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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레이드 걸 Jan 10. 2021

The grey

산토리니의 사진만으로도 눈이 시큰해지는 나이


- 저기... 맑은 날이 좋아, 흐린 날이 좋아?

- 흐린 날...

- 나하고 같네!


나는 어떤 날이 좋더라?

지브리 애니메이션 <추억은 방울방울>의 귀여운 고백 장면을 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보통 맑게 개인 날을 좋아하지 않나? 독특한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도 맑은 날이 부담스러워졌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 있을 때 눈을 찌푸리는 일이 많아졌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힘들었다.

하얀 벽이나 종이를 볼 때마다 눈앞에 까맣고 자글자글한 먼지들이 동동 떠다녔다.

거슬리는 건 둘째치고 이게 뭔가 싶어 깜짝 놀랐지만 이내 인터넷 검색으로 비문증이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흔한 안과질환이었다.

그러나 직장에 다니면서 한낮의 볕을 쬘 일이 거의 없다 보니 8살 때부터 달고 살았던 비염처럼 어느 순간 적응이 되었다.


어차피 한여름의 너무 쨍쨍한 날씨만 아니면 그렇게 신경 쓰이는 증상도 아니었다.

잔뜩 흐린 회색의 날씨를 선호하게 되었다는 게 달라진 점이랄까.


아무리 그래도 지난여름 장마는 너무했다며 내내 투덜거렸다.

겨우겨우 도착한 사무실에서 나는 우산을 들고 온 것이 민망할 정도로 흠뻑 젖어있었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을 통해 지하에 사는 사람들의 가난과 고충에 감정 이입했다.

그러나 정말로 알까?

여름 장맛비 소리에 번쩍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창문을 닫고,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화장실의 변기에서 오수가 역류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이를 닦고 교복을 입는 그 무거운 마음을.


- 비 엄청 오고 나니까 미세먼지도 없고 하늘이 깨끗해서 좋다.


누군가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친다.

그래, 이래야 젖은 가재도구라도 볕에 말릴 수 있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종종 악의 없이 내뱉는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악의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나는...

흐린 창밖을 내다보며 어느 쪽일지 곰곰이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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