 먼저 해드리고 너도 사 주겠다고 요.”
난 고맙다는 눈빛을 하면서 “엄마는 안 사줘도 돼.” 아들은 단호하게 말한다.
“장가가기 전 까진 엄마가 먼저예요.”
“어머. 그런 말 하면 친구가 마마보이라고 하지 않을까?”
요즈음 시월드라는 신종 단어가 생긴 세상이다. 시댁이 싫어서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데.
“엄마를 밝히는 남자는 여자들이 싫어할 텐데.”
아들은 말한다.
“연애 기간이 왜 필요한데요. 서로의 가치관을 맞춰 보는 게 사귀는 기간 아닐까요? 말했어요. 결혼하기 전까진 부모님을 챙기고 싶다고요. 그러나 결혼 후엔 아내부터 챙겨주는 남편이 될 거라고요. 전 꼭 약속 지킬 거 에요.”
생각이 바른 아들이다. 언젠가 둘이서 순대 국을 먹은 그날, 점심. “장가가면 최선을 다 하는 남편이 될 거예요.”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니 아마도 지금 말하는 이 사랑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던 거 같다.
“엄마가 그랬잖아요. 결혼하면 아내부터 챙기라고요.”
“당연하지. 가정부터 챙기는 가장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야지. 결혼하면 남편이 되는 거니까 반드시 아내부터 생각나는 것이 맞는 거야.”
다시 한번 아내부터 챙기는 남편이 되라고 강조한다.
나의 결혼. 아내인 내가 우선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느낌으로는 형제가 먼저인 것처럼 남편의 마음이 보였고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외로웠고 가끔은 떠나고 싶었고 “내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셀 수 없을 만큼 의문사를 붙여 보았다. 아들의 사랑이 이렇게 익어 가고 있는데, 남편의 입에서는 아직도 형제가 우선인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이젠 가슴속에서 굳은살이 박일 법도 한데 찌릿한 서운함은 시리도록 서늘하다. 내가 가졌던 쓸쓸함을 아들의 여인은 못 느끼게 하고 싶다. 완벽하게 남편의 마음을 온전히 차지하고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쓸쓸함은 무엇인지, 국어사전 속에서만 존재하는 단어로만 알면서 살아가게 하고 싶다. 진심이다.
“내일모레 퇴근 후, 백화점 가서 지갑 사드릴게요.”
“싫어. 친구나 사줘.”
“안돼요. 엄마부터 사드리고 친구도 사줄게요.”
이틀이 지나갔다.
“집 앞으로 나오세요. 십분 쯤 후예요” 아들의 카톡이다. 옆 동에 살고 있는 언니가 지나간다.
“아니 혼자 왜 웃고 서있어?”
“그랬어요?”
아들을 기다리며 기쁨이 흘렀나 보다.
“아들이 데이트 좀 하자네요”
“알고. 웃을 만하네.”
잘 다녀오라면서 “그 기분 알지.” 하며 손을 흔든다.
아들의 차를 타고 백화점으로 간다. 이것저것 권해주는데 가격표시만 눈에 들어온다. 급하게 동그라미부터 센다. 분홍색 지갑을 들려준다.
“엄마, 이걸로 해 보세요.”
어색한 미소로 힐끗 아들을 쳐다보며
“돈으로 주면 안 될까, 차라리 살림에 보태서 써 볼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안 돼요. 더 비싼 것은 제가 무리해서라도 사드릴 수 있어요.”
양팔로 내 어깨를 감싼다.
“근데요. 돈으로는 안돼요. 엄마도 한번 명품지갑 가져 보세요.”
그날 아들은 내게 명품지갑을 사줬다. 분홍색, 예쁜 지갑을.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저, 결혼 전에 저금 좀 덜 해도요. 나무라지 마세요. 장가가면요. 엄마한테 마음대로 못 해드려요. 그때는요. 다 아내하고 의논해야 하잖아요. 지금 제가 뭐 좀 해드리면 그냥 받으세요.”
아들은 촉촉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식이 기쁨이네. 난 울 엄마한테 어떤 딸이었을까? 나도 엄마한텐 기쁨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짠하다. 울 엄마가 “남편 밥은 누워 먹고 자식 밥은 앉아 먹는단다.” 고 말씀하시더니 어느새 자식 돈이 이렇게 가슴 아픈 줄 아는 나이가 되었나!
자식이 주는 돈은 이상하게 가슴이 시리다.
만 원짜리 한 장을 새 지갑 속에 넣어준다. 두 팔을 커다랗게 그리면서 “돈 많이 벌어서,” 두 손으로 배를 둥그렇게 두드리면서 “다음엔 두둑하게 넣어 드릴게요.”라고 능청을 떨어댄다.
다섯 살로 돌아간 아들이 보인다.
남편에게 보여준다.
“예쁘네.”
“여보. 가슴이 아려. 새끼가 사주는 건 너무 아파.” 아들과의 대화도 다 얘기했다.
“그 녀석 철이 좀 났구먼!”
“영은이도 성품이 고운 아이인 거 같죠.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거 같아요.”
잠이 들으려 하는 남편을 툭툭 건드린다.
들꽃보다 더 예쁜 마음을 가진 사랑을 찾은 거 같지 않아요.”
남편의 다리 위에 발을 걸쳐 올렸다. 자꾸 말을 걸었다. 밤이 새도록 아들 자랑을 실컷 하고 싶어 졌다.
“돈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영은이 한테 물어봐야겠어요.”
잠 섞인 목소리로 “뭘 물어보려고?”
“너희 회사에서는 자식 돈에는 눈물을 넣어서 만드냐고요, 아들이 주는 돈에는 가슴을 넣어서 만드냐고 알아봐야겠어요.”
남편은 반쯤 입을 벌린 체 하품을 한다.
“효(孝)도 일방통행은 없는 거지.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잘해야지.”
남편의 팔을 당겨오며 “자기야. 여보. 글쎄. 장가가기 전까진 엄마가 먼저라네요.”
아들이 결혼하기 한 참 전, 어느 겨울날.
아직은 친해지지 않은 그녀를 상상하면서.
아들이 이뻐서, 밤에 써 놓았던 글이다.
브런치 작가가 되어 다시 꺼내 읽어본다.
지금은 아비가 되고 어미가 된 아들 부부.
그날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