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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은 Jan 12. 2021

웃픈 인종차별 이야기

이탈리아, 두 번의 인종차별

“유럽 여행하면서 재밌는 일 없었어?” 한 달간의 여행을 하고 돌아온 후 내가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항상 인종차별을 겪었던 이야기를 해준다.


한 번은 이탈리아 베니스에서였다. 저녁이 되어 상점은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고, 조금 깜깜해진 상태긴 했지만 가로등 불이 켜져 있어서 크게 어둡진 않았다. 거리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 틈에서 나는 혼자 주변을 구경하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내 등짝을 세게 밀치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뒤를 쳐다보니 “헤이 차이니스”라며 기껏해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초딩 무리들이 낄낄대며 나를 놀려대고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했지만 덩치로 봐도, 숫자로 봐도 내가 훨씬 밀릴 것 같았다. 요즘 초딩들은 초딩이 아니라는 말이 떠오른 나는 ‘나 코리안인데.’라고 혼자 중얼거린 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맞다, 난 그들한테 쫄았다. 지금 생각하면 짱구 엄마처럼 꿀밤을 맥여 줄걸 그랬다. 이건 이탈리아에서 초등학생한테 등짝 스매싱을 맞았던 조금은 억울하고 쫄보 같은 이야기다.


두 번째 인종차별을 겪은 건 조금 더 드라마틱 하다. 열차가 지연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더 늦은 저녁에 이탈리아 피렌체에 도착을 했다. 내가 묵게 될 호스텔 숙소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해있는 바람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내 캐리어를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갔다. 15분 정도 가량 걸어서야 겨우 호스텔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스텔 정문 앞에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흑인과 미국 여자 무리들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미국 하이틴 영화에 나올법한 비주얼의 그녀들은 날라리 언니들처럼 포스가 압도적이었다. 직감적으로 눈에 띄면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앞을 지나가야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있는 힘껏 눈웃음을 지으며 “익스큐즈미~”라고 말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 순간 뒤에 있던 무리 중 한 명이 “익스큐즈믜~?”라고 말하며 크큭댔고, 같이 있던 무리들도 같이 낄낄대며 나를 비웃어댔다.


순간 너무 서러워진 나는 눈물이 확 고여버렸다. 그 순간 내가 묵게 될 호스텔도, 피렌체라는 도시도 너무 무섭고 나쁘게 다가왔다. 상처 받은 나는 숙소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겁이 나기 시작했다. 숙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나를 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고,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싫었다. ‘여기선 최대한 안 돌아다닐 거야.’라고 마음먹었지만 배가 고픈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밖을 나와 숙소와 제일 가까이 위치해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인지라 가게에 손님은 나뿐이었다. 전날의 속상했던 일을 먹을 거로 풀기 위해 먹고 싶은걸 푸짐하게 시켰다. 파스타와 피자를 혼자 야무지게 먹고 가게를 나서려는데 갑자기 주방장이 나를 불렀다.


주방장은 식후 주라며 나에게 리몬 첼로(이탈리아 식후 주, 알코올 도수는 30도 정도) 한 잔을 따라서 건네주었다. 레몬색이라 음료수 비슷한 걸로 생각한 나는 그 자리에서 원샷을 했다. 그때 난 난생처음 식도가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한 잔의 위력 때문인지 살짝 알딸딸해진 나는 기분도 좋아지고,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참고로 나는 술 쓰레기다.) 약간의 술기운으로 어설픈 용기가 생긴 나는 그날 그 가게를 나온 후 당당하게 피렌체를 휘저으며며 걸어 다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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