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강 Nov 26. 2020

한여름 밤


한여름 열기가 한풀 꺾인 저녁나절 앞산이 훤히 보이는 높은 퇫마루에 앉아 먹는 저녁은 설렘으로 가슴이 뭉글거린다. 이런 날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고 많아야 여름에 두세 번 있는 일이니 그런 날은 며칠 동안 먹던 같은 반찬이라도 밥상에 꿀을 발랐는지 맛부터가 달라진다. 할머니 댁은 집 자체가 언덕 위에 있어 높은데 더 높은 퇫 마루에 앉아 밥을 먹으면 웬만한 것들은 죄다 내려다보여서 어디 먼 곳으로 소풍이라도 온 기분이 든다. 밥 먹기 전에 밥상머리에 앉아 두리번두리번하며 내려다보고 있으면 아랫길에서 마을로 오가는 사람들의 등허리까지 훤히 보이고 앞마당  골목길로 다니는 동네 사람들 정수리까지 내려 다 보인다. 게다가 집이 마을 초입에 자리 잡고 있어 마을로 들어갈 사람들은 할머니 댁 담벼락을 사이로 올라가든 옆으로 돌아가든 해야 하니 밥을 먹다 보면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이 한마디씩 말을 건네 할아버지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면서도 좋아라 말을 이어간다. 평소보다 긴 시간 동안 밥을 먹는 것도 좋은데 퇫마루에서 저녁 먹는 날은 마당에 멍석을 까는 날이기도 하다.

저녁을 먹고 할아버지는 광에서 두툴두툴한 집채만 한 원형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준비하느라 낫 모가지를 짧게 쥐고 나간다. 멍석이 어찌나 크던지 하나만 펴도 마당 가운데를 차지한다. 멍석은 소의 등 같다. 멍석 색이 소와 같아서 일까 아니면 소털의 까칠한 느낌이 멍석과 비슷해서 일까? 소등에 올라탄 것처럼 두둥 두둥 들뜬 기분에 환성을 지르며 멍석에 등을 비비며 뒹굴고 폴짝거리며 멍석을 따라 빙빙 돌며 신이 난다. 할아버지가 들어 오나보다. 얼마나 많은 모기풀을 베어 오는지 얼굴은 안 보이고 풀 덩이만 덤벙덤벙 움직이는 모습이 다리 없는 풀 귀신 같다. 마당 한가운데에 모깃불이 피어오르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매운 연기가 흔들거리다 멍석 안으로 연기가 들어오면 손을 휘저으며 연기를 향해 소리 지르며 발차기를 하며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고 개구진 남동생은 연기를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넘어져 무릎이 까진다. 할머니가 ‘꺄아익’ 소리를 내며 커다란 부엌문을 열고 쟁반 가득 옥수수를 내온다. 오늘은 신나는 날이다. 김이 모락거리는 알록달록한 옥수수에서 진한 옥수수 향이 난다.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르며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개다리 춤을 추다가 원숭이 소리까지 내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오두방정을 떤다. 방금 저녁을 배불리 먹었는데도 옥수수 귀신이 붙었는지 배부른 것과 상관없이  뱃속의 어느 부분이라도 밀고 밀어 옥수수로 채울 의양으로 탱탱한 알을 입 안 가득 채워 넣고  맛을 음미하며 씹어보고 한 알 한 알 낱알을 떼어 낱개로도 맛을 음미해 본다. 부른 배가 어찌나 얄밉던지 가슴까지 옥수수로 채워진 느낌이다. 할머니 옥수수의 특징은 옥수수수염을 옥수수에 붙은 그대로 찌는 것이다. 옥수수 알 사이사이에 낀 옥수수수염의 달달한 맛이 얼마나 좋은지 입안에서 썩썩 씹히는듯하다가 단맛만 남기고 사라져 녹는다. 그 느낌이 할머니 옥수수의 특징이다. 옥수수 먹기 전까지만 해도 훤히 보이던 마당이 뒤 곁으로 가는 골목 쪽부터 어둑어둑 해가 지고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멍석에 누워 연한 코발트블루의 하늘에 이르게 빛나는 별을 찾아본다. 별을 보며 누워서 먹는 옥수수 맛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는 한여름 밤의 행복이다. 




#이강 #이강작가 #감성에세이 #한여름밤

작가의 이전글 김치찌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