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
최근 인기가 많은 드라마인 폭삭 속았수다를 나 역시 재미있게 보고 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인 관식이와 애순이를 보면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좋아한다.
그렇지만 세상엔 그러한 관식이 애순이와 같은 부모만 있는 게 아니다. 특히 그 당시 1960-70년대 사회 분위기로 보았을 때 관식이와 같은 아빠는 정말 드물지않을까? 아들딸 차별없이, 아니 오히려 딸을 귀하게 여기는 아빠이자 시댁보다 아내 편을 들어주는 그런 남편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면 정말 행운아 일거다. 모계사회인 제주여서 가능했을까? 드라마속 판타지아닐까?
나는 금명이와 비슷한 세대이지만, 나의 부모님은 달랐다.
나의 현실세계는 유교문화가 지배적인 조선이란 나라를 지나 애프터 조선 사회였다.
조선 이후 150년이 지난 현대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이 나라의 딸들은, 다른 나라라면 겪지 못할,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통적 사회속 유교문화의 관습아래 자라왔던 우리 부모 세대들, 그 밑에서 자라난 우리 딸들은, 금명이와는 달리, 부모의 정서적 전폭적 지지를 받으면서 자랐을까?
특히, 아들보다 공부 잘하는 딸들이 가지는 불편함, 죄송함, 부당함, 그러한 것이 있었다.아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딸은 애프터조선 시대의 부모들에겐 불편하다. 아들보다 공부를 잘해서, 특히 오빠보다 공부를 잘한 딸은 집안에서 전폭적인 환영을 받지 못하는 존재다. 나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전형적인 유교주의 사상에 푹 물든, 종친회가 세상에 가장 중요한 세상 중에 하나인 그런 아빠였다. 그래도 딸인 나에게도 아낌없이 모든 것을 교육시켜주고 잘 길러주셨지만 결국에는 아들이었다. 아들이 딸보다 공부를 못한 게 너무나 안타까운 그런 부모. 그래서 공부잘하는 딸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칭찬해주는데 부모는 인색했다. 서울대간 금명이를, 모자란 은명이 앞에서 우쭈주해 주는 애순이와 관식이같은 부모는 나에겐 없었다. 전교1등한 딸 앞에서, 늘 아들의 눈치를 보곤 했다.
그래도 결혼전에는 별다른 차별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우리집이 특별히 기우는 결혼이 아닌데도, 남자집안쪽 주도로 이루어지는 결혼식 준비과정내내, 나는 뭔가 점점 불편한 느낌이였다. 애순이의 첫사랑인 영범이의 부모와는 달리, 나의 시부모님은 매우 점잖으셨음에도, 시댁이 갑, 우리는 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애순이는 금명이가 너무 귀해서 누룽지푸는 걸 가르치지 않았다고 했지만, 우리 부모님은 공부하느랴 음식을 제대로 못하는 딸내미가 부족해서 그저 송구하다고 했다. 그렇게 변하는 친정부모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 그래서 결혼 이후 친정엘 가면 불편했다.
엄마는 내가 가방끈이 길어지면서, 결혼을 안하게 또는 못하게 될까봐 조급한 마음을 자주 내비쳤다. 그때문인지, 나는 결혼을 일찍 했고, 아이도 바로 낳았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떠돌면서 일하고, 갓난애 둘을 키우는 일하는 엄마였다. 양쪽 부모로부터 어떤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아서, 우리 돈으로 집을 마련해야 했기에, 아이들을 아줌마에게 맡기며, 열심히 일하고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되었다. 우리가 미성년자였을때, 우리 부모님은 아들을 위해 벌써 집을 마련해 놓으셧다는 걸. 공부를 조금 못하는 아들이, “아픈 손가락”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 그런 아픈 손가락을 위해 그분들은 제대로 된 인서울 아파트를 준비해 놓으셨던 거다. 나에게 미리 어떠한 언급도 없이 말이다.
