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제 / 無題

조각글 모음

by 셔레이드 걸

+ 월동 준비의 시작

집들이 선물로 받은 행운목을 작년 봄부터 키우고 있다.

원래 두 뿌리였던 것을 세 뿌리로 늘렸다가 과습으로 죽어가는 걸 겨우 살려내 올여름엔 분갈이도 했다.

처음에 시름시름 앓는지 잎이 마르고 노랗게 되어서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돌보았더니 한 달 만에 기운을 되찾았다.


여름내 베란다 한쪽, 해가 닿지 않는 곳에 두었는데 이제 꽤 추워져서 집안에 들여놓았다.

놓을 곳이 마땅치 않아 원목 스툴을 사서 영차영차 조립하고 올려놓았는데 뿌듯.


이쁘네.




+ 심야의 감시자

예전 집에는 내 책상이 없었다.

있어도 둘 공간이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만.

그래서 접이식 노트북 좌식 테이블을 샀다.


주말밤이면 그걸 가지고 거실에서 글을 쓰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 강아지가 밤인데 안 잔다고, 자기 신경 쓰이게 만든다고 잔소리를 했다.

언니 금방 들어갈 거야. 10분만, 아니 20분만 더 할게.

이러면 못마땅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석상처럼 앉아 나를 지켜보곤 했다.

꾸벅꾸벅 조는 게 안쓰러워 안아서 이부자리에 올려놓고 자장자장 재워도 내가 일어서면 냉큼 또 따라 나왔다.

하는 수 없이 전원을 끄고 방으로 들어와 누우면 그제야 만족스럽게 내 발치에 똬리를 틀고 눈을 감았다.


돌이켜보면 참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 졸업식의 추억

나는 내 부모님의 학력과 경제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나와 동생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사한 부분도 있고 내가 무언가에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면 아마 무리를 해서라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거란 믿음도 있다.

그 증거가 딸 둘을 모두 4년제 사립대학에 보낸 거다. (친척들이 다 욕했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엘리트 그룹에서 미끄러진 나는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고등학교에서도 아슬아슬하게 중위권에 머무르는 게 최선이었다. (내신보다는 모의고사에 강한 타입)

역대급 불수능이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점수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수시도 지원) 정시 4년제 모든 대학의 최초합격에 실패한 나는 집 근처의 전문대학 영문과로 진학을 결정했다.

빨리 졸업해서 취직을 하고 얼른 돈을 벌고 싶었다.

마침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동네 친구 하나가 알고 보니 나와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지원했었는데 역시 붙었다길래 둘이 꺅꺅거리며 진심으로 기뻐했었다.


얼마 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친구네 집에 모여서 놀고 있는데 하필 그날, 정시에 지원한 인서울 4년제 대학에서 추가합격 소식을 알렸고 동생이 냉큼 친구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다)

친구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기에 나는 대놓고 좋아하지도 못하고 어어, 그래... 하고 어설프게 대꾸를 했다.

부모님은 내가 상위 대학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그냥 얼레벌레 그 학교의 신입생이 되었다.


동기가 될 뻔했던 친구와는 조금 서먹해졌다.




+ 트라우마 연대기

문득 우리 가족 모두는 과거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초등생 시절, 친할머니의 심부름으로 종로의 집에서 전농동의 외갓집까지 매번 된장이며 간장 따위를 꾸러 다녔던 부끄러운 기억.

5남매 중 셋째였던 아버지는 반에서 늘 1번을 할 정도로 키가 작았는데도 귀한 장손인 큰아버지와 유일한 여자형제였던 고모, 아직 어린 삼촌들 때문에 할머니의 심부름과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했단다.


팔순이 가까운 아버지는 여전히 돌아가신 큰아버지와 고모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엄마는 고등학생 시절, 대학생이던 둘째 외삼촌이 엄마의 교과서를 팔아 술을 마시러 다니고 외할머니는 이제 학교는 고만두고 취직이나 하라면서 수학여행에 보내주지 않았던 기억.

그러나 엄마는 원래 굉장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것도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아버지와 같은 5남매지만 막내딸인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서울에서도 꽤 규모가 큰 쌀집을 운영하던 호시절에 태어났다.

집에는 식모언니가 둘이나 있었고 50년대생인 엄마는 그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으며 초등학생이 되자 친구들과 함께 과외수업도 받았다.

외할아버지는 늦둥이였던 엄마를 예뻐해서 스케이트며 농구공이며 원하는 건 모두 사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학생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는 순식간에 기울고 서울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경기도 끝자락으로 쫓기듯 이사를 가야했다.


부모님과 오빠 둘, 바로 위의 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엄마에게는 이제 스무 살 차이 나는 큰 언니만이 남아있다.


내 동생은 중학생 시절, 하굣길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망설이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중전화)

보통은 그러지 않는데 그날은 어쩐지 비를 맞기가 싫었단다.

집에 있던 엄마가 전화를 받긴 했는데 네가 알아서 오라며 쌀쌀맞게 끊어버렸다고 한다.

걸어서 등하교를 하던 동생은 그 두꺼운 교복 재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내리는 비를 모조리 맞고 돌아왔다.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엔 어느 날 집에 치약이 떨어졌길래 식탁에 놓인 정체 모를 돈봉투에서 만원 한 장을 꺼내 슈퍼에 다녀왔더니 아버지가 월세 낼 돈에 함부로 손을 대면 어쩌느냐고 불같이 화를 내더란다.

급기야 분에 못 이긴 아버지가 동생의 눈앞에서 치약을 벽에 던져 터뜨렸던 일을 아직도 원망스럽게 회고한다.


나는 아끼던 강아지인 몽룡이를 더 이상 키울 수 없다는 엄마의 선언으로 (원인은 나의 심각한 알레르기 비염 탓이긴 했다) 이모집에 두고 돌아서던 열여섯, 그날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이모가 아는 지인이 잘 키워주기로 했다는데 그 지인이라는 게 아마 개장수였던 거 같다.

생전 헛짖음 한번 없던 순하디 순한 강아지였는데 그날은 동네가 떠내려가라 울부짖었다.

나와 동생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손을 꼭 잡고 엉엉 울었다.


그때 다짐했던 것이 다음번에 혹시라도 강아지를 키우게 된다면 그 애는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끝까지 돌보겠다는 거였고 다행히 17년간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 여름,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편히 보내줄 수 있었다.


나중에 사진을 찾아보니 두 강아지가 무척이나 닮아서 놀랐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스승의 은혜