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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레이드 걸 Mar 20. 2023

도심 속의 호우-텔

피세정념(避世靜念)

출장이 있어 서울 근교의 호텔에 하루 묵게 되었다.

관광객 타깃이 아닌 비즈니스호텔이라 그런지 실내구조가 남달랐다.

테이블과 소파가 좀 더 넉넉했고 욕조가 없는 대신 샤워부스와 분리된 화장실이 독특한 느낌이었다.

숙면을 고려한 침대 높고 굉장히 푹신했으며 베개 역시 깃털처럼 포근했다.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백화점, 다이소, 그리고 호텔 객실에는 벽시계가 없다.

그러나 이곳에는 블루투스 스피커와 알람 기능을 탑재한 탁상시계가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존재감을 뽐내며 놓여 있었다.

덕분에 TV 화면을 볼 수 없는 동안은 휴대폰의 익숙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켜 흥얼거릴 수 있었다.


좀 엉뚱하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호텔에 가면 짐가방을 풀기에 앞서 가장 먼저 실행하는 루틴이 있다.

바로 TV 상태 체크.

스마트 TV일 경우 유튜브 영상이 잘 플레이되는지, 구형 TV일 경우 휴대폰 연결 및 미러링 기능이 잘 구동되는지 우선 확인한다.

그렇게 즐겨보는 채널을 BGM으로 틀어두고 나서야 짐 정리를 시작한다.


김영하 작가가 호텔에는 일상의 근심이 없다-라고 했던가.

목적에 의해 잠시 머물렀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곳이기에 나는 나 자신, 또는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신비한 공간인 셈이다.

벽시계의 부재처럼 시간의 흐름이 평소보다 느릿한 곳.

그래서 호캉스에 열광하는 모양이지.

그러나 사실 나는 호캉스가 유행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비슷한 경험을 해왔었다.


최근 종교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모태신앙으로 오랫동안 성당에 다닌 나는 ‘피정’이라는 천주교 수련활동에 종종 참가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불교의 템플스테이와 결이 비슷하려나?

아무튼 가톨릭의 2대 행사 중 하나인 부활절(다른 하나는 성탄절)을 앞두고 보통 피정에 다녀오곤 하는데 수도원, 수녀원에서 제공하는 기도와 묵상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꼭 필요한 대화 외에는 나누지 않도록 소침묵, 대침묵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내뱉는 말이 줄고 주워담는 말도 줄어서일까,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피정의 집조차 묘하게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짜인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루가 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회색 먼지와 끈끈한 거미줄이 한 데 엉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어수선한 마음을 정돈하고 나면 일요일 오후 동네 목욕탕에서 집으로 향하는 듯한 개운한 맛이 들곤 했다.

억지로 끌려가듯 들어가놓고 언제나 상쾌한 얼굴로 돌아나오는 패턴을 반복하던, 그런 20대였다.


결국 호캉스든 피정이든, 복잡한 세상에서 격리되고 싶지만 영영 연결이 끊어지는 건 견딜 수 없는 상반된 욕구의 발로에서 기인한다는 특성은 동일해 보인다.

마치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로운 건 싫은 모순덩어리인 우리들처럼 말이다.   

최애 프로그램인 '달려라 방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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