26살에 일찍 결혼한 나는 부모에게는 그저 그들의 숙제를 끝낸 대상이었을까? 빨리 결혼을 해서 시댁 소속이 되어, 출가외인이 되는 것이 우리 부모님의 목표였을까? 결혼이후로 나는 친정에서 출가“외”인이었다. 갓난 아기를 데리고 대학원 공부를 하기에 잠을 못 자 힘이 들때, 친정에 와서 잠좀자려고 밤 11시에 지방에서 운전해 왔을 때, 돌무렵 우리 아들과 나를 아빠는 내쫓았다. 오랜만에 서울왔는데 어디 친정을 먼저 오냐고, 시댁 가서 자라고. 그때가 벌써 뉴밀레니엄 시대가 열렸던 그 어느날 깜깜한 밤이였다.
몇 년 전 종친회의 선산에 성묘를 가면서, 남아있는 땅이 넓길래 “이렇게 땅이 넓은데 딸들도 나중에 죽으면 오게 해주지” 했더니, 그때 아빠의 말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냐 니네 시댁 가서 얘기해”. 하셨다. 아빠가 속한 가장 중요한 사회였던 종친회에서, 나는 아빠의 피를 2분의 1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딸들은 족보에도 올라가지 못하는 그런 존재였다. 아들이 대학을 가면 장학금을 주지만, 딸들은 대학을 들어가도 장학금을 주지도 않았다. 그런 세상에 아빠는 살았다.
같은 여자였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도 아들이 먼저였다. 그 아들이 결혼하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게 너무나 안타까운 사람. 내가 첫 아들을 낳았을 때 드디어 시댁에 숙제를 해서 다행이라던 그런 사람. 친정엄마가 온전히 딸편이지 못하는 그런 세상. 아직도 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금명이 세대인 내 주변엔 그런 친정을 둔 딸들이 여전히 많다. 특히 경상도지역에서 자라난 딸들은 다시 친정을 찾아가지 않곤 한다. 불편한 부모가 있는 고향을 떠나, 멀리 살고싶어하는 딸들이 많다. 사실 나도 결혼이후 가기 싫을 때가 많다. 친정에 저녁을 먹으러 가면 아빠, 사위, 내 아들이 상석에 앉고 여자들은 상 끝쪽에 앉는다. 아빠는 나보다도 사위를 더 먼저 챙겼다.사위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차려놓고 사위를 상석에 앉히고, 사위에게 때론 존댓말을 쓰고 머리 숙여서 인사를 한다. 마치 손님에게 그러하듯이. 언젠가 서러운 마음에 내가 외쳤다. 딸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달라고, 딸을 살갑게 챙겨줘야지 왜 사위를 먼저 챙겨주냐고. 딸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 그런 아빠였다.
그렇지만, 그게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들이 자라난 시대가 그랬고, 그들이 자란 환경이 그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비난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적 환경이였다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딸과 아들은 같은 자식 아닌가? 싶은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내가 딸과 아들을 모두 낳아 길러보니, 더더욱 이해가 어렵다. 나에게 우리 딸과 아들은 다른 느낌으로 너무나 다 소중한데.
결혼을 하고, 내가 아이들을 기르면서, 내 부모가 그런 사람들이라는게 너무 속상하고 아쉬웠다. 폭삭 속았수다를 보며, 관식이와 애순이같은 부모가 내부모가 아니라는 것에 아쉬웠다. 그렇지만, 관식이는 무능력한 아비였고,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셔서, 내가 자라면서 하고픈 건 다하고 크게 해주셨다. 결혼이후에도, 내가 출장갈 때 아이를 봐주시고, 산후조리도 해주러 미국까지 와주시고, 소소한 어려움들을 다 해결해 주는 슈퍼맨같은 부모님이셨다. 그러니, 내 결혼이후 보인 우리 부모의 그런 달라진 표현들이 그분들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였음을 이젠 안다. 시댁에서 살아남길 바라셨던걸까? 어려서는 부모란 완벽하고, 엄청 커다란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들 역시 그냥 부족한 여느 인간이였음을 안다. 그래서 새삼 섭섭해 할것도 없음을 안다. 그냥 인정을 할 수 밖에. 받아들일수 밖에. 그분들은 변하지 않을테니.
나는 나 스스로 나를 귀하게 여기고, 내 아이들이 그런 종류의 섭섭함을 느끼지 않게 하면 된다. 나는 부모를 닮게 태어나긴 했지만, 나는 부모와 또 다른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부럽다. 관식이와 애순이의 금명이에 대한 지극한 정서적 지지가 많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