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셔레이드 걸 Jun 21. 2020

수박(すいか, 2003)

제철에 꺼내 보면 더 좋은 드라마와 영화(1)

낡았지만 철마다 꺼내 입는 옷과 신발, 제철음식들, 그 계절에 찰떡처럼 어울리는 음악과 영상들.

그중에서도 계절이 시작되면 의식처럼 꺼내보는 드라마와 영화들이 있다. 봄과 겨울이면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와 <러브레터>를, 가을이면 <죽은 시인의 사회>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찾아보곤 한다. 나에게는 그야말로 계절로 각인되어 버린 작품들이다.

특히 여름에는 그때 챙겨봐야 제맛인 드라마가 있다. 2007년작 <호타루의 빛>처럼 시원한 맥주와 툇마루의 선선한 바람이 곧바로 떠오르는 작품이 바로 그렇다.

위에 언급한 드라마들은 언젠가 다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매년 여름이면 꼭 복습하게 되는 드라마 한 편을 소개하고 싶다.                                                                                                                               


2003년작 일드 <수박>-

<카모메 식당>, <안경>,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등 힐링(푸드)영화와 드라마의 아이콘과도 같은 바야시 사토미를 비롯, 모타이 마사코, 카타기리 하이리, 코이즈미 쿄코, 토모사카 리에, 이치카와 치카코 등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무려 17년 전 작품이다.

타이틀롤이 수박이니만큼 여름 하면 떠오르는 아이템이 총출동한다.

집 앞 개울에 담가놓은 큼지막한 수박과 병맥주, 커다란 해바라기, 새빨간 토마토, 꽃무늬 원피스, 낡은 선풍기,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 차가운 보리차, 끝도 없이 당첨되는 아이스바...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아마도 내일과 다름없을 정도로 틀에 박힌 삶을 살아온 신용금고 직원인 하야카와는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동료 바바짱이 횡령으로 인해 수배자가 되면서 더욱 외로운 일상을 지내던 중 엄마와 다투고 홧김에 독립(가출)을 해버린다. 우연히 눈에 띈 전단지를 쥐고 찾아간 곳은 식사 제공 하숙집 해피니스 산차.

하야카와는 그곳에서 별난 에로 만화가, 괴짜 교수, 성실하고 씩씩한 어린 여주인 등을 만나 교류하고 좀 더 자기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울고 웃고, 본인의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고, 그러다 어느새 나다운 게 뭔지 아는 사람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미 성인이 된 지 오래인 30대 중반 미혼여성의 늦깎이 성장을 그린 드라마인데 아직 풋내 나는 20대였던 나는 이 주제가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툭하면 영상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다.

등장인물이 거의 여성이고 그녀들은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 솔직하게 마주하며 거창하지는 않아도 진지하게 고민했고 실수가 있어도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곤 했다.

몇몇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조력자와 감초 역할이라는 점도 신선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최근에는 <문제 있는 레스토랑>이 인상 깊었다.)


어느덧 나는 유카와 키즈나에 이어 하야카와를 지나 이제 교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나도 여전히 그들처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 별것 아닌 일로 우울해하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에 웃음 짓는다.

그래서 여름이면 꾸준히 이 드라마를 꺼내 드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듯 특별하고 한편으로 짠하지만 귀엽고 매력적인, 내 주변에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네 여성의 이야기는 내가 지나온 길, 지금 걷고 있는 길, 앞으로 걸어갈 그 어떤 곳을 가리키는 기록이자 나침반 같은 존재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