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교단

작은 사회, 학교 1

우리는 모두 학교를 통해 사회를 배운다.

by 커피홀릭

나는 2년 차 중학교 교사이다.

매일 아침 27명의 학생들과 조례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쉬는 시간과 수업시간, 그리고 점심시간을 수백 명의 학생들과 함께 보낸다. 맨 처음 소위 임용고시라고 불리는 교사 임용시험을 통해 교사가 되었을 때는 단지 합격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학교 생활에 대해 구체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교사라는 직책이 얼마나 사명감이 요구되는지, 또 얼마나 많은 희생과 이해심이 요구되는지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속의 첫 해를 보내고 그다음 해인 올해부터는 학교라는 곳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다양한 배경과 성향, 특징을 가진 아이들이 모여 인간의 본질적 성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성인들이 사회화 과정을 통해 갖게 된 페르소나를 바탕으로 본인의 행동을 억제하는 것에 반해, 학교의 일원인 아이들은 보다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사회가 부여한 권력이 아닌 오로지 힘의 원리에 의거해 상대와 나의 우열을 겨룬다거나, 타인에 대한 나의 열등감과 시샘을 감추지 않는 등, 아이들을 통해 내가 애써 숨겨오고 외면했던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얼마 전, 한 학생을 정서적, 신체적으로 오랫동안 괴롭혀온 여학생과 상담을 하며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 여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가했던 행동들은 정말 15살 학생이 저질렀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했다. 나의 물음에 그 여학생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냥 쟤가 싫으니까요. 나보다 잘난 저 아이가 그냥 이유 없이 싫어요.'라고 말했다. 그 아이와 대화를 나누며 누군가가 싫어도 감정을 원색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옳지 못하며, 공격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함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대체 어느 범위의 사회화까지 관여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 학교가 한 인간의 사회화에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학교에서 다양한 환경의 사람들은 태어난 년도를 기준으로 학년이란 걸 부여받고, 동학년의 학생들은 성적이란 기준으로 골고루 분배되어 ‘반’이라는 집단 속 일원이 된다. 사회에서 만났더라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성향의 학생들도 이렇게 구성된 집단 속에서 좋든 싫든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이러한 다소 강제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배워야 할 규범을 배운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의 이면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습득하게 된다.


일례로 우리 학교는 서울에 있지만, 8 학군도 아니고 강남에 위치하지도 않는다. 학생들은 언론을 통해, 혹은 어른이나 친구들에게 듣게 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차피 우리는 8 학군이 아니어서 학교 공부만 해서는 스카이 힘들대요. 사교육은 필수래요. 강남 애들은 엄청 비싼 사교육 다닌다던데..." 등의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한다.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은연중 사회적 불평등을 습득, 혹은 확인하고 자본의 양극화에 대한 인식을 구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위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아비투스 이론을 주장한 교육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학교가 지배계급의 문화자본을 사용함으로써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피지배 계급에게 이를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며 지식의 주입을 강요한다고 보았다. 한 개인이 학교에서 얻게 되는 지식과 문화는 지배계급의 지성인들의 것으로, 피지배계급이 이러한 것들을 배움으로써 지배계급의 문화를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기존의 사회 질서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과 문화는 지배계급의 것이기 때문에 가정에서부터 이러한 문화 속에서 성장하며 이러한 문화에 익숙한 지배계급의 학생들이 높은 성취를 이루게 되는 반면, 피지배계급의 학생들은 낮은 성취를 이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관점이다. 이때 그가 말한 가정에서부터 얻게 된, 구체적으로 형용할 수 없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는 개인의 성향적 문화 자본을 그는 '아비투스'라고 일컬었다.


학생 때 나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 그저 탁상공론 식으로만 받아들이고 크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나는 부르디외의 이론에 의거해 판단했을 때 지배계급에 속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교사가 되어 학교에 들어오니 학교라는 곳도 어쩌면 우리의 사회를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수단이며 개개인에게 사회에 대한 구체적 인식(예를 들면 계층적 한계나 자본주의의 현실)을 심어주는 공간이라는 점이 더욱더 적나라하게 보인다.



날이 갈수록 내가 속해있는 학교라는 공간이,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교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가볍지 않은 직업인지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내가 더 좋은 교사가 되어 아이들의 인생에, 작은 사회에 보다 값진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데 아직은 너무나 부족해서 부끄럽고 또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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