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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레이드 걸 Jan 02. 2022

스물셋, 봄, 잊혀진 편지

그리고 달콤하게 아픈 꿈, 한 토막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오래된 영화 중에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이 있다.

잔인해서 차마 눈 뜨고 제대로 보지 못하는 부분이 꽤 되지만 좋아서 몇 번이고 찾아보는 부분도 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로 그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배우 이병헌의 전매특허인 중저음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차분히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은 이 영화를 그저 조폭물로 치부할 수 없는 묘한 품격을 갖게 만든다.


처음에는 저게 무슨 소릴까 싶었다.

좋은 꿈을 꾸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게 아닌가 싶었다.

조금 나이를 먹은 다음에는 그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면 고통이지... 싶었다.

고작 월요일 아침, 꿈에서 머리를 감고 다 말리고 난 다음 알람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뜨는 것조차 그렇게도 분한 것을.

(오기로 안 감고 나간 적도 있음)


그런데 얼마 전, 정말 저렇게 엉엉 울지는 못했지만 새벽에 깨어나 세면대를 붙잡고 한참이나 얼굴을 숙인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경험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자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스물 셋, 하물며 봄이었다.

찬 기운이 코팅된 따스하고 향긋한 바람이 열린 창문 틈으로 슬그머니 들어와서는 지난여름, 센스 좋은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내 스커트의 끄트머리를 살짝 들추곤 복도로 달아났다.

옅은 파스텔 블루의 치마에 나는 아무 무늬도 없는, 끈조차 새하얀 무색의 러닝화를 신고 있었다.

그것마저 젊고 싱그러웠다.

하지만 긴 청치마 아래로 종아리가 드러나는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심각하게 A4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전공수업 강의자료 출력물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 섞여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한참 전에 놓쳐버린 이메일 한통이었다.

지난 2월에 졸업 후 연락이 소원해진 선배의 익숙한 이메일 주소가 상단의 발신인 칸에 찍혀있었다.


그는 두 학번 위의 예비역 선배였는데 말수도 적고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이었기에 과 사람들은 우리 둘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는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오- 둘이 사귀냐? 하는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쌍방이 매번 아니라고 정색하는 바람에 이내 관심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거의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그가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하게 되면서 연락이 끊겨버린 것이다.

전처럼 밤늦도록 데이터 낭비 격인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술을 사달라고 전화를 거는 것에는 여전히 거리낌이 없었지만 사회인은 그런 거겠지 싶어 왠지 통화버튼을 누르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게 벌써 석 달째-

이제는 뭔가 뾰로통해진 상태였다.

뭐야, 졸업하더니 이제 대학생 후배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바쁜 척 유세하는 거냐고.

서운함은 점점 쌓여 말도 안 되는 망상으로 변질되어 갔다.


어른스럽고 세련된 입사동기와 사내커플이 된 선배의 모습을 그려보았는데 우연히 내 메시지를 본 그녀가 얘는 누구?라고 묻자 아... 그냥 과 후배-라고 말하곤 슬며시 연락처에서 삭제하는 장면은 너무나도 실감이 나서 분노와 배신감으로 온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그런데 선배가 졸업식 전날 보내온 편지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나는 분명 강의자료를 프린트했을 뿐인데...

몇 장이나 되는 편지에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편지를 쓰고 있는 그날까지 선배가 나에 대해 느껴온 감정이 구구절절 담겨있었다.

낯부끄럽지만 요약하자면 그렇다.

네가 좋았다,

처음부터 좋았고,

지금도 좋아하며,

앞으로도 쭉 좋아할 예정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불현듯 그때 일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졸업 후 연락이 두절되었던 선배로부터 무려 일주일 만에 전화가 걸려왔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시종일관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이내 숨을 멈추고 우물거렸다.

나는 어쩐지 그 어색한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아 목소리 톤을 한껏 높여 시답잖은 농담으로 그의 말을 막아버렸다.

그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게 끝이었다.


이런 바보-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판서를 하던 교수님이 깜짝 놀랐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심한 기침과 함께 눈을 떴다.

나는 더 이상 스물셋도 아니었고 지금은 혹한이 도래한 한겨울이었다.

게다가 며칠 뒤면 또 한 살을 더 먹을 예정이었다

한동안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기침을 하느라 숨이 모자라서 그런 거였다.

감기 때문인지 비염 때문인지 아무튼 후비루 덕분으로 목에 가득 찬 가래를 뱉어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의 물을 잠그고 거울을 보니 며칠 동안 앓느라 눈밑이 쑥 들어간 40대 중반의 여자가 보였다.

피부는 퍼석하고 머리는 희끗했다.

하마터면 주저앉아 울 뻔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런 선배는 없었기 때문이다.

남은 건 20년 전, 이미 그곳을 떠난 나이 든 여자 한 사람뿐이었다.

그저 그뿐인 서늘한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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